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문 앞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어떤 프로그램 안에 들어와 있지만, 어디쯤 있는지는 모른다.”
한 방송인이 던진 이 말은 어쩌면 오늘날 청년들의 심정을 가장 정확히 대변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펙을 쌓고, 면접을 보고, 전세금을 마련하려 허덕인다.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투자도 해보지만,
이 사회의 중심부, 말하자면 ‘성’에는 닿지 않는다.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성』처럼.
건축기사 K가 도달하려 애썼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했던 그 ‘성’처럼,
우리의 노력도 때론 끝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노력’이 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안다.
‘공정’이라는 말 아래 숨겨진,
태어날 때부터 기울어진 출발선의 존재를.
카프카의 『성』은 결말이 없다.
K는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혹자는 말한다, 성은 애초에 없었다고.
혹자는 말한다, K는 이미 안에 있었지만 몰랐다고.
어떤 해석이든 진실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
‘성’이라는 상징은
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성’은 좋은 직장, 비싼 아파트, 결혼, 명예일 수도 있고
부모의 지원, 학벌, 외모, 출신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성 앞에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지만, 그 질문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성에 도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성에 닿기 위해 자신을 잃는 것이다.
현실의 압박은 크다.
친구들의 SNS는 빛나고,
채용공고는 깐깐하고,
뉴스는 계속 부동산 가격 상승을 외친다.
지금 이대로 가다간, 내일은 더 불안하다.
그래서 오늘을 포기하게 된다.
현재를 저당 잡히고, 미래에 올지 모를 '성'에 모든 걸 건다.
하지만,
그 '성'이 정말 나를 구원할까?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성은 통제할 수 없다.
입장 기준도, 절차도, 목적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의 나’는 통제할 수 있다.
오늘 걷는 이 길에서
내가 정직했다면,
내가 나를 아꼈다면,
그것이 곧 ‘자기만의 성’이다.
'성'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방황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 있는 증거다.
어떤 이들은 성 안에 있는 듯 보이겠지만,
그들도 사실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부디,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지키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