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소이 Oct 22. 2021

맹씨행단에서

  나는 막 정신과 의원에서 나왔다. 한 손에는 처방받은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삼 주간 먹어야 할 아들의 마지막 약이었다. 나는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그간의 긴장이 풀려선지 힘이 빠지고 있었다. 힘을 얻고자 할 때는 독서만 한 치료법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강렬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잠이나 실컷 잘까? 하다가도 그건 당장 필요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공감을 얻고 싶었지만, 남편은 근무 시간에 전화 거는 일을 싫어했다. 11월 초순이 지났다. 남들 다 가는 단풍 구경 때를 놓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인파가 몰리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한적한 곳을 좋아했다. 며칠 전, 지인이 혼자 다녀와서 행복하다며 보여준 사진이 있었다. 아산 맹 씨 행단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나서 나도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간 잊고 있었던 ‘나’라는 존재감을 찾을 수도 있겠다.라는 기대를 품었다. 예전부터 나는 ‘맹사성’ 공을 닮고 싶은 예술인으로 존경했다. 그를 만난다면 혜안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얻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맹 씨 행단을 마지막으로 본 지도 칠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나는 망설일 필요도 없이 배방읍으로 차를 몰았다.

  아산시 배방읍 변두리에 있는 설화산은 방금 붉은색 털갈이를 마친 공룡 등줄기 같았다. 살집 두툼한 산 능선 중턱에 ‘복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맹 씨 행단은 그 마을 초입에 있었다. 마을 진입로에는 제주도를 방불케 하는 돌담이 낮고 길게 뻗어 있었다. 그 옆으로 실개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흘렀고. 차곡차곡 쌓은 돌담 옆으로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고택이 눈길을 끌었다. 선혈을 뚝뚝 흘리는 단풍나무와 황금을 떨어뜨리는 은행나무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무 밑동이 굵고 단단해 보였다. 장승처럼 우뚝 선 회화나무는 단연 나무숲에서 제일 맏형이었다.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방문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전날 밤, 비가 세차게 퍼붓더니 오늘 아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그러나 매몰찬 비바람 때문에 가을 끝자락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은 삭발식을 거행하듯 가지고 있던 잎사귀마저 모두 떨어뜨리고 있었다. 청자처럼 맑았던 하늘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날카로웠고, 그 바람이 염색을 마치고 이제 모든 걸 비워내는 단풍나무를 격렬히 흔들었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 등걸은 매질을 당하듯 세차게 두들겨졌다. 그 소리가 마치 대금처럼 구슬펐다. 고목 주변은 노란 깔개를 펼쳐 놓은 듯 잎들이 포개지거나 겹쳐 있었다. 단청이 정갈한 문화 해설사 집을 지나 돌층계를 오르면 사택이 나왔고, 그 위로 이어지는 돌층계를 밟으면 맹사성 고택이 나왔다. 그 앞에는 맹사성 공이 친히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쌍계수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 자태가 웅장하고 신비스러우면서도 육백 년을 견뎌온 나이 때문인지 위엄이 있었다. 고택 뒤편에는 야트막한 돌담이 행단 주변을 알을 품듯 단단히 감쌌고, 세 명의 맹 씨 인물 위패를 모신 ‘세덕사’ 사우가 사립문 너머 언뜻 보였다. 세덕사도 고택처럼 단아한 한옥이었다. 사위는 한없이 고요했다. 두툼한 점퍼를 입고 왔음에도 얼굴에 닿은 공기는 차가웠다. 쌍계수도 고택도 사우도 돌담도 모두 육백 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꿋꿋이 이 공간을 지켜왔다. 한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온 문화재를 볼 때마다 나는 숙연했다. 변하는 것은 사람뿐이었다.

  칠 년 전 행단에 왔을 때, 내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이었다. 그때 아들도 함께 있었다. 가을날이었다. 아이는 쌍계수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고요함을 깨뜨렸고, 바닥으로 추락한 노란 은행잎들을 내게 뿌리며 신나게 주변을 뛰어다녔다. 아들은 남모르는 아픔이 있었다. 아들의 괴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다시 찾은 행단은 예나 지금이나 고요했다. 쌍계수 앞에서 내가 혼자 서 있게 될 줄이야. 그러나 이 시간을 갖길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한 아이의 엄마로 육아라는 세계에 뛰어들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허둥거리며 아이 교육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쌍계수 앞에서 크게 소리 질렀다. 칠 년 전 아이가 질렀던 괴성처럼 말이다. 허공에서 나의 목소리가 떠밀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다시 소리 질렀다. 그리고 억누르며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간 애썼다고, 정말 수고했고, 고생했다고. 아들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두 그루의 정승 같은 은행나무가 바람을 통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공감받는다는 느낌은 자연 속에서 혼자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사람의 말이 아니어도 어떤 기운으로 스며들었다. 그 누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도 자연만큼은 내 편이었다. 자연은 함구했고, 내 이야기만 오롯이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그 느낌이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간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다녔는지도 모른다. 아들은 어느덧 초등학교 오 학년이 되었고, 나는 마흔을 넘긴 중년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속 시원했다. 마치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한 옛이야기 주인공과 같았다.

  아들은 주의력 결핍 장애가 있었다. 너무 산만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고가 빈번했다. 그때마다 나는 심장을 빨랫줄에 내걸고 조공을 마치는 신하처럼 피해자들에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했다. 허리를 굽혀 머리를 숙이는 일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많이 한 적도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나도 자존감이 높은 여성이었다. 도도한 작가의 꿈을 염원하며 문예 창작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부터는 취미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이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주변인을 힘들게 했다. 그때마다 나는 사건을 수습하고 용서를 청했다. 도도하고 건방졌던 콧대 높은 나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아이는 당장 약물치료를 해야 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아들 같은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경계인’이라고 불렀다. 경계인은 정상도 장애도 아닌 그 중간에 걸쳐있는 지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컬어 말했다. 아이의 뇌 발달이 늦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나도 점차 주변을 경계하는 경계인이 되었다. 칠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신과 의사는 이제 삼 주치의 약만 먹고 끊어보자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어깨를 흔들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육아의 길은 끝나지 않았지만, 약물치료가 끝이 난다는 사실은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맹 씨 행단이 칠 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뭐랄까? 뭔가 정리된 느낌이랄까? 사람들 손길이 많이 닿았다. 고택 맞은편에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 새로 지어졌다. 칠 년 전만 해도 고택 주위에는 관목과 잡풀이 많았고 인적이 드물었다. 물론 관광지를 알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나 요즘처럼 주목받지는 않았다.

바람세기가 범상치 않아서 잠시 기념관 안으로 몸을 피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파란 관복과 검은 관모를 쓴 ‘맹사성’ 공의 영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두 손을 포개고, 관모를 쓰고 계신 공의 모습은 절도를 아는 예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또한, 사유가 깊고 고결한 지식인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고불 맹사성 공의 인물 업적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짧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조선 초기의 재상이요, 저술가이자, 음악인이었다. 또한, 외교에도 능력 있는 정치가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격변의 시기에 학자로서 군왕을 어떻게 보필하고 도와야 할지 아는 지혜로운 신하였다. 역사 속에서 공이 드러낸 업적은 ‘세종대왕’ 때 그 빛이 가장 두드러졌다. ‘세종대왕’이 누구이신가? 518년 조선 역사에서 문화의 꽃을 가장 활짝 피운 임금이 아니신가? 그런 임금을 도운 사람이 바로 ‘맹사성’ 공이었다. 아산이라는 지역 내에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사실 ‘맹사성’ 공은 이순신 장군, 장영실 과학자 같은 큰 업적을 남긴 인물에 가려 지역 내에서는 많이 찾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라도 문신 ‘맹사성’ 공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져 젊은이들이 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이보다 큰일은 없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맹사성’ 공을 다시 찾는 것일까? 이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과학 기술 시대에 인문학을 통해 고결한 정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요구가 아닐까 싶다. 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부를 때, 어른이나 선생님으로 부르기보다 ‘공’이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써 높임을 드러내는 게 아름답다고 여긴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겨울에는 창포 방석에 앉았으니 좌우에 다른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청백 간결하고 단아 정중하였다. 일을 아뢰어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윗글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이 쓴 수필 문학 집 <필원잡기>에 나오는 맹사성 공의 행실을 적은 글귀다. 이 글에서 작가는 맹사성이라는 인물에 대해 ‘공’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존경의 대상임을 암묵적으로 알렸다. 물론 ‘공’이라는 말의 어원은 한자어에서 음이 파생되었기에 우리말로 어른,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나쁘지는 않다. 2인칭 대명사에서 당신, 그대라는 호칭보다 더 숭고한 뜻이 담긴 말이 ‘공’이라는 호칭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 단순히 고요하고 한적해서? 맹사성 공이 좋아서? 자연이 좋아서? 아니다. 맹사성 공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다시 찾기 위해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예술적 감수성을 많이 내려놓았다. 나는 맹사성 공의 높은 업적 중에서 고결한 도덕적 품성과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이십 대부터 닮고 싶었다. 다양한 활동과 업적을 통해 학문적 깊이와 가치관을 쌓아 올렸던 문인 맹사성 공의 모습이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관직에 올랐고, 은퇴하고는 자연 속에서 여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시문을 통해 친히 보여주셨던 그의 모습은 인생 2막을 준비하고픈 내 안에 본보기 이자, 스승으로 자리 잡았다. ‘강호사시가’는 맹사성 공이 쓴 연시조다. 임금님이 아니었다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었다고 공께서는 겸손하게 마음으로 표현하셨다. 나는 이 연시조가 좋다. 엄마로서 삼십 대 젊음을 보냈다면 남겨진 사십 대의 삶은 경계인이 아닌 맹사성 공처럼 청백한 정신의 힘으로 삶을 꾸며 가고 싶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내 삶의 가치관을 높이고 자연을 벗 삼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예인으로 나를 가꾸어 가련다. 그가 남겼던 <강호사시가>에 첫 구절을 읊어 본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가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해옴도 역군은이샷다.’     

  마음에 짐을 덜어내니 흥이 절로 나서 예까지 왔다. 맹 씨 행단에서 큰 에너지를 받았다. 어쩌면 이 모든 깨우침도 고불 맹사성 공이 아니었으면 어쩌랴. 전시관을 나오며 문 앞에 붙은 고불 정신을 다시 상기한다. 충효, 결백, 효행, 청렴, 결백, 성실, 신의, 겸손, 예의, 결의, 수분, 이 정신들은 삶 속에서 실행에 옮겨야 할 가장 기본적인 철학이다. 오늘 방문은 복을 듬뿍 준 만남이었다. 진정 큰 에너지를 받았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새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