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낙인과 기회비용의 포기 어디쯤.
가난의 빈곤
돈이 없어 사회적으로 가난하기까지 한데 그 가운데 더한 빈곤이 있을 수 있을까 싶겠지만
돈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수치와 모욕감은 다양하다.
언론은 좁은 방과 노후한 시설, 배고픈 모습을 중심으로 보도하지만 가난한 가정의 이들은 스스로 삶을 검열하고 사회에 통제당하는 것을 일상으로 여겨져야 한다.
수급자격을 박탈당할까 어려운 일이 있거나 도움을 청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주민자체센터 같은 정부기관에서 우리 생각보다 깐깐하게 금융정보 조회를 들어가기 때문에 혹여나 뭔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꼬투리라도 잡혀 일상을 유지해 온 삶을 박탈당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숨어있기를 스스로 선택한다.
과연 이 선택이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능동적으로 능력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보다도 무언가 혜택을 받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능력이 없는지를 오히려 홍보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려면 한 개인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대상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스스로 이마에 낙인을 찍고 대낮에 걸어 다니며 도움을 홍보해야 하는 지경이 되어서야 인간의 비참함에 사람들은 뒤돌아보고 그의 품위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굳이 눈으로 확인 한 뒤에야 손을 내밀어 준다.
나와 다른 너라는 구분이 명백히 이뤄져야만 도움이 주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결국 가난하다는 증명 자체가 개인에게는 낙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은 소년 운반 수 · Mbale, Uganda · pexels
아프리카 지역의 어린아이들이 힘든 육체노동을 하고서도 쌀 한 톨 오물오물 씹어먹는 가슴 아픈 사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의례히 가난이란 못 먹고 못살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가난에 대한 왜곡된 상상, 언론에서 비치는 굶고 있는 아이들, 창문이 깨진 집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 같은 곳에 들어간 이들이 숨을 껄떡거리며 죽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내미는 그 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구제니까.
물론 도움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렇게 극적인 순간이 되어야만 우리는 손을 내밀어주는 것일까.
일상에 가난이 잠식하기 전 현상유지를 위해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아이가 돈가스를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에서 도움을 주는 안 되는 걸까?
꼭 몇 날 며칠을 굶어 얇은 옷으로 집 밖을 뛰쳐나와 살려달라 외쳐야만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모두 알듯 인생은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어려움은 꼭 그렇게 극단적이고 극적인 상황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이유식을 만드는 갓난아기 엄마가 마트에 갔을 때, 900원 기획 상품 두부와 국산콩 100% 유기농 무농약으로 만들어진 4,200원 제품의 두부 사이에서 고민하다 기획상품만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서 구분되며, 30알 한판에 3,600원 계란을 사냐 10알 한판에 7,900원 동물복지 계란을 사느냐로 구분된다.
월급을 받게 된 직장인이 온라인 특가로 8,900원 티셔츠 한 장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사지 않고 대신 가족들 과일을 사서 들어갈 때, 누군가는 임직원 할인가를 적용해도 80만 원대인 패딩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3개월 할부로 산다.
고가의 제품을 할부로 사면서 우리는 할부 인생이라고 카드값이 퍼 가요를 외친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은 8천 원 티셔츠도 고민하다 사지 못하는 포기가 가난에서는 벌어진다.
가난은 삶의 벼랑 끝에서 낙인찍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의례 벌어지는 다양한 기회비용에 대한 포기다.
그 포기가 단순히 질 좋은 제품 대신 값싼 제품을 사는 양질의 상품에 대한 포기일 수 도 있고, 내 것을 포기하고 가족을 택하는 개인의 욕구 일 수 도 있으며, 잠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끼니를 포기하는 것일 수 도 있으며 때로는 가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목숨을 포기하는 것일 수 도 있다.
그 세계의 포기에 대해 조금씩 남겨보려고 한다.
포기를 만들어내는 그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