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를 문자로 치환하는 마음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글을 사랑한다. 책도 출간하자마자 샀다. 하지만 책의 한 꼭지도 여태껏 온전히 읽지 않았다. 내키는 몇 구절만 발췌해 미술품 보듯 감상했다. 잠깐 보아도 듣던 대로 정확함에 속이 베인다. 너무 좋아 괴로운 마음이다. 생존을 위해 책을 밀어 두고 비생산적인 일을 했다. 같은 이유로 문학은 스스로 읽지 않는다. 소설 속 타자에의 몰입은 별안간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방출시켜 물리적 생존을 지독히 방해한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기계적으로 쓰인 구식 문장이다. 나 같은 사람이 나 아니고는 없을 거란 착각에서 비롯됐다. 나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으므로 나 같은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다. 글쓰기라는 벅찬 노동을 시작하며 긴 호흡을 함께 할 글감을 곰곰 고민했다. 많은 글쓰기 선구자들이 입 맞추어 닦달하길 네가 잘 아는 걸 우선 써보라 한다. 내가 인지하는 모르는 것 중에 나를 덜 모르는 편이다.
체면, 착각, 회피, 불친절, 불성실, 불확실, 완벽주의. 나를 화두로 큰 고민 없이 나열했다. 부정적인 워딩이 주를 이루지만 부정을 긍정하길 즐겨한다. 부정에 반전을 입히면 이보다 더 극적인 긍정이 없다. 이들 파편의 조합이 내 순간을 대변한다.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게 해 준다. 나의 생존 능력은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불가피하게 빛을 발한다. 척박한 땅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야기는 일단 흥미롭다. 영화나 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나에 대하여>은 2020년을 맞이하여 시작한 내 글쓰기 연습이다. 글은 신기하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쓴 글도 타자가 쓴 글이 되어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의 고백이 된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방법>에서 이야기하듯 작가 본인이 쓴 책조차 결국 읽지도 않은 책이 된다는 것이다. 글 쓴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책(글)만 남아있다니 정확한 표현에 정말 기쁘지 않은가. 기어이 타자가 될 현재의 단서를 남기는 것.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이다.
2019년 초 고마운 사람과 글을 나누었던 타자를 그 글로써 이해해본다. 반면 글을 안 쓴 시절의 타자는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많지 않다. 글쓰기를 멈춘 이후의 나는 설명하기 어렵다. 힘들었던 것과 왜 힘들었는지에 대한 현상은 늘어놓을 수 있으나 현상과 현상 틈에 있던 존재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무엇이 증발한지조차 알 수 없어 아쉽다. 뻔한 표현으로 삶은 흐른다고들 한다. 흐름에 두 손 쑥 넣고 건져 올리는 행위가 글쓰기이다. 건진 건 글이다. 허탕 친 적도 많다. 캄캄한 바닥에 심해어라도 사는 것처럼 손을 넣는 걸 겁내 했다. 흙탕물이 가라앉아야 맑아지고 선명해질 텐데 매번 인내하지 못하고 손을 쏙 뺀다.
제니스 마투라노의 <생각의 판을 뒤집어라>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실은 우리로 하여금 저항하게 하는데 그 저항은 좋은 것이다.’ 글쓰기도 진실을 보기 위함이니 이렇듯 어려우면서도 기꺼이 저항하려는 거 아니겠나. 흘러간 건 건질 수 없다. 지금도 줄곧 흐르고 있음에 어지러운 마음은 뒤로 하고 글 쓰는 마음을 단정히 하려 한다. 흔들리지 않고.
기왕 글을 쓰는 참에 좋아하는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을 빌어 나를 문자로 정확히 치환하려 애써볼 것이다. 밀어 둔 책들도 조금씩 정독하기 시작했다. 바로 읽어야 바로 보고, 바로 보아야 바로 쓸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하지만 모든 창작물이 그러하듯 글과 나는 내게서 떼어놓자마자 분리된다. 층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님을 미리 명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