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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12. 2024

천하절세 미인 도화부인 식규(息嬀)


회벽유죄(懷璧有罪)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가지면 자칫 재앙을 부르기 쉽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속담에도 '필부무죄 회벽기죄(匹夫無罪 懷璧其罪)라 하여 소인은 그 몸에 죄가 없더라도,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잘 생겨도 너무 예뻐도 탈인가 봅니다.




오늘은 중국 고대 춘추시대 절세 미인이었던 도화 부인 息婦人(식부인) 이야기입니다.



식규(息媯)는 춘추시대 소국 진(陳) 장공의 딸입니다. 그녀의 성은 원래 규(媯)씨였습니다. 식국(息國)으로 출가하여 식규라고 불렸습니다. 미모도 뛰어나고 복사꽃처럼 발그스럼하니 아름답다 하여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 불리기도 했지요. 중국 고대 춘추시대 4대 미녀로 제나라 문강, 월나라 서시, 정나라 하희, 식나라 식규를 거론할 정도이니 식규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식규의 그 미모로 여러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고 맙니다. 따지고 보면 식규의 미모 탓이라기보다 그 미모에 혹한 사내들의 탐욕 때문에 여러 나라들이 망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식규(息媯)의 언니가 채(蔡)의 군주 채애후(蔡哀候)에게 시집가고, 동생 식규는 식(息)나라 군주 식후(息侯)에게 시집갔다. 식규가 친정에 들렀다가 귀국할 때에 언니가 시집 간 채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채애후가 오랜 만에 자신의 나라에 들른 처제를 위해 융숭한 축하연을 마련했다. 그런데 채애후는 호색가였다. 처제 식부인이 절세미인인 것을 보고는 질척러리며 추잡하게 추근거렸다. 형부 채애후의 추근댐에 자존심이 상하고 극도로 화가 난 식규가 나라에 돌아와 남편 식후에게 채애후의 행패를 하소연했다. 하지만 식나라는 약소국이었다. 국력이 약하니 이런 꼴을 당해도 어떻게 보복할 방도가 없었다. 그냥 거기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식후는 남자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제 나름대로 꾀를 내었다. 당시 남방의 강대국이었던 초(楚)의 힘을 이용하여 채나라를 멸망시켜버리려 했다.    

  

식후가 초문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채나라를 정벌할 기회가 왔습니다. 우선 대왕께서 저희 식나라를 치는 척하고 군사를 일으키시옵소서. 그러면 저희가 채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터인즉, 채나라가 식나라를 구원한다는 핑계로 저의 나라에 들어오면 그때 채(蔡)로 진격하시면 손쉽게 채를 정복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군주 식후였다. 아무리 부인 식규가 형부에게 그런 곤욕을 당했다고 해서 나라의 운명을 강대국에 맡기다니. 명분도 실질도 없는 그야말로 너무나 초라한 복수 심리가 발동하여 이런 모자란 책동을 한 것이다.      

     

초나라 문왕 입장에선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으니, 그야말로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바라던 바였다. 본인이 먼저 나서서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진심으로 원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은 중국 고전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장에서 유래한 말이다. 잠깐 이 표현의 출전을 언급할까 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맹자는 여러 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왕이 올바른 정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강국 중 하나였던 제(齊)나라에서도 벼슬을 하였는데, 왕과 의견 마찰을 빚으면서 더 이상 자신이 바라던 바른 도(道)가 행해지지 않아 떠나려고 하였다. 최고의 현자(賢者)인 맹자가 떠나려고 하니 제나라 왕은 아쉬워하면서 나중에 또 만나 조언을 받을 수 있을지 물었다. 맹자는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라는 대답을 하고 떠났다. 불감청고소원은 먼저 나서서 행동에 옮길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말로,     

 

맹자가 벼슬을 내놓고 떠날 때 왕이 맹자를 찾아뵙고 말하였다. “지난날에 뵙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다가, 모실 수 있게 되자 조정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시니, 이후로 계속하여 선생님을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今又棄寡人而歸, 不識, 可以繼此而得見乎.


맹자가 대답하였다. ‘감히 청하지는 못할지언정 저도 진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對曰: “不敢請耳, 固所願也.”               


초문왕은 이전부터 채나라를 벼루고 있었다. 주변의 군소 나라들이 자신을 섬기는데 채나라만은 강대국 제나라의 인척이라는 배경을 믿고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BC 680년 초가 군대를 출동시키고, 식후가 거짓으로 채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채애후는 망설이지 않고 전군을 몰아 식나라를 도우려 출동했다. 초나라는 텅 빈 채나라를 공략했고, 급히 되돌아온 채나라 군대를 무찔러 채애후를 사로잡았다.      


초나라에 잡혀 억류되어 있던 채애후는 자신이 식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복을 꾀했다. 부인 식규가 채애후에게 망신을 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강대국 초나라의 힘을 빌려 복수하려 했던 식후도 참으로 식견이 좁은 자였지만 동서(同壻) 채애후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소국이지만 한 나라의 군주였던 자신이 초나라에 끌려와 포로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웠으랴. 더욱이 식후의 모략으로 강대국 초나라 군대가 자신의 나라를 침략했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면서 군주인 자신은 초나라 포로 신세라니.   

   

채애후가 초문왕에게 말했다. 아주 전형적인 선동 모략이었다. 단번에 혹하게 만드는 제안이었다.

   

“천하 제일 미녀가 바로 식후(息侯)의 처입니다. 대왕께서도 직접 보신다면 제 말이 충분히 이해되실 것입니다.”     


천하 강국 초나라 문왕 입장에선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없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나라든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강대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으니 무엇이 불가능하겠는가. 채애후의 제안을 듣고 식부인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순수(巡狩)를 핑계로 군사를 이끌고 식나라고 향했다.


순수(巡狩)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천신(天神)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순수한 기념으로 비(碑)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秦始皇)부터이었다. 원래는 황제가 각 제후국을 방문하는 것이 순수였다. 하지만 초문왕은 자신이 천하를 지배하는 왕(王)으로 여겼고, 여러 소국을 자신의 휘하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순수 핀계를 댈 만도 했다. 따지고 보면 초문왕의 순수 핀계도 강대국의 횡포에 불과한 일이지만.


 어쨌든 군사를 끌고 자신의 나라로 들어온 초문왕을 식후가 예의로 영접했다. 초문왕은 이번 방문의 최대 목적인 식규를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연회 중에 초문왕이 식후에게 지난 날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쳐서 보복을 대신해 준 일을 언급한다. 채애후가 식규를 추근댄 것에 분노하였지만 식나라가 워낙 소국이라 어쩔 수 없었을 때 초문왕이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 수도를 격파하고 채애후를 초나라로 포로로 끌고와서 식후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해소해 준 일 말이다.


그렇게 식후의 처 식규를 위하여 군사까지 일으켜 보복해 주었는데, 정작 식규가 나와서 술도 한 잔 올리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타국의 군주가 나라를 방문했을 때 이 나라의 군주 부인이 연회에 나와 술잔을 보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는 식후의 완곡한 거절에도 초문욍이 끈질기게 식규가 나와서 술잔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식규가 내실에서 나와 초문왕에게 인사하고 술 한 잔 올리고 다시 돌아갔다.   


초문왕은 복사꽃처럼 아름다운 식부인을 보고는 마음이 동한 나머지 부하를 시켜 그 자리에서 식후를 사로잡아 버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 식후가 포로로 잡히는 것을 목격한 식부인은 후원 우물에 몸을 던지려 하였다. 초군은 부인을 설득했다. 설득이라기보다 협박이었다고나 할까. 부인께서 죽으면, 남편 식후도 죽게 된다고. 식규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초문왕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초문왕은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규를 취한 후 그녀를 수레에 태우고 귀국하였다. 식후는 나라 잃고, 아름다운 부인도 빼앗긴 울분을 못 이겨 홧병에 금방 죽고 말았다. 강제로 초나라로 끌려 온 식규는 초문왕의 왕후가 되어 3년 동안 아들 웅간(熊囏)과 웅혼(熊渾 또는 웅군熊頵)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웃거나 말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초문왕이 연유를 물었다. 그녀는 울면서 흐느겼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두 남편을 섬겼습니다. 죽을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我一个女人, 伺候两个丈夫. 即使不能死掉, 又有什么话可说.     


그녀가 죽지 못한 것은 친정인 진(陳) 나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문왕은 자신이 채를 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오해했다. 초왕은 직접 군사를 일으켜 채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자신에게 도화부인 식규의 미모를 누설한 채애후에게 죄가 있다고 억지를 부려 채나라를 쳐 굴복시켰던 것이다. 예전에도 포로가 되어 초나라에 끌려왔지만 그땐 본국 채나라로 돌아갔던 채애후가 이번에는  초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고 초나라 땅에서 귀신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상서(商書)에서 ‘나쁜 일은 들판에 불이 번지는 것과 같다. 다가갈 수 없으니 어떻게 끌 수가 있겠는가?’ 이는 채애후를 두고 한 말이다.”     


            商書所謂, 惡之易也, 如火之. 不可鄕邇, 其猶可撲滅者. 其如蔡哀侯乎.               


그런데 춘추시대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당(唐)나라 때 식규가 한시 작품으로 소환됩니다.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 유명한 왕유(王維)의 식부인(息婦人)이란 한시에 식규의 심정을 절절하게 나타낸 내용이 나옵니다. 왕유는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과 함께 '왕맹위류(王孟韋柳)'로 불릴 만큼 당나라 시절 자연 시인의 대표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 한시 제목은 식부인(息婦人)입니다.         

  


지금 총애를 받는다고 옛정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지 마오.     

                       莫以今時寵 能忘舊日恩     


꽃을 보고도 눈물만 흘렸을 뿐, 초왕과는 말도 나누지 않았다오.     

                       看花滿眼淚 不共楚王言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문왕과 식후 부인 식규에 얽힌 내용을 당(唐)나라 사람 왕유(王維)가 읊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양귀비랑 사연이 깊은 당나라 현종은 독자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현종의 이복형 영왕(寧王)의 연회석에서 왕유(王維)라는 젊은 시인이 읊은 시입니다.    

  

영왕은 수십 명의 미녀를 곁에 두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옆집에 사는떡장수의 아내 미색에 반하여 여자를 탈취해 왔다. 남편에게 뇌물을 주고 데려왔다지만 강제로 뺏어온 것으로 봐야 하겠지요. 그렇게 영왕과 산 지 1년이 지났을 때 연회에서 영왕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지금도 남편을 그리워하느냐’고     


떡장수 남편과 강제로 헤어져 영왕의 처소로 끌려와서 살게 되었지만 그간 영왕의 총애를 듬뿍받았습니다. 하지만 영왕이 아무리 물어도 떡장수 부인은 전혀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영왕이 떡장수를 불러 들였고 남편을 본 여자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영왕의 식객들 대부분이 이 애절한 장면을 묵도하고 동정을 금할 수 없었지요. 당연히 연회장 분위기가 싸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순간 영왕이 연회에 참석한 식객들에게 시 한 수를 지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첫 번째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왕유였습니다. 떡장수 부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목격하고 왕유가 떠올린 인물이 바로 식규였습니다. 그리고 위 시처럼 왕유는 떡장수의 아내를 식부인에 빗대어 아무리 영왕 그대가 아무리 총애한들 남편을 향한 내 마음은 변할 리 없고, 당신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대신 전하게 됩니다. 영왕의 횡포를 빗대어 표현한  왕유의 용기도 인상적이고 비유 방식도 탁월했습니다. 왕유의 의도를 간파한 영왕이 떡장수 부인을 돌려 보냈습니다.      


여기서 내용이 많이 좀 지루하겠지만 왕유가 남긴 작품 중에 제 마음을 흔든 한시 하나 소개합니다. 왕유가 워낙 유명한 시인이라 작품이 많긴 하지만 말입니다. ‘배적에게 술을 따라주며’란 뜻의 한시 작주여배적(酌酒與裴迪)입니다. 시우(詩友)인 배적(裴迪)이 진사 시험에 낙제하여 실의에 빠졌을 때 왕유가 자기 집으로 배적을 불러 술을 한 잔 하자면서 위로해 준 것을 즉흥적으로 쓴 작품이며, 배적은 시 친구라곤 하지만 왕유보다 한참 어린 사람입니다.    


            

작주여배적(酌酒與裴迪)
 
 그대 술 한 잔 드시고 마음 편히 지내시게

                        酌酒與君君自寬       

뒤집히는 세상 인정 출렁이는 파도와도 같은 것

                       人情翻覆似波瀾.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귄 친구라도 칼을 빼기도 하고

                        白首相知猶按劍     

먼저 출세한 사람이 뒤따르는 사람 비웃기도 한다네.

                       朱門先達笑彈冠     

이름 없는 풀잎도 가랑비라도 내려야 젖게 마련이고

                        草色全經細雨濕   

꽃가지 막 나올 때 봄바람이 차갑나니

                        花枝欲動春風寒            

세상일 뜬구름 같아 물어서 무엇하리오

                        世事浮雲何足問                 

고상하게 살면서 맛있는 것 맘껏 먹으며 즐겨나 보세

                         不如高臥且加餐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진정 내 편이 되어 손을 뻗어 잡아 줄 때 얼마나 고마운지 경험한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고비는 겪게 마련입니다. 평생 과거 공부에 매달렸을 선비 학자 배적이 진사 시험에 낙방했을 때 그 실의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나이도 한참 위인 선배이자 시우였던 왕유가 이렇게 술 한 잔 건네며 위로해 준 글이라 더욱 제 가슴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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