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새겨지는 Stigma

불안

by 강모모


조금은 지저분한 이야기 일 수 도 있지만, 소위 큰 볼일에 대해서는 참다 참다 화장실로 달려가는 순간 뻥! 하고 터지는 엄청난 발산을 경험한 적, 나는 있다.


이건 대장 내에서는 유해균들에 의해 작용을 받아 당질은 발효되어 수소, 이산화탄소, 메탄(methane)등의 가스를 발생시키고 단백질은 부패되어 황화수소, 인돌, 스카톨, 암모니아 등을 발생시키되는데, 이것들이 차고 차고 넘쳐나는데 해소가 안되면 대장 내에서 저것들이 장시간 머물렀으니 화장실을 발견하는 순간 뻥! 하고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크고 작든 간에 몸안에 소변 등이 쌓이면 밖으로 배출을 해야 하는데 해소가 안되면 터져버리듯이,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pixabay

불안과 공포


여러 감정 중 특히 "불안"은 사람의 정서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우리 몸의 세포에 흔적(stigma)을 남기게 된다. 슬픔, 화, 고독, 외로움, 고통과 같은 불행의 정서가 나에게 노크하는 것 같을 때, 문도 열여준 적 없는데 벌컥 제껴열어 나에게 돌진하는 것 같을 때 필연적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일상의 불안을 겪어 나가다 보면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불안들이 점점 쌓여나간다. 이것들이 눈물이 나 하소연, 지인들과의 만남 혹은 험담 같은 부정적 형태 로라로 해소가 되지 않으면 내적이든 신체적이 든 간에 뻥! 하고 터지듯 병리적인 현상이 나오게 된다.




본인이 울지 못하는 사람일 수 도 있다.


눈물 흘려본 적이 많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술만 마시던 아빠가 차에 치어 죽었을 때도,
평생 일만 하신 엄마가 혈액암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남들은 드라마를 보다가도 운다던데....
너무 웃긴 예능을 보다 너무 웃어서 울었다던데...
억울함이 몰려올 때 분해서 울었던 적은 있지만 슬퍼서 운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눈물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상관없이 항상 나오고 있다. 눈을 촉촉하게 적시기 위해서인데, 기능적인 물이 아닌, 눈물샘 신경에 이어져 있는 뇌신경이 신호를 보내 눈물을 만들어 내는 때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감정에 큰 자극을 받아 신경을 건드려 물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게 되면 홍수가 났을 때 하수구가 역류하는 것처럼 눈물이 우리 눈꺼풀 너머 밖으로 역류해 흐르는걸 우리는 눈물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신경계가 밖에서 오는 자극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이건 우리의 정서적인 문제와 환경적인 문제가 모두 섞여 있는 총체적 난국 인 케이스가 많다.


내 신상 주변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보통은 감각이 무뎌지거나 예민해지게 되는데, 아주 극단적인 케이스로 감각이 너무 예 민진 나머지 역설적으로 무뎌지는 형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 저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이다.



자아 강도가 약해서 무너져 내린 케이스.


등 뒤에서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떨까.

뻥!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는 엄청난 굉음이 들리지만 정작 그 앞에 있는 당사자는 귀가 멀어버린다ㅡ

그래서 듣지 못한다. 우리의 놀라운 신체가 인지기능을 순간적으로 얼려버려 충격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신경계가 귀(청각)를 희생해 다른 것들을 지켜 내는 거다.


인생에 폭탄이 떨어진 것만 같은 충격적 사건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일을 받아들여 극복해내야 하는 당사자들에게 에너지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빵 덩어리를 쪼개서 나눌 기운조차 없는 사람이 폭탄이 떨어지는 사건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게 어떤 일인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다.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그럴 기운이 없는 거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놀라운 신체가 인지기능을 얼려버려 충격에 대응한다.



나도 때리고 남도 때리는 상처


안면실인증 장애를 가진 범인, 무통증인 감각 통증장애를 가진 남자 주인공, 냄새가 시각적으로 보인다는 조현병 같아 보이지만 진짜로 냄새가 보이는 여자 주인공. 정신질환 가진 인간들이 총출동한 것 같은 웹툰 본 적이 있다.


범인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남주는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여주는 모두의 고통에 공감하는 듯 하나 홀로 생각하고 혼자 냄새를 보며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발견하고 해결해나간다. 결국 남과 공감 못하는 등장인물 모두가 각자 다른 징후로 같은 싸인을 보게 되고 사건 속에서 하나로 만나게 된다.


드라마 전반에 깔린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그들을 소파에 누워 사이코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봤는데, 역시 감정적으로 무뎌져 공감하지 못하는 건 소소한 것부터 심각한 것 까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생각하며 관찰하며 보게 되었다.


내 아픔이 너무 클 때는 내 인지도 얼려버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 공감이 될 리가 없다.


그 다른 사람이라는 범주는 나 이외에 모두 다 이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어머니가 병상에 앓아누웠다고 해도 이미 얼어버린 인지가 다른 감정적 감각을 막아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슬픔이라는 정서로 공감이 돼서 눈물이 흐르지 않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도 때리고 남도 때리는 상처.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집단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타인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지 못하고 언제까지 저 곡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신경질 내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 거다.


내 상처가 커서 남의 상처가 보이지 않는 것.


그렇게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것.


해소하지 못하고 돌봐지지 못한 채 버려지고 가둬놓은 상처는 딱딱해져 나도 때리고 남도 때리게 된다.


과거의 일제강점기부터 6.25를 거치며 최근의 리에 박힌 세월호와 다브뉴 강 사건과 코로나19까지 집단적 패닉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사건들을 마주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건이 주는 불안과 상처가 일상 속에 만연한 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불안에 대한 해소가 되지 못한 채 일상을 바쁘게 버텨내며 산다. 인생을 뒤흔들며 휘몰아쳐오는 불안보다 일상의 회복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상처를 보듬지 못해 남의 상처도 보듬지 못하게 된다. 자식을 잃고 눈물 흘리는 부모를 보며 여전히 아직도 그 타령이라며 타박하는 사람들도 마주하게 되는 거다.


결국 내 몸을 사랑하듯 남의 몸도 그렇게 사랑해주는 건데 내가 아파봤는데 그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더라 괜찮다는 무용담을 풀어내며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견뎌라는 식으로 희한하게 적용하는 우리를 그리고 나를 마주한다.


드라마, 영화, 온갖 소설 속에 판치는 해괴한 장애를 가진 주인공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을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데 어쩌면 사람들은 그 히트 친 웹툰을 보며 자신이 그들처럼 공감하지 못하기에 주인공들이 극단적 장애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에 대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며 통쾌함과 재미를 느끼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 몸에 새겨진 불안이 나를 좀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좀 더 인간적이던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오늘 내가 느낀 불안이 뭐였을지, 지난주 내가 받은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어릴 때부터 지속되어온 내 삶의 상처는 무엇인지 떠올려봐야 한다. 길에서 똥 싸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