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에 다다르는 법

by 소진

You're never going to get to the edge of the universe in a spaceship. You might as well try going on a bus. You can only go there in you head.


- David Hockney


가끔씩 그럴 때가 있다. 어딘가를 가지 못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때.

특히나 약간 쌀쌀하고 비가 올 것 같은날 그런 기분이 생겨나는데,

이런 이상한 감정이 분출되기 시작할때면 아 또 역마살이 발동한다, 하면서 어디론가 가려고 노력한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든 간다. 가도 또 가도 내가 생각하는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나 만나서 놀면서 이 기분을 잊고 싶다, 하며 데이팅 앱을 켠다.

오늘 나를 만나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찾고 또 찾는다.

그러다가 찾아지지 않으면 이태원에 있는 어느 바라도 가서, 술을 마신다.

외로움과 우울감,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발버둥, 내가 사는 세계는 여기가 아냐 하는 이 요상한 컨셉.

벗어날 수 없이 한번쯤은 찾아오는 기분들이다.

내가 미국에 있었다면 더 나았을 거야, 한국을 벗어나면 가능했을꺼야,

그런데 호크니는 말한다.

세계의 끝에 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게 아니다. 우주선이나 버스와 같은 운송수단을 탄다고 갈 수 있는것이 아니다.

오직 나의 마음(머리)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허먼 멜빌이 말하는, 육지에서 뭍으로, 그리고 뭍에서 바다로 나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탐색을 의미하는가. 아님, 꿈꾸는 이상향으로의 도착을 의미하는가. 이런 류의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깊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건 상대적인 거지, 너 마음속에 있는 대답은 뭔데?" 그러면, 이 상상 속의 현자와 함께 내 마음 속에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찾아본다면, 나에게 세상의 끝에 다다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건대, 세상의 "끝"이란, 그보다 더 가지 않아도 됨을, 그리고 그보다 더 갈 곳이 없음을 의미한다.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그 "끝"으로 가고 있고,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 중간에 있는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인이 가고 싶어서 선택한 길의 중간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놓여있는 중간이 있다.

그런데 전자의 사람은 본인이 가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기에 끝을 볼 수 있다. 상정하는 끝이 있고,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 후자의 사람은 끝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다. 내내 중간에 머무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사는 삶은 누군가가 그 끝을 정해주기 전까지는 끝에 다다를 수가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끝을 정해줄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의 그 "누군가"는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이든 후자이든 중간에서 그 "끝"으로 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끝에 도달하기 전에 죽는 것이 거북이보다도 짧은 수명을 가진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호크니에 따르면 내 마음과 머리를 이용하면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가고 싶은 곳도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그 끝에, 도달할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겨난다.

그래, 그렇다면 끝의 의미는 찾아냈는데, "머리"로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하면 머리로 도달할 수 있다는 걸까?

내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제 속의 자유"를 외치는 몇몇 작가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오히려 선택지가 너무 많을 때 행복감을 덜 느끼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특정한 시간에는 무엇을 한다 라는 식의 절제 속에서 가장 큰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머리로 세상의 끝(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은 의미 아닐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세상의 모든 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몇몇 개의 현실적인 목표로 한정된다면, 오히려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 머릿속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없다면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어디가 끝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내가 원하는 바가 명확히 들어 있다면, 끝에 도달했을 때 끝임을 알 수 있다.

그게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많은 삶의 선택지 중에 내가 원하는 것은 몇몇 가지 결과일 뿐이고, 그것을 성취하게 된다면 그 끝에 도달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쉽게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게,

내가 상정하는 끝은 "어떤 결과"가 아닌 "어떤 상태"인 것이 더욱 건강하기 때문이다.

즉, 예컨대 어떤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여 두 명의 아이를 낳는 것이 본인이 상정하는 끝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그가 원하는 것은 여자, 아이 자체라는 결과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가정이 이 남자에게 주는 안정감, 행복감, 사회에서의 소속감이 진정으로 그가 추구하는 상태인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외교관이 되는 일,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는 일,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일과 같은 결과적인 것은 내가 원하는 핵심을 찾기 위해 드릴을 어디에 가져다대야 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결과들을 한 꺼풀 벗기고 찾을 수 있는, 내가 원하는 "상태"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추구하는 상태이다.


결국, 호크니의 문장을 보고 내가 내리는 결론은 아래와 같다.

우선,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그 어떤 사회의 압력 때문이 아닌 스스로 원하기에 바라는-상태를 생각한다.

다음, 그 상태를 향해 끝에 도달할때 까지 나아간다.

즉, 머릿속으로 그 상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향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나아가다면,

결국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그 상태, 즉,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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