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부채의 집, 배움의 시작

입지의 가치를 이해하고, 리스크를 껴안는 순간

by 김선철

책을 펼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알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처음의 절박함이

그를 도서관으로 데려다 놓았다.


서울의 봄은 아직 멀었다.

낡은 창 틈으로,

바람이 빛처럼 흘러들었다.


김서준은 도서관 3층 구석,

부동산 코너에 웅크리고 있었다.


허기와 피로가 뒤섞인 몸뚱이가

낡은 의자에 뻣뻣하게 눌렸다.


문득, 캘린더에 떠 있는

알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연이 생일-선물 준비]


그는 화면을 닫았다.

지금은,

공부가 필요했다.


그의 앞엔

『처음부터 배우는 부동산 경매투자』,

『나는 빌라로 은퇴한다』 같은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책들은 모두 성공의 언어를 적고 있었지만,

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문장들은 허공을 맴돌다 이내 가라앉았다.


이혼은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이 집, 당신이 가져. 빚도.”


부유한 처가의 아내는 말없이 담담했다.

실직한 그에게 34평짜리 아파트를 넘겼다.


홍제동 삼익아파트, 전용 84.93㎡.

시세는 8억 안팎.


그러나 그 집엔

이미 2억 원의 대출이 얹혀 있었고,

그 짐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남은 건 집 한 채.

그러나 그것은 살아갈 공간이 아니라,

매달 대출이자를 삼켜야 하는 돌덩이였다.


카드값은 연체 직전,

건강보험은 압류 예고.


냉장고는 비어 있었고,

그의 마음은 더 깊은 곳으로 꺼져갔다.


그는 생각했다.


‘이 집을 담보로 돈을 끌어와야 한다.

어떻게든.’


은행 창구 직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시세 8억 기준 LTV는 60%까지

적용 가능합니다.

기존 대출 2억을 리파이낸싱 조건으로

최대 4억 8천까지 가능성 있습니다."


"단, 소득 증빙이 부족하니

대출금액이 일부 감액될 수 있습니다.”


은행은 숫자만을 보았다.


소득 없는 자에게 담보란,

신뢰의 반쪽이었다.


대출서류 몇 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흐린 저녁 공기 속에 파묻혔다.


책상 앞에 앉아 메모를 뒤적이다가,

문득 한 줄을 적었다.


‘돈을 벌려면 돈을 알아야 한다.’

허공에 흩어지는 문장이었다.


머리는 무겁고,

눈은 흐렸다.


근저당, 전입 일자, 유찰...

읽히지 않는 단어들.

이해하지 못한 채 필기만 늘어갔다.


결국 그는 책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었다.

고단하고 텅 빈 잠이었다.


깊은 꿈.

낯선 서재.


벽엔 낡은 유럽지도,


책상엔 『The Principles of Economics,

Alfred Marshall, 1890』.


그 앞엔

중절모를 벗은 중년의 신사가 앉아 있었다.


둥근 안경 너머로

짙은 눈썹이 걸렸고,

정갈한 콧수염 아래

목소리는 느리게 흘렀다.


“나는 알프레드 마샬이라고 하네.

자네가 부동산을 이해하려 한다면,

가장 먼저 입지와 위치의 본질부터 알아야 하네.”


그는 도시지도를 펼쳤다.

서울인가, 런던인가.

지도 위 붉은 점들이 떠올랐다.


“부동산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가장 순수하게 따르는 자산이지.


하지만 수요란 숫자가 아니야.

시간과 관계, 축적된 기억이 만드는 흐름이지.”


“입지란 부지와 위치로 나뉘네.

부지는 땅의 형상이고,

위치는 그 땅이 시간과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의 문제야.


위치는 단순한 좌표가 아니지.

그곳이 품은 역사,

연결성, 흐름과 축적이

곧 가치가 되는 거야.”


“차별화된 입지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힘이 깃든 자리야.


자네가 가진 부동산의 위치가

진짜 가치를 만들고 있는지,

그걸 먼저 살펴야 해.”


그의 말이 끝나자,

서재의 풍경은 서서히 흐려졌다.


빛이 꺼졌고,

다시 도서관 풍경이었다.


서재의 먼지와 도서관의 형광등 불빛이

어느 틈엔가 뒤섞여 있었다.


『처음부터 배우는 부동산 경매투자』가 펼쳐진 책상 옆,

누군가가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캐주얼 셔츠,

단단한 턱선,

햇볕에 그을린 얼굴.


손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들려 있었다.


‘나는 로버트 기요사키다.’

그는 경매책을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많은 이들은 경매로 싸게 산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위험은 늘 숫자에 숨어 있어.

흐름이 없으면,

그것도 결국 멈춘 돈일뿐이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책 한 구절을 읊조렸다.


‘부자는 자산을 사고,

가난한 자는 부채를 산다.

중산층은 자산이라 믿고 부채를 산다.’

“이 말, 언젠가 곱씹게 될 걸세.”


“집을 가진 것이 자산이 아니야.

돈을 벌어주는 구조가 아니라면,

그건 그냥 짐일 뿐이지.


경매도 마찬가지야.

낙찰가보다 중요한 건,

흐름이 생기느냐는 거야.


현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가 열리느냐,

그게 전부야.”


기요사키는 살며시 어깨를 두드리고 일어섰다.


책상 위엔 메모 하나가 남아 있었다.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싸게 사는 게 기회가 된다.”


김서준은 눈을 떴다.

집 안 작은 책상 위.


새벽의 공기가 뺨을 스쳤다.


마샬과 기요사키의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철학 같았던 말들이,

묘하게 현실로 다가왔다.


그 말들이,

어쩐지 곧 나를 시험할 것만 같았다.


노트북 화면엔

부동산등기 열람 사이트가 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주소를 입력했다.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356,

홍제동 삼익아파트, 전용 84.93㎡


등기부가 펼쳐졌다.


갑구엔 소유권이 세 번 바뀌었고,

마지막 줄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이혼으로 얻은 이름 한 줄,

감정 없는 활자였다.


을구엔 근저당 2억 4,000만 원.

채권최고액, 설정일,

그 아래, 변함없는 숫자들.


모든 줄이 과거였고,

그 안에 지금이 있었다.


그는 문서 앞에서 멈춰 있던 삶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다음화 예고]


“첫 경매 입찰. 오피스텔 하나에 인생을 걸다.”


낙찰가는 숫자였지만, 그의 마음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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