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시대, 우리가 떠나야 할 ‘진짜 여행’에 대하여
“80일이면 세계를 돌 수 있을까?”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시간과 공간을 수학처럼 나열해보이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항목으로 환원한다.
기차의 속도, 배의 항로, 환율, 국경통과 시간…
그에게 세계는 정확한 시간표에 맞춰 ‘정복’해야 할 지도다.
하지만 진짜 세계를 보는 눈은 그의 하인, 장 파스파르투(Passepartout)에게 있다.
파스파르투는 매 도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때론 감동하고, 속고, 도망치고, 심지어 사랑에 빠진다.
그는 계획에서 벗어나고, 종종 발목을 잡히지만,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세계의 생생한 온도’가 독자에게 전달된다.
포그는 여행을 ‘통과’한다. 파스파르투는 여행을 ‘겪는다’.
둘 다 같은 지리적 경로를 지나지만, 시간의 질과 삶의 밀도는 전혀 다르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 이상의 것을 상징한다.
포그는 이성과 통제의 상징이다. 그는 세계를 잴 수 있다고 믿는다.
파스파르투는 감각과 혼돈, 그리고 우연의 화신이다.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다.
많은 이들이 여행을 간다. 수십 개국을 돌고, 인증샷을 남긴다.
하지만 과연 그 여행은 누구의 것이었나?
자신이 통제한 시간표만 남고, 그곳의 냄새와 소리, 뜻밖의 감정은 사라진 건 아니었나?
불확실성의 시대다.
기후 위기, 기술 변화, 자본의 속도, 전쟁, 불평등…
삶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항로’가 되어버렸다.
이럴 때 필요한 여행은 무엇인가?
단지 계획된 이동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 여정.
정보만 소비하고 인증만 남기는 여행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나를 흔드는 ‘경험’이 있는 여행.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그의 여권이 아니라, 파스파르투의 신발이다.
“진짜 여행자는 계획을 위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흔들기 위해 떠난다.”
그것은 더 많은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낯섦’을 견디는 일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세계의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의 나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진짜 여행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고, 목적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끝내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