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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마 Nov 20. 2022

민선이에게4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민선아, 나는 오늘 간신히 시간을 내어 대대적인 집 청소를 했어. 너와 함께 살 땐 잘 몰랐는데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니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내는 것도 애정으로 해내게 되더라.


싹 정리된 내 방 사진을 찍는데 sns에서 본 옛날 사진 한 장이 떠올랐어. 80년대 어느 가정집의 방 사진이었는데 지금의 내 방과 전혀 다른 구조와 소품들이 눈에 띄었어. 이제는 인테리어 제품으로 수명을 다한 것만 같은 자개 옷장과 자개 문갑이 있고 문갑 위엔 도자기 몇 개가 놓여 있어. 또 빨간 다이얼 TV와 오디오, 한 중년 남성의 사진 액자도 있었어. 사진 하단엔 펼쳐진 비단 이불과 좌식 탁자, 그 위의 차도구가 보였어. 어렸을 때 자주 찾아갔던 할머니의 방이 떠올랐는데, 그게 지금의 내 취향에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어. 아닌 게 아니라, 이 사진을 보고 한동안 중고 거래 플랫폼에 자개 문갑을 검색해 보곤 그 위에 턴테이블을 올려놓는 상상을 했거든. 문갑을 옮길 힘도 이동 수단도 없지만,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얼마간 즐거워지는 꿈이었지. 나는 이런 사진 한 장에서 강한 향수를 느끼곤 해. 방바닥에 앉아 전화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상상만으로도 과거의 누군가를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아. 사실 이런 감정이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열풍의 주된 정조가 아닐까 싶어. 내가 살지 않은 시대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 말이야.




80년대를 살아간 누군가의 방 사진을 보기 전에도 나는 옛날 사진 찾아보는 걸 꽤 즐기는 편이었어. 지금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패션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90년대 명동 거리, 짧은 커트머리의 여학생들, 오래된 지하철 내부의 사진 등 그 속의 사람들과 공간을 그리워하곤 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인데도 충분히 그런 감정이 들었어. 서울 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을 반복해서 본 ‘롱 베케이션’이라는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했어. 도시의 밝고 쿨한 모습이 그 드라마에는 있었고, 옛날 사람들의 촌스럽지만 낭만적인 면면도 거기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주 필연적으로 서울 생활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사는 도시는 그런 것이 아니었거든. 서울의 밤은 쿨하긴 커녕 찌든 때처럼 짜증나는 인파로 가득했고 낭만을 따지기에 사랑할 사람이 너무 없어 환멸이 났어.


흔히 과거와 현재는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이라고 표현하잖아. 내가 느끼기에는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시간이, 아니 몇 겹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절대 뚫을 수 없는 얇은 막을 더듬거리며 그 너머에 있는 옛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거기에 닿을 길은 없어 보여. 만약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낸 적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면 어떡하지?


그런데, 과거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에야 내가 과거를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시간은 과연 아름다움을 담보로 하고 있을지, 롱 베케이션에서처럼 90년대의 도시는 쿨하고 낭만적이기만 할지 여러 상상을 해보게 됐어.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집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과거에 쓰여졌지만 현대의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는 걸 미리 알고 쓰여진 양 적나라한 이야기들로 가득해. 내가 레트로한 무엇에 피상적으로만 가졌던 감정들을 기각시키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소설집의 시작은 <저문날의 삽화>라는 시리즈 6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노년 여성이 초점 인물인 소설들이야. 각각 다른 별개의 소설이지만 이 여성들은 마치 80~90년대에 지어진 한 아파트 단지에 살아가는, 그러나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노인들 같아.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이고 노년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하니 어떤 고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아. 교과서에서 본 박완서 작가님의 느낌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소설 속 노년 여성들의 캐릭터성이나 이야기의 흐름은 우리가 기대하던 것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존재해.


“세상에, 육남매라니, 모아놓은 재산도 없다는데, 맡아줄 만한 친척도 없다는데.” 이러면서 알토란 같은 제 식구와 중년의 건강을 껴안은 마음에는 일말의 동정과 진이 날 듯이 농밀하고 잔혹한 쾌감이 없었다고는 말 못 했다. 외할머니가 그 많은 외손들의 치다꺼리를 맡게 되었다는 뒷소식에 적이 마음이 놓이면서도 그 노인의 욕된 장수가 징그러워 몸서리를 치는 걸 잊지 않았다.
-<저문날의삽화1>


사람들은 할머니 댁을 떠올릴 때 어떤 고정적인 이미지를 그리잖아. 할머니 자체에 대해서도 다정하고 인자한 모습을 기대하고. 민선이 너도 알다시피 나의 할머니는 상당히 무뚝뚝한 여성이었어. 명절에 우리가 찾아뵈어도 반가운 기색이 없고 얼굴엔 늘 표정이 없는 데다가 살가운 애정 표현 한번 없으셨지. 뒤에서 남 얘기하는 건 얼마나 좋아하셨나 몰라. 그래서 참 곤란했어.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야. 박완서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 그러니까 80~90년대의 옛 사람들은 우리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본 따뜻한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아.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니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지 싶겠지만, 나는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이 진실에 가깝다고 믿어. 그건, 할머니라는 존재가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 육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난 부부와 그 아이들을 돌보게 된 노인을 두고 자기의 처지를 다행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나 ‘부패한 권력의 지배논리를 그대로 여자에게 적용’하는 사람들은 요즘에도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이지. 동화 속 할머니의 모습을 내 할머니의 얼굴 위에 겹쳐 놓고 살던 나는 열여덟의 겨울, 영안실에서 할머니 고유의 얼굴을 보게 됐어. 그리고 다시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신파를 찍지 않게 됐어.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 갈 거 있으면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고 안 할 거구요.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표제작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시위를 하다 무력진압에 숨진 아들을 둔 엄마가 화자인 소설이야. 손윗동서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줄곧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가던 소설은 말미에선 거의 오열로 끝나는 듯해. 민선아, 이 소설이 쓰여진 1993년도에 나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몸이었고 90년대를 아동기로 마쳤기에 그 시절을 살아낸 네 앞에서 시대를 함부로 논할 순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알아. 90년대는 누군가에게 ‘독한 세상’이었고 너에게는 시집살이가 놓여진 전근대적 세상이었다는 걸.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우후죽순 제작될 때, 처음엔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했던 내게 자본을 들여 시간여행을 하게 해주는 콘텐츠는 그럴듯하게 느껴졌거든. 그 콘텐츠들은 말하지 않아. 그 시절에 얼마나 전근대적인 가치가 만연해 있었는지, 그걸 가리기 위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내달렸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나는 서울이 고향이 아니라서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어. 이를테면 이런 거지. 나는 강남 교대역과 성모병원을 지날 때면 괜히 한 번 더 돌아보게 돼. 서울숲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 성수대교를 지나는데, 거길 달릴 때면 잘못된 걸 밟고 지나가는 것 같아.


나는 나의 시대를 완전히 부정할 순 없겠지만 긍정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들곤 하는데, 그건 우리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를 지나왔으면서도 어떤 죽음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 죽음들을 기억하는 한 2010년대와 2020년대가 마냥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 같아.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다만 우리가 한 시절을 아름답게 포장하며 서로를 위로하기보다 시대를 정확히 기억했으면 좋겠어. 가족애나 추억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들로 얇은 막 너머를 더듬거리기보다 구체적인 언어들로 순간을 간직했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거겠지?



너와 나의 90년대를 해부하며, 서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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