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콜 Aug 20. 2024

유럽퀴어가 바라본 모든패밀리 리뷰

결혼을 넘어 육아를 꿈꾸는 진격의 퀴어들

# 0. 이게 한국이라고?


결혼을 꿈꾸는 세 퀴어 커플을 다룬 리얼리티 프로그램, 메리퀴어를 리뷰한 지 딱 1년 만이다. 이제는 결혼이라는 의제를 넘어서서 육아에까지 퀴어가 도전하는 시대가 왔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메리퀴어 때와 마찬가지로 토종 OTT 웨이브가 주도하는 흐름이기에 더 반갑기도 하면서, 아직은 이 변화가 잘 믿기지 않는다.



# 1. 결혼, 그 이후의 현실


메리퀴어 때는 감정에 호소해서 퀴어들의 결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면 모든패밀리는 현실에 호소하는,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실제 결혼한 퀴어부부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사실 그럴 필요가 있는 게 이웃 나라들에 비해 대한민국은 늦어도 너무 늦다. 꼭 퀴어뿐만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분야 전체에서 말이다. 가족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해지고 있지만, 차별금지법이라던지, 건강보험, 생활동반자법 등등 제도적인 부분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은 퀴어 커플의 동거는, 육아는, 심지어는 상속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제약이 있는지를 고발하듯이 이야기한다. 다소 편향되었을 수는 있으나,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 인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커플들의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미비를 은연중에 도마 위로 올린다.


모든패밀리의 주인공, 모모커플(이하 김규진 및 김세연)과 그들의 딸 라니를 보고 있으면 이러한 논의가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 커플, 외국인 부부, 한부모 가정, 퀴어커플 등등 더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아이를 가지며,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가는데, 현실은 여전히 그들을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라니를 위해서, 그들 말마따나 라니가 조금 더 대충 살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더 많은 정치적, 사회적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다.



# 2. 갈 길은 멀다


유럽에는 몇 달이 걸리는 나라들도 허다한데, 한국은 허무할 정도로 단 몇 분도 안 걸리는 게 혼인신고라고 한다. 그런 대한민국에서도 혼인신고 신청 서류를 수리조차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한국의 퀴어들. 그뿐만 아니라 응급 상황 혹은 사망 시 가족 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제대로 된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패밀리에서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관련 법과 제도를 공부하고, 아내와 딸을 위해 유언장을 남기는 김규진 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이렇게 소수자에게 가혹하다. 숫자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쉽게 찍어 누를 수 있는 작은 숫자일수록 쉽게 무시되고 희생을 강요받는다.


유럽에 산지 어느덧 3년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당연해졌다. 결혼한 퀴어부부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까지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환경 속에서 나 또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커밍아웃을 하고 그로 인해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며 생활한다. 한국에 비하면 정말로 대충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금 한국의 상황을 맞닥뜨리니까 내가 잠시 꿈을 꾸고 있었나 싶고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당연한 것들이 내 고국에서는 애써도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잔인하다. 고작 몇 년 안에, 한국이 라니가 자라기에 진짜 안전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 3. DEAR 라니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엄마아빠 이모삼촌들이 모두 나서서 모든패밀리를 기획하고 촬영하고 참여하고 홍보하는 것일 테다. 이 프로그램은 어쩌면 라니에게 바치는 3시간짜리 비디오테이프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이렇게 사랑받고 태어났다는. 라니가 자라면서 다치지 않도록, 네가 세상에 이렇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 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사실 이전부터 트위터나 유튜브로 김규진 씨의 결혼부터 임신과정을 쭉 지켜봐 왔는데 출산을 앞둔 김규진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딸에 대한 걱정과 염려 대신, 그녀가 차별받고 자라지 않도록, 그런 환경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시라고.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우리는 하나같이 같은 꿈을 꾸게 된다. '라니가 행복하게 자라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꿈은 우리 모두 앞에 놓인 과제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면서 매일 조금이라도 전진해야 하는 그런 과제. 너무나 빠르게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서둘러서 변화하고, 또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한편, 최근 한국 상회에서 의미 있는 결과도 눈에 띈다. 대법원에서 동성 동반자의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성공 또한 사실 갑작스러운 뉴스가 아니다. 돈도 안 돼도 꾸준히 방송과 유튜브를 만들어 소식을 전하는 피디나 크리에이터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제도에 맞서 도전하고 판례를 남기는 사람들.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꾸준한 노력들 덕분에 사회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한 줄의 작은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되니까.



# D.C. al fine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리가 어렸을 때 흔히 부르던 노래-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으로 시작되는 그 곰 세 마리를 엄마곰 엄마곰 애기곰으로 바꿔 부르던 장면이다. 이 흔한 노래 가사 한 소절처럼, 사회의 얼마나 많은 부분에 관습이라는 게 이미 굳어져 있는지, 가사 하나 바꿔 부르는 그 간단한 변주에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수반되는지가 실감되었다.


그런데, 김규진 씨가 예전에 쓴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끔 도무지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중략) 하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례들을 믿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축제도 벌여보고, 친구들을 불러 결혼식도 열어보고, 마일리지 가족합산도 신청하고, 회사에 돈이랑 휴가도 달라고 해보고.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사회는 변한다. 앞으로도 조금 더 나를 믿고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야겠다."


절대 안 변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세상은 진짜 변하더라. 내가 태어났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지금은 현실이 되어 있지 않은가. 가령 레즈비언 커플의 현실 육아가 방송에 나오는 현재의 상황처럼 말이다. 더 많은 용기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할 뿐이다. 유럽도 처음부터 이렇게 퀴어들이 살기 편한 환경이었을 리 없는 것처럼, 한국도 지금 이 시기는 한낱 과거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대한민국을 믿는다.


그러니까 과거의 낡은 유물로 남아있을지, 시대의 출발점에서 세상을 바라볼지, 다양성이란 그것에 기인한 이야기다. 미래는 생각보다 머지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럽퀴어가 바라본 메리퀴어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