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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단 Feb 23. 2017

산 설고 물 설다

손바느질로 그린 그림

겨우 내 비가 많이 오더니 집 뒷산이 초록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적당한 기온에 비까지 충분히 오니 거리마다 꽃들이 만발이다.  이곳의 겨울은 이런 풍경이 맞다.  여름에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아 모든 것들이 누렇게 바싹 말라 있지만, 겨울에는 비가 와 푸른 산에 샛노란 야생화가 피어나는 그런 풍경......


실리콘 밸리는, 말 그대로 골짜기......

좌, 우 양쪽의 산들에 울타리처럼 둘러싸인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이다.   한가운데 제일 낮은 곳은 샌프란시스코 베이의 끝자락과 닿아 바닷물이 흘러들고,  하얀 소금이 햇볕에 굳어가는 염전이 있다.    처음 고속도로를 달려 이곳에 들어섰을 때 한눈에 보인 것은 도시를 둘러싼 누런 산들이었다.  강수량이 많은 무더운 여름과 초록이 우거진 산천을 가진 나라에서 살다 온 나에게, 멀리서 바라 본 한여름의 누런 산은 생소한 황토색 민둥산으로 보였다가, 기괴한 누런 바위산으로 보였다가...... 했다.   그러다가 계절이 바뀌고 비가 내리는 겨울이 되어  초록색으로 탈바꿈한 그 산들을 보고 나서는 맨살을 드러낸 것이 아닌 나름 풀이 우거진 언덕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과는 너무 다른 풍광이긴 여전했다.   


그림과 공예를, 또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는 좀 냉정한 편인, 주위에 다정하거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라서, 어지간한 변화에는 그리 동요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늘 살던 대로 식구들을 건사하고 내 작업실에 앉아 비단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면서 살면 되겠지...... 하고, 중년의 나이에 나라를 바꿔서 살아보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사는 곳을 옮기면서 한국에서 살던 때 보다 사회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내 생활은 세상 돌아가는 속도와는 다르게 좀 더 느려졌다.  


확실히 한국에 살 때보다는 뭔지 모를 여유가 있고 느긋하다.   거의 매일 생기던 그 수 많았던 약속들과 경조사를 위한 외출 대신 혼자 동네를 산책하고 가족과 여행을 다니게 되었고, 내 가족과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뜨거운 여름 해에 하얗게 빛바래는 동네와 속 깊은 곳까지 들어찰 듯 길게 늘어지는 석양에 적응했고 온통 풀로 뒤덮인 누런 언덕들과 냉정하고 차가운 푸른 바다에 익숙해졌다.  보통 생소했던 풍광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생소했던 인상이 희미해지고 익숙해 지기 마련이라, 이제는 더 이상 생경하지도 이상스럽지도 않은데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의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그냥 거기 있었고 내가 액체처럼 스며들어 있었던 세상이 아닌 새로운 모양새와 낯선 색감.  그 새로운 배경 안에서 내가 마치 여행자처럼 돌아다닌다는 느낌이 늘 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살짝만 곁눈질을 해도, 늘 시야에 걸리는 둥근언덕들은 약간은 지루하고 가끔은 외로운 지금의 내 삶을 둘러 존재하고,  그 끄트머리에 결국 내가 태어난 나라와 맞닿아 있는 바다가 느릿하고 여유 있게 그 한중간을 흐른다.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나라에 와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들,  언어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는 것에 대한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산 설고 물 설다'라는 말은 그 상징적인 표현일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곳을 바꾸어 몇 년을 살아보니, 이제 나에게 '산 설고 물 설다'는 말은 그 말 그대로 '산'과 '물'이 낯설다는 말이 먼저 존재한다.   '여기는 이렇게 다른가보다' 라며 그냥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는, 타향살이에 뭉친 아픈 어깨너머로 여전히 눈에 늘 걸리는, 신경이 쓰이는, 나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낯선 풍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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