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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사 작사가 류익 Oct 23. 2024

[대학 일지] #27. 재 휴학 일기

입학) D+2229 2020. 4. 8. (수)


<한국에서의 일주일>


ㆍ 우여곡절 끝에 스리랑카 Colombo 공항을 떠나 일본 Tokyo Narita 공항으로 출발했다. Colombo 지역은 계속해서 통행금지가 유지되고 있어서 마지막으로 소장님 얼굴도 못 뵙고 스리랑카 땅을 떴다. 또다시 이 땅을 밟을 일이 있을까. 그때까지 안녕이다.

Narita 공항에 도착하면 특정 장소에 격리될 줄 알았는데 격리는 따로 없었고 환승 시간이 될 때까지 어디서든 자유롭게 대기하면 되었다. 오랜만에 공항 식당에서 일식으로 조식을 먹고,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고, 쉬다가 면세점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장어덮밥과 초밥을 먹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으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좋고 행복했다.   

이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편에 몸을 실었는데, 사실 한국에 돌아올 때는 조금 긴장했다. 도착하면 오랜 시간 동안 검역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고, 4월 1일부터는 들어오는 모든 인원에 대해 14일간 반드시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공지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 공항 상황이 어떨까 참 궁금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유럽, 미국발 승객들 이외에는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높은 강도의 검역을 상상하며 입국했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아 열 검사 하나로 모든 검역 작업이 끝나서 황당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경주로 돌아가는 버스는 모두 결행이었고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철도의 구석 좌석에 격리되어 겨우 서울 시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호텔 수속을 하고 동규, 성민이 형과 같이 치킨과 맥주를 한 잔 마신 뒤 단잠에 빠졌다.


다음날 일어나 전자 우편을 확인하니 Fukui 대학으로 송신해야 할 자료가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편이 온 날짜는 2021년 4월 1일 수요일이었고 모든 자료를 4월 3일 금요일까지 작성하여 영남대학교 국제교류처로 직접 제출하라고 했다. 그중에는 기본적인 신상정보,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건강 검진서, 계좌 보유 잔액 증명도 필요했다. 경주로 돌아가도 정신없이 바쁘겠구나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중화요리를 먹고 경주로 내려가려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귀국한 사람은 KTX를 탈 수 없고 광명역까지 가서 특별 방역 기차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광명역까지는 어떻게 가냐고 여쭈었더니 그건 알아서 가란다. 결국, 대중교통을 타고 광명까지 가라는 말인데, 그러면 방역 기차의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대중교통을 타면서 다른 승객들에게 모두 노출될 테니. 그래도 별다른 방안이 없어 동규, 성민과 함께 택시를 타고 광명역으로 향했다. 광명역에서 방역 KTX를 타고 신경주역으로 도착하니 보건소 직원분께서 친히 승강장까지 나와 계셨다. 그리고 경주시 보건소 차를 타고 경주 시내에 도착하여 친절히 코로나 검사까지 해 주셨다. 원래 4월 1일부터 입국한 사람부터는 코로나 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하루 정도 대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나는 3월 31일 입국하였기에 격리는 따로 하지 않았고 잠시 머무를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해주신 갈비를 먹고, 곧 있을 서류 제출을 위해 많은 자료를 만들었다.


다음 날부터 부리나케 자료 준비를 했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건강 검진 문진서였다. 입국한 지 14일이 지나지 않아 아예 접수되지 않은 곳도 있었고 접수가 된다고 한들 결과가 늦게 나오는 병원도 허다했다. 운 좋게도 검진이 빠르게 가능한 의원을 찾아 검진을 받았고, 마감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모든 서류를 학교 국제교류처에 제출할 수 있었다. 14일간 조금 강도 높은 자가격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상 자가격리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주말에는 머리를 자르고, 염색했다. 쭉쭉 뻗치는 검은 머리를 염색하기는 또 오랜만이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다.


ㆍ 그리고 LASIK 수술 예약도 스스럼없이 해버렸다. 지긋지긋한 안경은 벗어던지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4월까지는 변화하고 5월부터는 일도 하며 성실히 살아야겠다.


ㆍ 동규의 소개로 외국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러시아, 프랑스 친구와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영어 실력도 점점 늘어가는 것 같아 좋기도, 뿌듯하기도 하다. 지금의 지점을 시작으로 더 많은 국가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내일은 동규가 효진, 채은과 약속을 잡았더라. 약간은 두렵기도, 약간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싶었다.

그리고 사실상 사업은 거의 진전이 없다. 일이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몰려있으니 억지로 소장님이 혼자 끌고 가는 것도 무리와 한계가 있어 보인다.




입학) D+2252 2020. 5. 1. (금)


<LASIK>


ㆍ 한국에 돌아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시력교정술이다.

언제였나,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최윤혁이라는 아이와 시비를 붙은 적이 한 번 있고, 윤혁이는 당시 나의 오른쪽 눈을 가격하였다. 순간 별이 필 돌았던 기억도 어렴풋이 났다. 싸움은 어느덧 일단락되고 양호실에 찾아갔는데 보건 선생님더러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며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 안과에 갔고, 재진 시 투여받아야 할 약을 내게 간호사분이 쪽지로 건네주셨다. 재진 할 때 나는 그 종이를 다시 가져가야 했는데, 나는 그것을 깜빡 잊었고,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엉뚱한 약 이름을 대었다. 다시 집에 가서 종이를 가져오면 되었는데, 당시 어른에게 찍소리도 못하던 터라 그저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했다. 그날의 약 처방 이후로 나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고, 일종의 의료사고로 인해 나는 어느샌가 나빠져 버린 눈을 가지고 여태 살아왔다.

원래 앳되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안경을 쓰면 영락없는 꼬마로 보이기 십상이었고, 알게 모르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부정적인 요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전문적으로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 더벅머리를 한 학생 같은 청년이 앉아 있을 때 큰 신뢰를 주지 못할 때도 있었다. 원래는 서울에서 시술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언욱이 형의 추천으로 부산에서 시력교정술을 받게 되었다. 몇몇 검사를 거쳤는데, 다행히도 내 눈은 일반인의 각막보다 두꺼운 축에 속했고 내가 원한다면 어떤 수술도 받을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나는 가장 안전한 축에 속하는 Smile LASIK을 선택했고 눈 검사를 받은 당일 수술을 해버렸다.


수술 과정은 짧고 간단했다. 기계에 누워 눈을 벌리고 초록색 laser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중간에 한 번 초록색 laser가 사라지지만 눈에 맺혀 있는 초록색 잔상을 계속 바라보면 되었다. 체감상 5분 이내로 모든 수술이 마무리된 듯 보였다. 그런데 무척이나 긴장되었는지 심장이 쿵덕이는 소리가 머리까지 울렸다. 수술 중 오른쪽 눈을 깜빡여서 의사 선생님께 잠시 꾸중을 듣긴 했지만, 수술은 큰 문제없이 잘 끝난 듯하다. 신기했던 것은 수술을 끝난 직후에 바로 어느 정도 시력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매시간 약을 넣을 때는 눈이 시리거나 목에서 역한 향이 올라오곤 했는데, 그래도 일정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불편함과 편리함이 동시에 올라온다. 만족도에 대한 총평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할 수 있을 듯.


당분간 눈 관리를 잘하여야 한다기에 주어진 약을 열심히 넣었다. 내 눈으로 아주 멀리까지 깨끗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 아주 만족스럽다. 하지만 아직은 작은 글자를 집중해서 보거나, 작은 화면의 영상을 보거나 할 때는 눈이 쉽게 피로해지곤 한다. 언제 부기가 다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입학) D+2260 2020. 5. 9. (토)


<만 25세가 되는 날>


ㆍ 25세, 20대의 딱 절반. 새로운 절반의 출발점을 알리는 오늘, 오랜만에 본가 책상에 앉아 펜을 든다.

귀국하고 일단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안정 찾기'이다. 계속 불확실한 상황, 불확실한 관계를 맺어 왔던 지난날을 청산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2년간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스리랑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조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어찌하였던 내게는 2주간의 자가격리의 기간이 주어져 있었고, 시국과 상황으로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맺어왔던 관계들에 대해 일회성이라도 인사치레를 하느라 하루하루를 소비하며 지냈다. 매일의 거주지가 달라지면서 마땅한 보금자리라는 개념이 불분명해졌을뿐더러, '내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도 딱히 없었다. 자가격리를 했던 그곳에는 항상 동규가 있었고, 우리 집 내 방 침대는 언제나 누나가 자리 깔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공간으로부터 소외된 채 마음의 짐을 풀거나 찬찬히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딱히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변화를 꾀했다. 답답해 보이기만 하는 인상을 탈피하여 머리를 자르고, 난생처음으로 염색한 뒤 머리 손질이라는 것을 하며 지냈다. 영원히 학생처럼만 보이도록 만들었던 안경을 벗어던지려 LASIK 수술을 강행했고, 여태까지의 감정은 상당히 만족하는 수준에 속한다. 여하튼 내가 가장 얻고 싶은 감정은 바로 '심리적 안정'이었다. 그 안정을 찾게 해 줄 대상이 바로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사랑하다 보면, 그것에 오롯이 집중하다 보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이 불안함의 감정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한국에 다다라 처음으로 만났던 상대들은 역시 불안함이었다. 동규가 몇몇 외국인을 소개해 주었는데 대부분이 한국 단기 체류가 목적인 학생들이었다. 프랑스, 러시아라는 매력적인 국가에서 오긴 했지만, 그들 역시도 언젠가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불안정의 연장선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학교의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학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두어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상대방은 내가 설정해 놓은 조건과 달라서 실제로 인연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고, 이에 좌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소개팅하기로 해서 부산에서 볼일을 보고 창원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당일 상대가 바람 맞히어 만남은 불발된 적이 있다. 여러 일을 겪으며 우울한 감정마저 생기기 시작했다. 대구에 올라와 찻집에서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사람이 있어 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와 케이크 하나를 건네고선 도망치듯 나와버렸고, 그게 어떻게 인연이 되어 그녀를 두어 번 더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녀와 내가 원하던 안정적인 신뢰 관계인 '연인'이라는 궤도에 들어섰다. 참 마음고생 많았다고 하며 내 등을 토닥이는 것도 잠시. 왜일까, 나는 생일이 되면 늘 우울함을 느꼈다. 언제나처럼 바랐던 연인과의 생일 나기였지만, 작년에는 Rina의 급작스러운 일본 귀국으로, 그전에는 영대사랑 단원들의 무관심 속에, 그전에는 군대에서 그렇게나 싫던 동기에게 억지로 즐거운 척을 하며 케이크로 얼굴을 얻어맞았을 때. 돌아보면 생일에 관한 유쾌한 기억은 많이 없다. 올해는 한 번 바꾸어보려 이렇게나 노력했건만, 겨우내 만난 E양은 친척 집에 가보아야 한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그러곤 대뜸 연락을 끊어버렸다. 생일을 혼자 보내는 것은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그저 조금 우울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연락 두절이다. 나의 생일 사는 왜 이런 걸까.


아침 10시, 일기를 쓰다 잠에 빠져들었다. 묵묵부답이면 그녀와의 연락은 겨우내 닿았고, 웬일인지 그녀는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것도 무지하게 일방적인 방식으로. 나는 그녀를 알아갈 시간도, 기회도 모조리 박탈당한 채 그저 또다시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어찌 세상의 이 많은 것들은 내게 이리도 무정할까.

그래도 오늘은 내 생일이다. 꽤 많은 사람이 내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나는, 기꺼이 그들이 내민 축복을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입학) D+2262 2020. 5.11. (월)


<관계의 속도>


ㆍ E양과 이별을 하고 문자를 두어 통 보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에게는 닿지 못한 것 같다. 얼굴이라도 보면서 마무리를 하고 싶었기에 마지막을 깔끔히 하자며 만남을 제안했었는데 만남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 같고, 결국은 전화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E는 내게 연애관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 연애관은 다름 아닌 속도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속도감인지는 쉽게 알 수가 없다. Physical affection에 대한 속도인지, 아니면 마음 다가감에 대한 속도인지. 물론 둘 다 해당 사항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E는 내게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에 비해 확실한 속도감이 있었다. 확실히 내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가, 아직 한국식 연애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본인은 '알아가고 싶다.'라고 확실히 이야기했는데, 그건 아주 천천히, 조금씩의 방식을 택한 것 같다.

한 가지 조금 억울한 점이 있다면 E양도 그런 속도에 잘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고, 내 시선에서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 태도를 보였기에 나는 오히려 그녀가 빠른 속도감을 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E양 본인은 겉으로는 그렇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차라리 도중에 단 한 번이라도 너무 빠른 것 같다며 언질을 주었더라면 이렇게 속도에 불 붙이지 않았을 텐데.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더니, 무슨 연유인지 이렇게 순식간에 꺾여 버린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내 마음에 들어온 그녀를 이렇게 보내기는 너무 아쉬워, 기회를 한 번 더 줄 것을 바랐는데, 일단 시험 기간이 끝나고 천천히 생각해 본다고 그랬다. 그러면서 이야기했던 것은 분명히 내가 싫은 것은 아니고, 나의 속도감에 부담을 느꼈다고 했다.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아주 조금씩 신뢰를 쌓아보고 싶다.




입학) D+2270 2020. 5.19. (화)


<관계의 깨달음>


ㆍ 어젯밤 중학교 동창인 지원이를 만났다. 스리랑카에 가기 전 만 2년 전에 잠시 보았었는데, 그때 지원이와 무려 7시간가량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었다. 오랜만에 지원이를 만나 예사 그렇듯 최근에 있었던 일들에 있어서 이야기했다. 지원이는 웃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하면서 내 말을 경청했는데, 지원이의 결론은 내가 너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급한 것이 티가 나는 것은 아마 최하위 수준의 태도라며. 그래 맞다. 모든 것들을 너무 여유 없이 몰아붙이기만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라는 격언이 있듯 나만 급하다고 속도에 열을 붙이다 지레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래, 돌아보면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의 행복이 완성되는 것처럼 바라보곤 했으니까. 같은 실수를 인지도 못 한 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구나. 조급한 마음에 그저 목표물을 설정하고 그 목표물만 보고 달렸었구나. 지원이의 말을 들으며 깨닫는 부분이 확실히 있었다. 지원이와는 확실히 알고 지냈었던 기간이 길었었기 때문에 겹치는 추억이나 경험이 많은데, 겹치는 친구 중에 두형이는 소연이와 약 7년을 연애하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애오욕의 모든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이렇게나 기쁠 수가 있고, 한 사람으로 인해 이렇게나 비참해질 수도 있구나라며 엄청나게 많았었다고 전해줬다.

내가 바라는 '안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며 사귀기 전의 관계는 연습에 불과하고 본경기는 둘이 만나면서 맞춰가는 어떤 것이라며. 그래, 지원이의 말이 맞지. 한 치 틀린 것이 없었다. 내가 그나마 한국에 들어와서 짧은 기간 내 집약적으로 사람들을 만났었기 때문에 이렇게 크게 와닿으며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어떠한 오류를 범했었다면, 그건 바로잡으면 될 일이고 또 지금부터 가꾸어 나가면 될 일이니까.

그래, 나는 오히려 급한 것 같으니 빙 둘러가는 편이 정석에 꼭 맞을 수도 있겠다. 자기 계발을 하면서 '여유'라는 것을 한 번 더 가져보자. 나도 여유라는 게 생긴다면, 이 생활에 만족스러운 상황이 이어진다면 그때 한 번 더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 내 마음의 호수가 잔잔해졌을 때 E와도 연락이 한 번 더 닿았으면 한다. 지원이의 말처럼 분명히 신체 접촉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내가 풍기는 느낌, 뉘앙스가 충분히 부담으로 느껴졌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인제야 한다. 2년 동안 꾹 눌러왔던 마음이 너무 앞섰던 것 같다. 그런 지점에서 많이 미안하다.


어찌 되었든 취업이 되어서 생활에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 것도 내게, 우리에게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도 일하는 시간 중간중간 문득 E의 생각이 나긴 하지만, 정신없이 굴러가는 하루 속에 사무치게 힘들지는 않다는 점. 만약, 백수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그저 그녀 하나만 바라보다 어느새 또다시 무리수를 두거나 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차라리 이런 마음을 먹은 지금 실마리가 어떻게든 닿았으면 좋겠다.




입학) D+2276 2020. 5.25. (월)


<일상 속에서>


ㆍ 우연히 놀이공원인 '경주월드'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느덧 2주 차를 지나고 있다.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무척이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매일을 허망하고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여간 뿌듯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경주월드에서 혼자 근무를 하는 날이다. 첫날 어느 정도 실력이 올라오면 혼자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임님이 이야기해 주셨는데, 벌써 어느 정도 실력이 올라왔나 보다. 혼자 있으면 확실히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다. 손님이 뜸한 오전 시간에는 일기를 쓰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것들이 가능한 한 듯하다. 신기하게도 내가 겪었던 아르바이트는 대부분 이렇게 여유가 있는 것들이었다. 여유가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게 된 것도 다 내 복이겠지.


ㆍ 며칠 전에는 누나의 상견례가 있었다. 요 며칠을 마음 졸이던 그 만남.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식사를 아주 못할 분위기는 아니었고, 배도 고팠을뿐더러 음식도 정갈했었기 때문에 식사는 만족스럽게 잘했다. 본격적인 혼담은 후식을 먹을 때 이루어졌는데 아무래도 주제가 주제인 만큼 분위기가 무겁거나 엄숙한 경향이 있었다. 그저 묵묵하게 부모님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것을 정자세로 듣고 있기만 했다. 그냥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불편한 감은 있었다. 또, 경험해보고 싶지는 않다.


ㆍ 어머니는 17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우리 어머니인데, 출근 생각에 잠에 빠져들다가도 곧 깨는 게 일상이었고, 하다못해 수면제까지 먹어가며 업무에 성실했던 우리 어머니인데, 아쉽게도 결말은 그렇게 좋지 않아 보인다. 평소와 같이 평범하게 업무를 끝냈는데, 손님들이 불편사항을 접수했다고 한다. 본부 측에서는 불편사항을 접수하고 어머니께 근신 처분을 내린 듯하다. 17년 경력에 후임들 앞에서 근신 처분도 처분이거니와, 경력자에 대한 융통성 없이 원리 원칙을 고수하는 본부의 태도에 질려 사직서를 내버렸다고 한다. 원래는 내년 말까지는 직장을 계속 다녀보려고 했는데 예정보다는 1년 6개월 정도 빨리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마침 어머니는 갱년기도 찾아와서 불면증 증상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며,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뒤늦게 반려를 요청하였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심지처럼 굳어졌으니 사직서를 정말 제출하고 요즘은 집에서 칩거 중이시다. 근 17년간 정말 고생 많이 한 우리 어머니. 정말 푹 쉬셨으면 좋겠다. 의외로 아버지도 담담히 어머니의 퇴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17년간 정말 고생 많으셨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테지.


ㆍ 최근 우리 아버지 성격이 많이 온화해졌다. 할머니 댁에 드라이기를 가져간다며 소리부터 지르던 그분이, 최근 한 번 더 '싫다'라고 확실히 언급하니 많이 나아지셨다.




입학) D+2277 2020. 5.26. (화) ~ 28. (목)


<제주 여행>


ㆍ 생일날 저녁 재호를 만나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우연히 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세은이 누나가 제주로 내려간 이후에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 승희, 재호 3명이 함께 평일 2박 3일 제주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다가 지현이와 은진이와 이 여행에 합류했고, 소영이까지 여행에 합류하기로 해서 6명이 제주로 여행을 떠나게 됐다.

제주로 떠나기 전부터 다들 들떠 보였다. 여행 갈 때 사진은 예뻐야 한다며 첫날, 둘째 날 입을 옷도 통일해서 갔다. 첫날은 청바지에 흰 상의, 둘째 날은 각각 색깔을 정해 무지개색 상의를 입고 만나기로 했다. 근무는 어찌어찌 빠졌고, 숙소와 차, 세은 누나와의 약속을 잡고 화요일의 제주 여행을 대비했다.

월요일 근무를 마친 뒤 경산으로 가서 동규를 만났다. 경산에 들른 김에 이사한 집도 구경했고, YUGP 합격 소식, 최근 하는 일 등에 대해서 들었다. Visa를 비롯해 Nomination 제출을 마무리했다는데, 올해 갈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단다. 그러는 사이 나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취소되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도 서로 각자의 일을 하며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도 중요히 느껴진다. 재호도, 동규도, 나도 나름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구나.


ㆍ 아침 일찍 일어나 대구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 08:55 비행기였기에 07:30까지는 모이기로 했고, 다들 시간 맞추어 공항에 도착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비행기에 올랐는데 많이 피곤했었는지 나는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학교 밖 청소년 인솔을 한 이후로 3년 만에 다시 제주 땅을 밟았다. 제주도는 신기하게 rental car 회사마다 따로 버스가 있다고 했다. 버스는 15분 간격으로 있었고, 지점에 도착해 차를 수월하게 빌렸다. 이번 여행의 일정은 지현이가 짰는데, 일정표를 집에 두고 왔단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도두항, 무지개색으로 색칠된 도로 분리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후로는 고기 국수를 먹었는데, 3년 전에 먹었을 때는 별 감흥 없더니 오랜만에 먹으니 깊은 맛이 느껴졌다. 정말 맛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깊은 맛이었다.

그 이후로는 화산 성분이 들어있다는 모래사장을 걷다가 주변 가게에서 음료를 마시고 이번 제주 여행의 유일한 이유인 세은이 누나를 만나러 떠났다. 무언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누나라 찻집에서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참 두근두근했다. 세은이 누나가 골라준 제주 흑돼지 가게에서 오랜만에 세은이 누나를 만났다. 약 3년 전 세은이 누나가 반딧불이 학교 밖 청소년 사업을 하면서 제주로 초대해 주었었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가영이 누나는 아무래도 세은이 누나가 임신한 몸이라 가뜩이나 신체 변화가 심한 누나에게 괜히 상처될 만한 언행은 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었다. 세은이 누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프리지아 꽃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꽃집에 프리지아는 팔지 않아 사지 못했고, 파아란 안개꽃을 하나 샀다. 승희는 아기 옷을 하나 샀고, 재호는 Defuser를 준비했다. 누나는 오랜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하고 친숙했고, 또 너무나도 반가웠다. 흑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런저런 근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 되시는 분은 친구의 소개로 만났고, 둘 다 술을 좋아해 거의 매일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가 덜컥 아이가 생겨버렸다고 했다. 세은이 누나 나이가 어언 39살인데, 40대의 남편을 만나 다음 달 말에 결혼한다고 했다. 그리고 누나는 최근까지 친환경 식품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활동하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잠시 여행 삼아 제주로 오셨다고 했는데 살다 보니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아예 눌러살게 되었다고 했다. 3년 전에 만났을 땐 분명히 본인은 비혼주의라고 했었던 세은이 누나가 결혼이라니. 참으로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쁜 일이다. 같이 맥주 한잔했다면 좋았겠지만, 임신한 관계로 술은 못 마셨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누나는 빨리 출산하고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농을 던졌다. 감사하게도 고기도 한 상 가득 시켜주셨다.

세은이 누나와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가니 은진, 지현, 소영이가 딱새우와 오징어 회 등 안줏거리를 잔뜩 사놓았더라. 그러고선 정말 밤새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는 거의 밤 10시부터 시작하여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진짜 감성주점에 온 듯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소리를 지르고 춤추며 놀았다. 나와 은진이가 각자 맥주 두 캔을 비우는 동안 승희, 재호, 지현, 소영이는 소주를 무려 12병이나 비웠다.


다음날 점심 즈음 일어나 씻고 준비한 후 여자아이들 준비를 기다리는데 책을 1권 다 읽어버릴 동안에도 준비를 덜 마쳐서 우리는 무려 오후 3시 즈음에야 길을 나섰다. 늦은 점심으로 옥돔구이를 먹고 Cart를 타러 갔다. 살면서 처음 타보았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놀랐다. 사진도 엄청나게 찍고, 저녁으로 제주 흑돼지와 백돼지 구이를 한 번 더 먹었다. 두 돼지는 색깔의 차이만 있을 뿐 육질에서는 유의미한 차이를 못 느끼겠더라.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진미채, 콘치즈, 전복구이, 라면 등을 안주로 실컷 또 먹고 이야기하다 잠들었다. 다음날 역시도 바닷가를 잠시 걷고선 유명한 김밥 가게에서 식사한 후 공항으로 떠났다. 조금 뜬금없이 떠나게 된 제주 여행이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치유를 많이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정을 잘 짜준 친구들 덕분에 독특하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고 일상을 떠나 정말 아무 걱정 없이 2박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입학) D+2326 2020. 7.14 (화)


ㆍ 글로벌 청년 새마을 지도자 임기가 완전히 끝났다. 두 달의 대기 기간과 한 달의 심사 기간을 두고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나 보다. 마지막으로 건강 검진을 받고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어느 정도는 허망하게 활동이 마무리되었다. 내가 이루어낸 성과나 결과를 정리하고 보니 그래도 나름 2년이 뿌듯했다. 그래도 지난 2년이 이렇게 끝났다고 하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소장님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동규가 스리랑카로 한 번 더 방문해 주길 소망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 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업 관련해서 무언가가 아직 남은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소장님은 나와 동규를 스리랑카로 한 번 더 초청해 보려 무진장 애를 쓰고 계신 듯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Gamage와 소장님은 임금 문제로 시비가 붙은 듯하다. 소장님은 Gamage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려 하지 않으신 듯하고, 10일 치 급여를 주지 않으시는 듯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Gamage는 내게 불만을 토로하는데 사실 내가 여기서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왈가왈부할 수 있는 계약도 만료되었고, 내가 굳이 나선다고 달라지는 일도 없을 터이니.


ㆍ 경주월드 입사를 한 지 약 두 달이 넘어간다. 각종 놀이기구를 직접 운용해 보고 조작해 보고 손님들을 만났다. 재미있다고 칭찬도 받아 보았고, 무례하다고 불편사항도 받아 보았다. 배운 점도, 실망한 점도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내게 많은 성장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 같다. 아주 단순한 노무를 수천, 수 만 번씩 반복하며 고액의 연봉을 받아 가는 것 하며, 사람에 웃기도, 지치기도, 질리기도 하며 이렇게 다들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꽤 노동강도가 높은 날도 더러 있기도 하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길다 보니 지치는 날도 꽤 많다. 그런데 그런 만큼 일당은 정말 잘 쳐준다. 연장 수당에 주휴 수당까지 합하면 세전 시급은 무려 1만 원을 웃돌고, 한 달 150시간이라는 살인적인 노동을 끝내면 한 달에 약 150만 원 정도의 수입이 들어온다. 급여만 생각한다면 아주 괜찮은 일자리이지만 특유의 딱딱하고 수직적인 문화가 지치고, 현장 실습에 신청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조만간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입학) D+2333 2020. 7.21. (화)


ㆍ 내일로 경주월드 일은 끝이다. 미래에 또 이곳에 돌아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일로 끝이다. 섭섭한 마음보다는 시원한 마음이 더 크다. 붕 떠버린 시간을 날려버렸고, 이만한 시급을 주는 곳도 없지만, 또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만한 여유를 가줄 수 있는 일자리도 잘 없지만, 일단은 안녕이다. 좋은 추억과 재미있었던 기억, 좋지 않았던 것들 모두 남기고서, 안녕이다.

이번 2학기는 현장 실습에 지원했지만 벌써 2번의 실패를 맛보았다. 그래도 기회가 닿을 곳까지는 계속 지원해 볼 생각이다. 왜인지 강의를 듣고 과제하는 대학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싫다. 반면, 혹시나 해서 넣어보았던 LH 행복주택에 서류 심사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입주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위치는 대구 안심역 부근이다. 다음 주 월요일에 서류를 내러 오라기에 대구로 가야 한다.




입학) D+2356 2020. 8.13. (목)


<가족과 여름휴가>


ㆍ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맞아 울릉도와 독도 관광을 다녀왔다. 2박 3일 일정으로 여행사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볼 예정이었다. 첫날 아침 일찍 울릉도로 출발하여 오후 울릉 관광을 하고 다음 날 오전 독도를 관광한 후 오후에 다시 울릉도에 머물다가 다음날 자유 일정을 즐기고선 다시 육지로 복귀하는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울릉도로 출발할 예정이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포항 선착장에서 울릉행 배에 올랐다. 쾌속선이라며 배가 꽤 작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일본 Fukuoka에 갈 때 자주 탔던 KOBEE와 규모가 비슷해 보였다. 배에 오른 4시간 내 잠만 잤다. 울릉도에 도착해서 숙소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보니 정말 한적한 시골 바다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호텔이라고 배정받은 숙소는 일반 관광호텔이었고, 심지어는 침대도 없이 맨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그런 숙소였다. 숙소에서 준비해 준 밥을 먹고 관광버스를 탄 후 울릉도 관광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효도 관광처럼 버스로 관광지에 내려다 주면 일정 시간 관람 후 다시 버스로 돌아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는데, 울릉도 호박엿을 사 먹거나, 씨 껍데기 술을 마시거나, 호박 식혜를 사 먹는 등 경치 구경과 먹고 마시는데 주안점이 있는 듯했다. 몸도 피곤하고 술까지 한 잔 마시니 피로감이 몰려와 버스에서는 계속 잤다. 한참이나 자다가 관광이 끝날 때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고, 다시 숙소에서 준비해 준 저녁을 먹은 뒤 세상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왜 이렇게나 피곤한지. 잠은 계속 자도 자도 파도치듯 쏟아졌고, 다음 날 독도로 향하는 배편도 아침 일찍 출발하기에 그냥 숙소에서도 가만히 잠만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사동항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사동항으로 가는 20분 동안 기사님이 '독도는 우리 땅'이나 아리랑 같은 음악을 선곡해 주셨는데, 무언가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를 듣는 게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독도는 울릉도에서도 약 2시간을 나아가야 닿을 수 있다는데 배 안에서도 내리 잠만 잤다. 뱃멀미가 무서워 멀미약을 먹었는데, 수면제 같은 성분이 들어있어 정신이 조금 어지럽기도 했다. 어쨌든 한참이나 달리다가 승객들이 환호를 내지르기에 잠시 잠에서 깼는데, 기상이 좋아 독도에 배를 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딱 30분이었다. 우리 가족도 그렇게 독도 땅을 밟아보았다. 일반 관광객들은 동도 선착장에서만 30분 정도 입도가 허락된다고 했는데, 일 년에 접안이 50~6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독도는 그야말로 영험한 느낌이었다. 갈매기들이 푸른 하늘을 날고 있고, 땅에는 옹기종기 솟은 바위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독도 경비대 몇 분들이 늠름하게 독도를 수호하고 있었다. 멋지기도 했지만, 군대를 전역한 나로서는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낙으로 이곳에서 병역을 할까는 생각도 들었고. 어찌 되었든 독도 땅을 밟게 된 것은 너무 좋았다. 동해 깊은 바닷속 어딘가 화산섬 두 개가 나란히 솟아있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30분이 지나니 배에서는 승선 신호가 흘러나왔고, 다시 2시간을 달려 울릉도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간식을 먹은 뒤 도동항 근처를 잠시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딱 지금 내 나이 때인 26살 즈음에 여기 울릉도를 아버지와 함께 오셨고 그때 갔었던 곳이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며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약 30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과연 나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런데 여행사에서는 다음날 태풍이 예고되어 있다며 하루빨리 육지로 간다고 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우리의 이번 여름휴가는 끝이 났다. 덕분에 아주 신비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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