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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Jan 08. 2020

(배려) 밀짚모자

더불어 행복 실전 - 행복은 지금 이 순간


- 이승 뜰 때 되면 정말 가져가 볼까? 저승서도 대머리보다 모자 쓰는 게 훨씬 낫겠지? -  



           

며칠 전 아침.     


차를 몰 일이 있어 문을 여니 뒷좌석에 밀짚모자가 눈에 띈다. 친구가 준 거다.   

  

2주 전.     


친구들 여럿이 백운산 가는 날이었다. 꼭두새벽부터 폭우가 내렸다가 아침이 되니 거짓말처럼 그쳤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라도 다시 쏟아낼 각오를 다지듯이 잔뜩 찌푸렸다. 집결지인 따뚜 주차장에 친구들이 하나둘 모였고, 산에 가면 다시 퍼 부울까 걱정이 컸다.    

  

대영이가 밀짚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가워 달래서 써보았다. 딱 맞는다. 야외 매점 유리에 비추니 어울리기까지 한다. 녀석에게 농을 건다.     


"너두 나처럼 대두네. 대두는 모자가게 가도 맞는 거 찾기 어려워. 하하" 

"그래 나두 머리 커."      


녀석은 스스럼없이 받아넘긴다. 내가 모자를 벗어서 돌려주니까,  

   

"넌 비 맞으면 안 되잖아. 니가 써"

"난 두건을 둘러서 괜찮아."        

"두건 가지고 안 돼. 비가 많이 올 거 같아"


"너는?"

"난 머리숱이 많으니까 괜찮아."


"모자 더 있어?"

"없어. 오는 길에 하나 산 거야. 내일 다시 사면돼. 니가 써."


"자연산이라 비쌀 텐데. 니가 산 거니까 니가 써."

"다이소에서 이천 원 주고 산 싸구려야. 이거 봐. 부담 갖지 말고 써"

     

그러면서 녀석은 모자에 붙은 라벨을 보여준다. 손때 하나 없이 순백의 천에 검정색으로 2,000원, 베트남산이라고 또렷이 찍혀 있다. 녀석은 내 기분 상할까 봐 말은 안 했지만 대머리인 나를 걱정하는 거다. 그래서 몇 번이나 사양했는데도 기어코 내게 모자를 안긴 거다. 자기 맨머리는 생각도 않고.     


"알았어"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비 오면 돌려줄 생각으로 두건 위로 밀짚모자를 덮어쓴다.

마음속으로,      


'자슥, 비가 사람 머리 가려가며 떨어지나, 비 오는데 모자 안 쓰면 젖는 건 다 똑같지.' 

     

하늘이 우리 둘의 우정을 어여삐 여기셨는지 산행 내내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하산해서 모자를 돌려주려니까,    

  

"그냥 가져 가. 다음에 산에 갈 때 필요할 거야."

     

끝내 녀석은 받지 않았다. 그래서 모자를 차에 두게 된 거다.

    

10년 전 금융 위기.

   

미국 금융의 대두 월가에 리먼 브라더스란 이름의 묵은 암이 터진 그해에 대영이는 머리에서 암을 발견했다. 초기 암이지만 예후가 많이 좋지 않은. 미국은 돈 좀 돌라고 헬리콥터에서 마구 돈을 뿌리는 정도였지만 그래 봤자 먹고사는 문제였다. 하지만 녀석은 생사가 달려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틀에 머리를 옴쭉달싹 못 하게 고정하고는 방사선을 마구 쏘아댔다. 그래서 머리카락, 눈썹, 코털까지 머리에 털이란 털은 죄다 볼썽사납게 빠져버렸다. 다행히 미국은 근근이 회생했고, 천만 억만 다행히 녀석은 빨리 회복해 머리털이 다시 돋아나 원래대로 무성해졌다.    

  

암이 발견되기 한 해 전.   


대영이는 전국에서 수익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개인 병원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로서 실력과 사업 능력과 성실로 일군 것이다. 수십 만 인구 도시의 최상위 수준에 걸맞게 수입 승용차 중 최고급 벤츠 S600을 몰았다. 자수성가한 이가 대개 그렇듯 녀석은 부지런하고 매사에 긍정적, 적극적이었다. 성정이 착하기도 해서 사람을 잘 믿었다. 아뿔싸, 사기를 두 번 당했고 두 번째가 치명적이었다. 전재산이 날아갈 정도였지만 부채를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구름 위에서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녀석은 좌절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태백에서 새 출발했다. 칠 년여 세월. 지역을 대표하는 종합병원에서 직원들의 신뢰와 이사회의 신임을 동시에 받았다. 마침내 부원장으로 경영진의 자리에 올랐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던 녀석은 그 후로 남들은 못 보는 걸 본다.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까지도. 그래서 녀석은 잘 안다. 비가 조금 와도 머리 위로 떨어진 빗물이 거침없이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친구 대머리의 자잘한 고충까지도.    

  

파산의 바닥에서 재기에 성공한 녀석은 남들은 들어서 아는 걸 겪어서 안다. 실패와 신용은 성공의 밑거름이라는 것을. 어려울 때는 몇 천 원 짜장면 한 그릇 값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래서 녀석은 잘 안다. 난관에 처한 친구들의 어렵고 안타까운 사정을.  

   

다시 며칠 전 아침.     


그 모자를 다시 본 거다. 안전벨트 매고 시동 걸면서 대략 친구의 사연을 알고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나 죽거든 같이 묻어 달라고 농 삼아 말하려는데 가슴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말을 잇지 못할 거 같기도 하거니와 환갑도 안 된 나이에 주책이라고 아내에게 핀잔 들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속으로,     


'자슥은 괜히 이런 싸구려를 줘서는.....‘  

   

이승 뜰 때 되면 정말 가져가 볼까? 저승서도 대머리보다 모자 쓰는 게 훨씬 낫겠지? 염라대왕 앞에서 예의 바르게 벗고 보여 드리며 녀석 이야기하면 녀석만이라도 천국 보내 주시겠지? 무엇보다 친구가 곁에 있으니 저승길이 두렵지 않고 든든하겠지?  

  

이래서 녀석이 정을 듬뿍 담아준 싸구려 밀짚모자는 내게는 몇 십만 원짜리 명품 모자보다 값지다.  


    

 

2017.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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