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도 안 됐는데 업무협약이 왜 내 재산을 먼저 묶는가?
1720년 영국에서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는 정부 부채를 인수하고 남미 무역 독점권을 약속하며 투자자들을 모집했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것은 법령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주가가 불과 몇 달 만에 120파운드에서 1,050파운드 수준까지 치솟았고, "협약만 체결하면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말이 런던 거리를 돌아다녔다.
버블이 붕괴된 뒤 영국 의회는 그해 버블방지법(Bubble Act 1720)을 서둘러 제정했다. 그러나 수많은 투자자는 이미 피해를 입은 뒤였고, 제정된 법도 수십 년 후 이해관계자들의 압력으로 폐기됐다. 제도는 사건보다 언제나 늦게 도착하고, 때로는 그 속도를 끝내 따라잡지 못한다.
2026년 3월, 서울 노량진 재개발 일대 중개사무소에 낯선 명함이 돌기 시작했다. 특정 신탁회사 소속 '부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협약만 체결해 주시면 저희 신탁사가 직접 참여하여 모든 것을 처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정비구역으로 지정조차 되지 않은 구역에서, 그 약속은 법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왔다.
30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는 놀랍도록 닮아있다. 규제가 허락하기 전에 협약은 왜 먼저 도착하는가.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2016년 3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개정으로 처음 허용됐다. 이전까지 재개발·재건축의 사업시행자는 원칙적으로 주민 조합이었다. 조합임원 비리, 시공사와의 공사비 갈등, 수십 년에 걸친 주민 분쟁. 자본력과 전문성을 갖춘 신탁회사가 직접 사업시행자로 나서면 이 구조적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기대가 도입의 근거였다.
그러나 제도가 열리자 신탁사들의 시장 경쟁이 먼저 작동했다. 구역지정 이전부터 인력을 투입해 업무협약을 선점하는 방식이 확산됐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어느 신탁사를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과 민원이 이어졌다. 집집마다 다른 신탁사가 접근하고, 비공식 약속이 공식 절차보다 먼저 움직이는 상황이 반복됐다.
2025년말 전국에서 신탁방식으로 진행 중인 정비사업은 약 23곳, 1만 4,330가구 규모에 이른다(서울경제, 2025). 숫자로는 아직 조합방식에 비해 소수지만, 시장 점유를 위한 경쟁은 구역 수보다 훨씬 이른 단계에서 이미 벌어졌다.
이에 2024년 12월 도정법이 재차 개정됐다. 신탁업자와 협약을 체결하려는 자는 토지등소유자 총수의 100분의 30 이상 동의를 먼저 받고,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며, 정비구역 안 일정 장소에 게시 공고를 하고, 인터넷 공개와 공개모집 절차까지 순차적으로 거쳐야 한다고 명문화됐다(도정법 제27조 제7항, 시행령 제21조의2). 주민이 알고, 주민이 선택하고, 그 결과로 협약이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노량진 재개발 구역에서 확인된 상황은 달랐다. 법 개정 이후에도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단계에서 실제 직급과 다른 직함을 가진 신탁사 인력이 중개사무소를 돌며 협약을 권유하고 있었다. 법이 막으면 다른 이름이 등장했다. PM(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업무협약, 지원용역. 형식은 바뀌었지만 목적은 같았다.
법이 바뀌었다. 현장은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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