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내 편 하나 있으면

by 길엽

<색소폰 동호회에 올아 온 어느 무영 시인의 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동지 섣달 긴밤에

새끼꼬아 짚신엮고

가마니 짜며 밤 새워도

시엄마 투박에는 설한 설움

말 못하고,

싸락눈 쌓인 새벽길에

물양동이 머리이고 샘물길어

오던 길 눈물인지 샘물인지

흘러내린 서러움에 눈물닦던

광목치마,

혿바지 겉저고리 차림새로

몰래 나와 며느리 고생한다

말 못하고 길만 쓸고

장작불만 지피시던 할아버지,

열 한식구 밥상차려 올리며

행여 내 새끼 밀어낼까

부엌데기 솥전에서 숭늉끊여가며

애태우시던 어머니,

꽃피던 춘사월에 할아버지 세상

하직할때 머리풀며 통곡하던

우리 어머니.

어머니 !

며느리 오가는 길에 넘어질까 싸락눈 쓸어 주시던 할아버지

그립고 또 당신도

그립습니다,

언제나 어머니 편이시던 당신의 시아버지이자 내 할아버지

세상에 내 편 하나만 있어도



인적이 드문 강변 둑길을 홀로 편안하게 걸어갑니다. 세상 풍경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가끔은 오늘처럼 여유롭게 삶을 누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는 참으로 다양하여 인생의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관점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오랜만에 들어온 친구 카톡 문자에 '세상 살면서 너 하나 친구만 있어도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이 들어 있기에 내가 뭐 그리 귀한 존재인가 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젊은 날 이런 저런 모임에 많이 참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주위에 친한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제가 뭔가 부탁하면 쉽게 쉽게 해결되어 다른 사람들이 일부러 저를 이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좋았습니다. 남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를 이용해도 좋았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뭐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정해진 삶의 과정이라 여겼습니다. 보람도 느꼈습니다.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노년 세대의 삶을 살면서 그런 생할 패턴에선 멀어진 듯합니다. 고즈넉한 자연 풍경을 보며 천천히 걸아가는 삶의 애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 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지만, 친구의 문자를 보면서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 조만간 그 친구 한 번 만나러 갈까 싶네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비록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자랐지만 어머니의 폭포수 같은 사랑 덕분에 힘든 시기를 실감하지 못했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는 항상 먼저 깨어 계셨고, 환하게 웃으면서 제 얼굴을 보셨지요. 아침 먹고 3km여 등굣길 비포장도로를 향해 책보자기를 X자로 단단히 동여매고 집을 나서면 행여 함께 싼 도시락에서 김치 국물이 배어 나올까 노심초사하면서 몇 번이나 살피셨지요. 집을 나서서 동구밖 길게 난 길을 벗어나면 곧장 큰 길로 들어서고 그곳부터는 버스 트럭 택시 등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차조심해라'라는 말을 몇 차례나 반복하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어머니께서 제게 해주신 모든 말씀과 행동 자체가 아들에 대한 엄청난 사랑이었습니다. 그땐 진짜 몰랐지요. 왜 자꾸 차조심하란 말을 반복하지, 의련히 알아서 잘 다녀올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큰 길을 깃점으로 학교까지 사정없이 뜁니다. 등굣길 도중에 있는 높은 고개는 뛰어 오르는 것이 조금 힘들지만 고개를 넘어서면 저 멀리 펼쳐진 면소재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바로 옆에 있는 국민학교도 보입니다. 열심히 뛰어 학교에 도착한다고 해도 누가 칭찬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열심히 뛰었는지 모릅니다.


훗날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동기들 특히 여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해 준 말이 있습니다.


"니는 매일 교실 뒤에서 숨을 몰아 쉬고 했다 아이가. 워낙 멀리서 뛰어오이 그랬겠제. 우쨌든 니는 매일 그렇게 학교 와서 교실 뒤에 큰 숨을 쉬던 때가 제일 많이 생각 나. 니는 생각나나."


어머니께선 그때 어린 저를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의 살아가는 희망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저만 보만 그렇게나 좋아하셨지요. 저도 어머니를 위해 뭐든 해드리겠다고 마음 먹었었지요. 세상 그 누구보다 어머니 편에서 어머너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아내가 가끔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당신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았을 것 같아. 원래 말이 있잖아. 효자가 있으면 그집 며느리는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어머니 살아 계셨으면 당신 보는 낙에 사셨을 끼고 난 따돌림, 왕따를 당했을 것 같다. 안 그래?"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몇 날 며칠이고 집에 안 들어 오실 때 동네 어느 아재가 도박빚을 받으로 우리 집에 왔다가 어머니께 따지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발로 찼던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껜 반항적이고 불만이 많던 때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땐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시골집에 갔다가 우연히 동네 아재가 어머니께 그런 폭행을 하는 것으 목격하고 제가 폭발했지요. 책가방을 마루에 휙 던지고 그 아재를 쫓았습니다.


어머니는 말렸지만, 제 눈에는 뵈는 게 없었습니다. 그집까지 쫓아가서 당시 함석으로 된 대문을 통째로 밀어 부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사과하지 않으면 담장도 다 부숴 버린다고 제가 그 아재 집 앞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결국 아재가 우리집까지 와서 어머니께 사과를 하고 일단락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 아재가 우리집을 빙 돌아서 가시고, 어쩌다 길에서 저멀리서 저를 보기만 해도 얼른 피하셨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함석으로 된 대문 수리비도 어머니께서 저 몰래 지불하셨다네요. 그 사실을 제가 알면 그 집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적이 있는데도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세상에서 내 편은 '우리 집 둘째 아~'라고 했다네요. 우리가 살면서 단 한 명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면 살 만하지 않나요.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