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늦게 멀리 경기도 남양주 시에서 혼자 생활하는 막내아들이 집에 왔습니다. 큰아들과 딸 아이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직장이 있어서 늘 함께 생활하지만 막내아들,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그 아이가 식구들 모두 자고 있는 새벽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 모두 깊이 잠들어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금요일 퇴근하고 수도권 그 복잡한 교통 사정으로 약 2시간 가까이 걸려 서울역에 도착한 뒤 KTX로 내려오지만 깊은 밤이라 택시를 타고 도착한 모양입니다. 저도 평소 웬만하면 막내아들이 오는 시간에 잠자지 않고 기다렸을 터인데, 요즘 나이 탓인지 밤 10시가 되면 그냥 잠에 떨어져 버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데, 현관에 우리집 아이들 3남매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나란히 놓인 신발만 봐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막내아들이 집에 오면 3남매가 하루 종일 일정을 함께 합니다. 금요일 오후에 도착하면 막내 아들이 제 차를 운전하여 형과 누나를 태우러 가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누나와 함께 시내에서 쇼핑도 하고 저녁 식사를 하는 등 그렇게 완전체가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우애가 깊어서 말싸움도 크게 하지 않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보기 좋았습니다.
직장에서 근무하다가도 본가로 가는 날을 떠올리면 마음이 갑자기 급해지고 설레게 된다는 막내아들의 고백에 부모 입장에서도 그냥 고맙기만 합니다. 큰아들과 딸 아이와 달리 막내아들은 저와 아내를 즐겁게 한다고 재미있는 유머를 많이 들려 줍니다. 그 내용이 비록 어설퍼도 부모 입장에선 아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냥 즐겁고 고맙기만 하지요. 아침 시간이 지나면 큰아들이 제 동생들을 위해 특별 요리를 준비할 테고, 딸 아이와 막내아들은 젓가락을 들고 맛난 요리를 기다리겠지요. 새벽에 현관에 놓인 3남매 신발을 보면서 방마다 아이들 잠자는 모습을 확인합니다. 딸 아이는 조심스럽네요. 막내아들은 깊이 잠들었고, 큰아들은 노크해서 들어가면 자다 가도 벌떡 일어나 웬일이시냐고 물어옵니다.
"아이고, 야~야, 자는데 깨워서 미안타. 현관에 보니 막내가 왔네. 그래서 방마다 확인한다고 이렇게 문을 열었다 아이가. 미안타 더 자라. 피곤할 낀데."
아이들이 모두 30대 초중반이 되니 더욱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저와 아내에게 함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저와 아내에게 지극정성으로 잘 해주는데도 역시 그들이 30대에 올라서니 매우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큰아들을 향하여 "너" 또는 "니가" 등의 호칭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특히 큰아들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수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남과 대화를 할 적에는 "우리 집 큰아~가 ~~~~~"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요. 물론 급할 때는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적에는 어머니께서 형님을 부를 때 이름보다 "큰아~야"라고 할 때가 많았지요. 그때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지금 제가 부모 입장이 되어 보니 30대 중반의 큰아들 이름을 불쑥 불쑥 부르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요즘은 3남매가 완전체가 모여 우리 부부와 식사를 할 때는 평소와 달리 아내의 수다가 많아집니다. 그리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닌데, 아이들 3남매 앞에서는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막내아들이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직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우리 모두를 폭소틀 터뜨리게 합니다. 큰아들은 역시 말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미소 가득한 얼굴로 오가는 대화를 지켜 봅니다. 간간이 우리가 묻는 말에 답할 정도입니다. 딸 아이도 말이 적은 편입니다. 물론 평소에 딸 아이와 아내가 안방에 나란히 앉아 긴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깔깔거리기도 하고, 시내 쇼핑도 함께 가면서 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지요.
새벽 일찍 현관 앞에 나란히 놓인 3남매 신발을 보기만 해도 제 마음이 갑자기 좋아집니다. 이것이 나이 든 부모 마음일까요.
갑자기 어린 시절 제 고향 마을에서 목격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점심을 먹고 뒷산으로 놀러가다 보았으니 오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고향 마을의 어느 아재가 당신의 큰아들을 큰 소나무 기둥에 묶어서 마구 매질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검은 색 고무 바로 웃통을 벗은 큰아들을 칭칭 감아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재가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그 집 큰아들의 잘못을 일일이 일러바칩니다. 그 형은 덩치가 상당이 컸는데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어떻게 묶였는지 진행 상황은 모르지만 제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그 장면을 목격했지요. 남에게도 쉽지 않는 일인데 자신의 큰아들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저렇게 잔인하게 마구 때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집 큰아들은 제가 도착하기 전에 많이 맞았는지 온몸에 고무 바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고 매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지금도 그 형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
얼른 집에 와서 어머니 아버지께 일러 바쳤습니다. 마을 이장이셨던 아버지가 급하게 나섭니다. 마을 이장이 무슨 사법적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골 마을에선 한학을 조금이라도 경험하셔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아버지가 그런 일에나서서 간섭하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따라 주었고요. 어떨 때는 학교 간다고 밤운을 나서면 마을의 어느 형제가 우리집 마루에 꿇어 앉아 아버지 판결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 집 부모님께서 형제가 하도 싸우기에 내일 아침 일찍 최동장 집에 가서 누가 옳은지 판결 받아 오라고 했다면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장면이지만 그런 일도 몇 번이나 있었고, 어느 형님이 형수님을 괴롭힌다는 말을 들으면 아버지가 직접 가셔서 형님을 만나 설득도 하고 질타고 해서 부부 간의 갈등도 해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어느 형이 소나무 기둥에 묶여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있다고 제가 알려드리자 아버지께서 급하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당장 그 매질을 그만두라고 호통치면서 그 형의 온몸을 칭칭 감았던 고무 밧줄을 풀어버립니다. 장시간 고무 밧줄에 묶여 피가 통하지 않은 피부에 멍이 크게 들었습니다. 그 집 아지매는 우리 아버지를 붙잡고 연신 정말 고맙다고만 하시고, 그 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 아재를 다른 곳에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선 그 아지매와 그 집 아들을 데리고 앞산에서 내려왔습니다 . 그렇게 대충 분위기가 정리되자 그 집 아재가 밤늦게 우리집에 찾아와 아버지랑 나란히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신세 타령을 하셨습니다.
아재 입장에서 그 집 큰아들이 큰 잘못을 했다면서 부모로서 "다 큰 아를 때려죽이도 못 하고 살리지도 못하고"를 반복합니다. 지금도 그 집 큰아들의 무슨 잘못을 했고, 그 아재가 왜 그리 잔인하게 아들을 매질하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 아재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그 형은 시골을 떠나 멀리 타지에 살고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 형은 지금 짐작에 70세 전후가 아닐까만 집작할 뿐이지요. 시골 마을이 늘 평화롭고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녁이면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사서 마신 아재들의 싸움 소리도 자주 들렸고, 어느 댁에선 부부싸움도 심심찮게 했었지요. 요즘엔 부부싸움을 하는 경우를 참 보기 어려운데, 그때는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크게 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가정은 고요하고 평화롭긴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그 집 아재가 큰아들을 마구 때린 이야기를 언급하셨습니다.
"야~들아 느그는 낭중에 장가가더라도 아~들을 절대 때리면 안 된다 알겠제. 그라마 우째 되는 줄 아나. 그렇게 맞은 아~가 정상적으로 클 수 없다 아이가. 그라만 그 아~가 커서 그 부모를 때리게 되어 있다. 저 집도 낭중에 우째 될지 뻔하다. 저 집 큰아~가 무슨 잘못을 해도 애비가 되~가 저렇게 모질게 아들을 패만 낭중에 아들한테 반드시 당할 끼다. 그라고 저리 때린다고 해결될 끼 아이다. 야~들아 느그는 낭중에 아~들이 태어나도 절대 때리면 안 된다 알겠제. 절대로 안 된다이. 말로 해서 안 되만 그냥 부모 잘못이라고 마음 속으로 생키고 그냥 참아라이 그 아가 누구 뱃속으로 낳은 기고. 그걸 몬 참고 아~를 저리 사정없이 때리면 내가 장담하는데 무조껀 당한다이. 그리고 부모 자식 간에도 말 함부로 하믄 절대 안 된다이. 으이~"
실제로 그 집 형이 성장하여 그 댁 어른께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 집의 부모와 자식들 간의 갈등이 워낙 커서 설 추석 명절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에 들었습니다. 더 이상 상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저 또한 고교 시절부터 고향 시골집을 벗어나 하숙하면서 대구 시내에서 생활하였고, 대학을 졸업하고 더욱 멀리 떨어진 곳에서 35년 긴 세월을 직장 생활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집 형제들끼리는 친하게 지냈는지도 후일담을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 이렇게 세월이 흘렀고, 요즘 와서 간간이 그때를 떠올릴 뿐이지요.
저도 이제 이렇게 부모의 심정이 되어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직도 제가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부모에게 지극정성 효도를 다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도 분명 부모에 대한 서운함이 있을 수도 있을 테고, 차마 말못할 경우도 있을 수 있기에 제 생각을 강요하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먹긴 합니다. 가족끼리 서로 이해하고 가깝다고 해도 사람은 "나"란 존재만 벗어나면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에 그냥 조심하려 합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갈 때 부모 마음으로 무사히 살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제 능력에 닿는 한 도와주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간섭보다 격려를, 응원을, 도움을 주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