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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22. 2024

기미년의 태화관 현판을 발견하다(2)

  그렇다면 이다음으로 이 현판은 누가 썼는지, 언제 쓰인 것인지를 찾아내야 했다. 처음 이 장소를 방문했던 당일에는 현판 속의 작성자 정보를 유심히 살피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문화재 전문가인 박찬희 선생님과 동행하여 지월장을 다시 방문했다. 박찬희 선생님은 현판에 새겨진 인장 속의 글자를 단번에 읽어내셨다. 이 글씨를 쓴 주인공의 이름은 황금란이었다. 당시 대형 요릿집이었던 태화관, 그리고 그곳에 걸려 있던 현판에 글을 쓴 황금란이라면 어쩌면 그녀는 그곳의 기생이 아닐까. 이름에 '매', '난', '국', '죽'이 들어간다면, 더더욱 기생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후 신문 아카이브에서 황금란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1920년 4월 <매일신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경성 화류계에 일류기생이라 하는 한남 권번 황금란(黃錦蘭)도 조홍련의 가야금 병창으로 만장의 박수갈채를 큰 환영을 받는 가운데 한낮 색채를 더하였고”     


경성의 일류 기생 황금란이 노래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황금란의 한자 표기는 현판 속의 한자와 정확히 일치했다.     

1938년 2월 <매일신보>에는 기생 아씨가 집에 든 강도를 달리기로 쫓아가서 잡아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때 '기특한 지혜로 범인을 체포한 기생'이 바로 황금란이었다. 


여기에는 청진정 368-2호라는 그녀의 집 주소까지 나왔다. 해당 주소는 <경성정밀지도>를 통해 대략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청진정은 오늘날 청진동으로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 뒤쪽의 동네로, 이를 보면 황금란은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던 걸 알 수 있었다.     


경성정밀지도 일부(청진동)

만약 이 현판이 3·1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태화관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면, 이것이 제작된 시점이 3·1운동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알아봐야 했다. 흔히 편지를 쓸 때는 본론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날짜와 작성자를 덧붙이곤 하는데, 현판 역시 이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옛 글씨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세로로 쓰이니, 이러한 정보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왼쪽 부분에 자리 잡게 된다. 현판의 왼쪽에는 '기미계춘하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기미년'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을 때, 3·1운동 당시, 거리에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기미독립선언서'라고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당대에 '기미년'이라고 불렸다. 설마, 같은 해일까. 역사상 기미년을 60년을 기준으로 여러 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현판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집에서 발견되었고, 현판 내용 속에 등장하는 명월관과 태화관이 동시에 존재했던 시점을 좁혀 나가면, 1919년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기미년 뒤에 붙어 있는 '계춘 하완'은 그간의 일들을 페북에 올린 내 글을 보고, 공주대 윤세병 교수님께서 '늦봄 하순'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댓글을 남겨주셨다.     



  우연히 묵었던 서울 용산 후암동의 게스트하우스 지월장 거실에 걸려 있던 현판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태화관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현판은 당시 경성 화류계의 스타 중 하나이며 태화관을 드나들던 기생 황금란이 썼다. 황금란은 태화관 부근에 살고 있었고, 달리기를 무척 잘해서 집에 침입해 온 강도를 달려가서 잡아내기도 했던 씩씩한 여성이었다. 3·1운동 이후 태화관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이후 손님들의 발길은 뜸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 때에 태화관의 번영을 바라며 명월관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을 일곱 글자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20년 봄, 태화관은 폐업하고 이곳은 태화여학교로 용도를 변경하게 된다.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이 현판은 아마도 태화관 손님으로 드나들었을 일본인 경제가 서도신장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경성정밀지도, 대경성부대관과 같은 자료들을 조사하며 이런 이야기들을 정리했고, 열 장 짜리 페이퍼로 정리를 했다. 이때가 2019년 1월이었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태화관 관련해서는 현재 '태화빌딩' 앞에 '태화관 터'라는 안내만 표시되어 있을 뿐, 관련한 유물이나 유적은 남아 있지 않은 터라, 이 현판은 나름 귀한 흔적이기도 했다.     


이제는 태화관의 '소장자'로 불리게 될 지월장의 주인분은 현판을 박물관에 보낼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셨다. 그간 조사한 자료를 정리해서 보내드리고, 몇 곳의 박물관 기관을 지정해서 이 보고서를 보내보시라고 안내해 드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주인분께서는 박물관에서 실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보고서 내용만으로도 태화관 현판임을 확신한다며 매입 의사를 밝혀왔다고 전했다. 기관에서 그 현판을 매입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그간 조사했던 것에 마침표가 찍히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은 채, 한 개인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 그것이 눈에 띄게 된 것은 마침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해였다. 황금란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일제강점기 신문에서 찾게 될 때마다, 그와 나는 어떠한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걸까 하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혹시…."라고 했던 가설이 자료를 바탕으로 가능성이 높은 역사적 사실 쪽으로 가깝게 다가갈 때마다 역사라는 학문이 얼마나 매혹적인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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