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연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외부의 일은 우리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다만, 그 일에 대해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에픽테토스-
우리는 종종 청승과 자기연민 속에 자신을 가둔다.
그날의 실패, 관계의 균열, 버거운 현실 앞에 우리는 스스로를 가엾다 여긴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다른 사람들은 잘만 사는데’ 하는 생각은 우리를 감정의 수렁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왜곡된 거울 속에서 삶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말했다.
“불행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청승이란 단어는 본디 남루하고 처연한 태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감정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자기연민 또한 그렇다.
자기 자신을 동정함으로써,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밤을 통과한다. 문제는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야 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그에게 삶은 감정의 홍수 속에서 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하지만 내 생각, 내 판단, 내 태도만큼은 오롯이 내 통제 아래에 있다.
그는 황제였지만, 지극히 내면적인 인간이었다. 고통의 순간에도, 세상의 불의 앞에서도,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 자기 마음의 태도를 바꾸려 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 철학자였다.
그는 삶이 잔혹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외쳤다.
“너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고통에 굴복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 말은 곧 청승과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실을 왜곡 없이 받아들이는 용기라는 뜻이다.
고통은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슬픔과 수치로 감싸는 순간, 고통은 더 무거워진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냉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따뜻한 결단이다.
‘나는 지금 힘들다. 그러나 이 감정은 내가 만든 해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해석을 바꾸는 순간, 삶도 바뀔 수 있다.’
청승과 자기연민은 인간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삶을 유예시키는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그 유예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끌어안고도 “살아내는 사람”이 되는 것.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고통의 무게를 줄이는 법이 아니라, 그 무게를 이고 걸어가는 방법”이다.
"땀에 젖은 셔츠는 축 늘어졌고,
헐어버린 구두 뒤축은 오래된 침묵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의 손엔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컵라면이 있었고,
젓가락은 마치 하루를 삼키듯 천천히 움직였다."
누군가의 무너진 하루가, 세상의 귀퉁이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모습처럼...
당신이 컵라면을 들고 편의점 앞에 앉아 있다 해도,
비루함을 느끼지 말라.
그 청승 속에서도 고개를 들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자기연민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다.살아내는 것, 그 자체로 존엄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자의 말이 아니라, 당신의 선택으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