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삭제된 이름

무너진 자리 위에서

by 김선철

바람은 어제의 시간을 잘라냈다.

김서준은 그 틈에 서 있었다.


밤새 내린 먼지가 유리창에 매달려 있었고,

거리의 나뭇가지는 속살을 드러낸 채 흔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아침,

그는 벽처럼 굳은 얼굴로 지하철에 올랐다.


종이컵 속 커피는 아직 따뜻했지만,

온기는 손끝을 비껴갔다.

마치,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사람처럼.


창밖은 흐렸고,

스마트폰 화면엔 붉은 제목들이 빛났다.

고금리. 구조조정. 신용등급 강등.

그는 흘려보듯 넘겼다.


“다 남 얘기잖아. 나는 상관없어.”


지하철의 진동이 멈추자,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 익숙한 길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오늘은 무언가가 다를 거라는 예감이,

이미 그의 걸음 속에 있었다.


회사 출입게이트 앞에 섰다.


“띡” 익숙한 소리가 났지만,

문 너머의 공기는 낯설었다.


사무실은 어제와 다름없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어느 누구의 시선도 그를 향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오직 자신만 투명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시선은 그를 스쳐 지나갔고,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건설현장 공정관리 배테랑인

그의 책상 위에는

어제 회의하던 공정표와

각종 신기술 공법 카탈로그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 낯선 갈색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군가 말없이 두고 간 것 같았다.


봉투는 차가웠고,

얼굴에 닿은 바람 같았다.


그는 봉투를 들었다.

망설임은 짧았고, 결국 열었다.


서류의 첫 줄.

'희망퇴직 대상자 통보'

'김서준 부장'이라는 활자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그는 사무실 컴퓨터를 켰다.


화면 위에,

그날의 날짜가 또렷했다.

제목은 굵었고, 말은 얇았다.


[긴급공지]

희망퇴직 대상자 통보.

대상자: 김서준 부장 외 3인.


잉크처럼 번져 보이는

검은 글자들.

사무실의 소음이

멈춘 듯 고요했다.


옆자리의 후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누구도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인사팀장은

서류를 내밀었다.


“회사의 방침입니다.”


말은 짧았고,

시선은 멀었다.


서류는 차가웠고,

공간은 고요했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코스트였을 뿐이라는 것을.


점심시간,

회사 앞 편의점에서

그는 끊었던 담배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문대리가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지만,

잠깐이었다.

문대리는 시선을 피했고,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혼자 서 있었다.

연기만 남았다.


그날 저녁,

퇴근길 지하철 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멈칫했다.


피곤하고,

부쩍 늘은 흰머리에 더 늙어 보였다.

눈가에는 굳은 주름이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생일을 챙기지 못했던 가족들,

회식 대신 미뤘던 약속들.


이십 년 동안,

가족보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두고 살았던 날들.


그리고 돌아온 건,

봉투 하나와 메일 한 줄이었다.


‘그동안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니,

불이 꺼져 있었다.


현관엔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이 집에서 ‘주인’이라는 이름이

지워진 사람처럼.


주방엔 저녁이 차려져 있었고,

식탁 위,

국이 식고 있었다.


김서준은 그 차가움의 끝을 본다.


그리고 그 옆,

또 다른 봉투.

아침에 본 그것과 닮아 있었고,

말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협의이혼 신청서’


아내의 필체는 변함없이 단정했다.

그리고 그 아래,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딸이 상처받지 않게

조용히 정리하고 싶어.

서류가 정리될 때까지,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어.

미안해.

우리, 더 상처 주지 말자.'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봉투는 손에 있었고,

손은 식탁 위에 붙박였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귀에선 벽시계 초침 소리만

크게 울렸다.


딸아이의 방은 적막했다.


인형 하나,

스케치북 하나,

그대로였지만,

며칠 전까지의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 손으로 붙여둔

‘아빠 방 출입금지’ 포스트잇이

아직 문에 붙어 있었다.


방 안은 멀쩡했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따뜻한 숨결, 작은 발소리,

“아빠” 하고 부르던 목소리.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이 집엔 이제,

정말 혼자라는 것을.


회사도, 가족도…

모두가 자신을 떠났다.


그는 주저앉았다.

뜨거웠던 식탁은 이제

냉장고처럼 차가웠다.


그는 중얼거렸다.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보다 먼저 밀려든 건

슬픔이 아니라,

절망도 아닌,

그저 ‘무기력’이었다.


모든 게 끝난 자리에 찾아온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삭제된 건

이름만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마치 부서진 몸을 이끌듯,

참담한 마음을

무작정 집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한참 후 발길이 멈춘 곳은

고용지원센터였다.


“상담을 해 볼까...”


문 앞에서 멈췄다.

유리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손이 문을 밀기 직전,

‘김서준’이라는 이름이

서류 뒷장으로 넘겨지는 기분이 스쳤다.


결국 그는 근처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창밖으로 사람들은 바쁘게 흘러갔다.

자신만 이 세계에서 멈춘 것 같았다.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에게,

문득 떠오른 영상 하나.


‘작은 빌라를 경매로 낙찰받아

월세를 만든 사람.’


그땐 허황돼 보였지만,

지금은 달리 보였다.


그는 낮게 말했다.


“집은 오래됐고,

벽지는 바랬는데...

그 안에… 아직 내 이름이 붙어 있을까.”


어쩌면…

이 낡은 아파트에서

나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삶은 떠났고,

집은 남았다.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이

남아 있다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회사를 잃었다.

이름도 지워졌다.

하지만 그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다음화 예고]


그는 노트북을 열었다.

낡고 오래된 34평 강북 아파트.


무너진 자리 위에서,

다시 쌓을 첫 벽돌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