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개념 안에서 종이가 지니는 위상
*이 글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필자의 답을 써내려 간 것이다.
‘문화’라는 단어를 단 하나의 의미로는 정의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이나 신념 체계를 갖고 있고, 그에 따라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다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사회 구성원이 습득, 공유, 전달하는 행동 양식'
문화의 수많은 정의 중에는 위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이 정의의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미디어다. 왜냐하면 인류가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때(인류가 발전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소통'이고, 소통을 위해서는 미디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란, 어떤 일이나 작용을 양쪽의 중간에서 맺어주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역사를 기록하거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본질은 단지 정보 전달에만 있지 않다. 재미있게도, 인간의 창조성과 관계성을 자극하는 데에도 미디어의 본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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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미디어의 이러한 본질을 다 갖추고 있다. 예부터 형태만 조금씩 달라져왔을 뿐, 거의 모든 소통이 종이로 이루어져 왔다. 과학과 인문학이 발전하면서 종이를 대체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종이는 살아남았다. 아니, 생존을 넘어 이전보다 더 필수적인 미디어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종이는 훌륭한 정보 전달 매체이며, 인간의 창조성과 관계성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등장한 이래 모든 정보를 종이가 아닌 컴퓨터 화면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수만 장의 종이에 적힌 정보가 손바닥 안에 가볍게 들어왔다. 그리하여 막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관리하기도 힘들었던 종이를 통한 정보 전달은 더 이상 필요가 아닌 사치가 됐다. 더 이상 쓸모없어 보이는 수백 장의 책은 무겁고 두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사람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전자책 비중이 높은 미국에서도 전자책의 점유율은 전체 책 시장의 20%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출판 업계 관계자들은 전자책이 종이책의 ‘보완재’ 혹은 ‘동역자’ 정도의 관계로 본다고 한다.
활용성과 효율성을 다 갖춘 디지털 매체가 네모난 흰 종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쯤 고민해보고 이어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종이는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팽팽한 느낌이 들고 탄성을 가진 이 얇은 판은 우리 손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는 손으로 직접 종이를 만지고 넘기며 그 위에 무언가 얹는 행위를 좋아한다.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디지털 매체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여겨 책장에 보관하거나, 항상 책상 위나 침대 옆에서 볼 수 있는 이 '사물'에 우리는 애정을 줄 수 있다.
한번씩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사서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긴 후, 자국이 남지 않도록 천천히 표지를 넘긴다. 최대한 깨끗한 손으로 하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손 끝으로 느껴지는 그 감촉을 음미한다. 책장에 넣을 때는 이물질이 묻거나 상처가 나지 않도록 온 신경을 기울여 부드럽게 밀어 넣는다. 이는 우리가 현물로 재탄생한 정보에 정(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귀하고 소중한 정보라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상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욕구에 호응한다. 그래서 문화나 문명의 곁에는 그 욕구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물질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한다. 인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에 이끌려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종이를 보면 창작 욕구가 샘솟는다. 반드시 어떤 영감이나 필요가 없더라도 하얀 종이 앞에서 까만 펜을 쥐고 있을 때, 우리는 쓰고 싶고, 그리고 싶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치 본능에 이끌리듯 손이 스스로 움직여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부재가 존재를 요구하기에, 때로는 존재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상태가 갖는 부재 혹은 존재라는 힘은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는 그 비어 있는 상태를 어떻게 해서든 채우려는 욕구가 생긴다. 이 욕구에 날개를 달아주는 물질이 바로 종이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는 틈이나 여백과 같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잉태한다. 종이는 정보 전달의 본래 형상임과 동시에, 인류의 발상을 촉발시켜온 지(知)의 촉매이다.
최근에 방문한 ‘두성 종이 - 인 더 페이퍼 갤러리’에서 필자는 그 욕구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른 가지가 넘는 종류의 종이는 각기 상이하게 다른 촉감을 갖는다. 그리고 종이에 따라 샘솟는 창작 욕구 또한 조금씩 결을 달리한다. ‘일레이션데클엣지’라는 종이는 마치 나무껍질을 만지는 느낌이 든다. ‘레더라이크’는 텍스처가 큼지막한 동물 가죽의 느낌이 들고, '엔티랏샤’는 약간 거친 표면을 갖고 있어 손에 무언가 묻는 느낌이 들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처럼 현물 종이가 주는 촉감을 통한 정서, 감정, 분위기, 어조 등이 달라진다.
종이는 새로운 미의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 하는 창작 욕구는 사실 완벽을 추구한다.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아닌 하얀 종이 위에 까만 펜으로 무언가를 쓰는 행위는 거대한 불가역성을 갖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쓰거나 그릴 때 인간은 실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실수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종이 위에 한 번 잘못 그려진 선은 완벽히 지울 수 없으며 종이도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때, 인간은 종이를 낭비했다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발전한다. 이러한 서툰 과정을 극복한 후, 한 번에 정확히 표현되는 대담함이 예술 내에서 감동의 근원이 되어 왔다. 밀 것인가, 두드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퇴고의 미의식이 바로 여기, 종이에서 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퇴고의 뜻을 退(물러날 퇴) + 告(고할 고)를 써서 '쓰기를 물러나다' 등의 뜻으로 잘 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퇴고의 정확한 뜻은 推(밀 퇴) + 敲(두드릴 고)로, '밀거나, 두드리거나'를 뜻한다.
이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가도'가 시를 지으면서 있었던 일화에서 탄생한 말이다. 가도는 원하는 시상을 두고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승려가 달 아래서 문을 두드린다)이 좋을지 아니면 '승퇴월하문'(僧推月下門, 승려가 달 아래서 문을 밀친다)이 좋을지를 두고 고민에 잠겼는데,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에 사람들이 동의를 표하고 공감을 느낀 것이다.
끊임없는 수정이 가능한 디지털 매체에서는 비교적 깊은 고민 없이 써 내려가게 된다. 아니, 오히려 생각나는 것을 마구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찾는다. 결과물에 있어서는 두 매체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퇴고’라는 값진 경험을 통해 한 글자 한 글자 공을 들여 쓴 작가의 내공과, 마구잡이로 쓴 후 손쉽게 ‘수정’하는 작가의 내공은 분명 큰 차이가 날 것이다.
이처럼 종이는 인류에게 소통의 도구가 되고 창조성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어 왔다. 미디어의 기능을 종이는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소통과 창조를 관할하는 미디어 ‘종이’는 이렇게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에 당당하게 ‘문화’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한국정경신문, [전자책 10년] 종이책은 여전히 넘어간다. 전자책과 종이책 '공존시대', 2017.
하라 켄야,『백(白)』, 안그라픽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