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놈들
1
여기저기에 몽둥이로 책상 두드리는 사람, 무얼 찾는지 서랍을 뒤지다가 깔려 있는 문서를 이리저리 팽개치며 발로 닥치는 대로 차는 사람.......
돈을 받아 내려고 빚쟁이들이 때지 어 들어와서 사무실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중 건장하게 생긴 까까머리 한 놈이 몽둥이를 냅다 팽개치고 한쪽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현이 앞으로 다가왔다. 순간 현은 긴장이 되고 말았다. 그는 현의 멱살을 잡았다. 아마 사채업자가 보낸 놈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야, 사장 개새끼 어디다 숨겼어?”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던 무리들이 깡패 같은 사내와 현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거 놔라!”
숨통이 막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던 현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을 잡아 틀었다.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현은 조카가 술자리에서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술이 취해 조카와 현장 인부가 싸웠던 이야기였다. 덩치가 산만한 인부와 함께 술을 먹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주먹으로 치지는 못하고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카는 순간 상대가 밀 때 뒤로 밀리는 척 살짝 몸을 뒤로 뺐고 동시에 상대는 몸이 앞으로 향해 약간 숙여지면서 균형을 잃었고 그 순간 조카는 잡혔던 손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힘껏 눌렸다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 주둥이 닫고 있으면 우리가 못 찾아낼 줄 알아? 좋게 말할 때 이리 데리고 와!”
현이 약하다는 것을 안 그는 목을 쥐고 밀기 시작했다. 현은 힘껏 버티어 봤지만 사내의 힘에 서서히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어설프지만 현은 조카가 말한 대로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것 말고는 이 순간을 모면하기는 도저히 어렵다는 것은 불을 보는 듯 빤한 것이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던 현의 몸을 뒤로 뺐더니 힘을 준 그의 균형이 허물어졌다.
“옳거니!”
현은 그 큰 덩치의 사내를 죽을힘을 다해 그의 팔뚝을 겨드랑이에 끼고 짓눌렀다.
“두둑!”
그렇게 형이 운영했던 토목회사가 부도 처리가 된 것은 2년 전 일이었다. 현이 곤지암에서 땅 1,200평을 평당 30만 원에 산 것도 소송하기 이 년 전인 그때의 일이었다. 땅을 산 그 돈도 형이 운영하던 토목회사가 부도가 나고 파산하자 조카와 회사 뒷정리를 맡아 처리하다가 찾아낸 돈이었다. 채권자들이 알았다면 손도 못될 4억이란 큰돈이었다.
사실은 당시 조카와 함께 형의 회사 보증보험에 연대 보증을 섰다가 현과 현의 조카는 집이 날아간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도왔는지 부도는 둘에게 보증 선 물건 보다 더 많은 돈을 찾게 해 주었다. 회사 사장이 현과 조카에게 얼마나 짜게 대했던지 부도가 나고 찾아낸 돈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함께 꿀꺽했어도 친형인 사장에게 별로 죄스럽게 생각지는 않았다.
평소에 현과 조카는 의견이 잘 맞았다. 인부를 다룰 때나 원청사의 트집이 있을 때는 조카는 시비를 걸고 현은 달래고 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잘 조절해서 해결했다. 그야말로 둘은 척척 손발이 잘 맞았었다. 그런 둘이 찾아낸 돈을 서로 분배했으니 아재 조카 사이가 아니더라도 분배에 불만이란 추호도 없었다.
역시 둘은 회사 뒷정리가 모두 끝났어도 서로 헤어지지 않고 함께 이 돈으로 투자할 곳을 찾아다녔다. 운이 트였던지 둘은 우연히 광주지역 중개인 사무소에 들린 것이 중개인 진 형철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뻥튀기 이 땅을 소개받은 것이다.
광주지역은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부동산 투기가 대단히 심했다. 결국 현과 조카가 함께 토지를 매입했는데 이 땅을 산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이 지역이 투기가 심하다고 정부에서 바로 토지 거래 허가지역으로 묶어 버렸다. 그러나 매입 당시 이런 낌새를 미리 예상한 중개인 진 영철은
“돈이 들더라도 농지를 택지로 변경해 놓으세요, 여윳돈이 있으면 아예 건축 허가까지 신청해 놓으면 더 좋고......”
라고 충고를 해 준 덕분에 농지를 택지를 변경해 놓고 건축 허가까지 신청을 해 놓았었다.
둘은 설계사무실을 통해서 뇌물이라도 써서 건축 허가를 빨리 득하려고 어지간히 힘을 썼지만 관청에서는 기다리라는 말뿐 차일피일 건축 허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훌쩍 지나 버렸다. 어쨌든 설계 사무실을 통하여 담당 직원으로부터 건축 허가가 나온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으니 중개인 진 영철과 현은 허가가 나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건축 허가만 떨어지면 두서너 배는 거뜬하게 남긴다는 진 사장의 충언도 있지만 부동산에 큰 관심이 없는 둘은 서너 배가 아니라 일억만 아니 오천만 남겨도 ‘얼씨구나’ 하고 당장이라도 팔아 버리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특히 캄보디아 석산개발 투자에 손을 댄 조카가 투자 날짜가 임박해지고 있어서 더욱 빨리 팔고 싶어 했다.
땅을 계약할 사람이 나타났다는 부동산 사장 진형 철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조카가 캄보디아로 가기 위해 막 김포 공항으로 출발하려고 일어설 때였다.
“김 사장님, 땅을 살 작자가 나타났는데 한 번 오시죠!”
“아~예, 진 사장, 얼마에 산답디까?”
“만나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시세가 배는 되니 평당 육십은 받지 않겠어요?” 조카도 부동산 매수자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 캄보디아 출장을 취소했다. 캄보디아를 가는 이유도 돈 때문이었으니 취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땅 매수인 박영희는 50대 후반의 남매를 둔 과부 사업가였다. 그녀는 곤지암 가까이 포장지 박스를 제작하는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차돌같이 단단하고 빈틈없는 그녀의 얼굴, 꼭 다문 입술, 현이 언 듯 보기에도 과부로 혼자서 두 남매를 데리고 모진 세파를 헤치고 자수성가한 그녀의 강한 모습이 엿보였다.
그녀 또한 경기도의 대다수 농지가 자연보존지역이며 토지 거래 허가지역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은 상수도 보호 지역이어서 오염 총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재 건축 허가가 신청되어 있는 것조차도 폐수를 방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건축 허가가 신청되어 있었다. 한번 묶이면 건축 허가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지역이었다. 그러니 관청에서 이미 건축 허가 신청을 받아 준 이 토지는 일반 다른 농지와는 가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전에 땅을 사려고 이곳저곳 여러 곳을 쑤시고 다니다 이 동네 이장을 만난 것이었다. 이장은 오랜 지킴이와 걸 맡게 마을 농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내용을 꽤 뚫고 있었다.
“건축 허가가 신청된 땅을 사두면 분명 한, 두 달 내 건축 허가가 떨어집니다, 그 땅 사두면 돈 벌 거예요, 그 땅을 산 사람이 서울 사람들이라 내용을 깊이 알기 전에 빨리 사 두세요. 그리고 이번 물량이 허가가 나면 한동안 건축 허가가 일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건축 허가만 나면 최소한 곱장사는 됩니다.”
영희는 조리 있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이장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도 만사는 불여 튼튼이라
“잔금은 건축 허가가 나면 치르기로 하지요. 건축 허가를 신청해 놓았다고 하니까......”
그녀는 혹시나 건축 허가가 나지 않으면 잔금이라도 넉넉히 시간을 끌어 보기 위해 현에게 은근하게 말을 하자
“건축 허가를 조건으로 하면 그만둡시다, 내가 건축 허가가 나면 그 돈 받고 팔겠어요? 허가가 나면 턱도 없는 금액이지요, 자, 없던 일로 하고 일어섭시다.”
하고 현은 대뜸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하자
“사장님 성질도 급하시긴,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 있잖습니까, 자자, 사장님 이리 앉으세요.”
하고 진 사장이 팔을 끌고 앉히자 현은 못 이기는 채 다시 앉았다.
“박 사장님, 건축 허가는 이번에 신청한 사람들부터 우선순위로 허가가 나요, 그리고 이번에 묶인 법도 아마 한두 달 이내에 풀릴걸요.”
그녀도 가까운 시일 내에 건축 허가가 나온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지금 60만 원에 사두면 머지않아 몇 배나 오를지 모르는 땅이라는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어차피 지금 공장부지도 좁고 공장을 지어 쓰다 보면......”
당장 오르지 않더라도 공장부지가 필요한 그녀였다.
“예,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건축 허가는 접수됐지요?”
그러나 관할청에 접수시켰던 건축 허가가 반려된 것을 설계사무실에서 일괄적으로 받아 놓고 있었다. 추후 접수한 토지 우선순위로 허가가 날 것이라는 조건으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서울에 거주했던 현은 설계사무실의 통고 누락으로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 접수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 전용 허가서와 건축 허가 접수증......”
그는 얼른 점용 허가서와 건축 허가 접수증을 내밀었다. 깨질 듯했던 계약이 그래서 다시 이루어졌다.
영희는 계약을 하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뒤 건축 설계자의 명의 변경이라든가 공장 설계를 변경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광주 시청에 들렀다. 담당자에게 건축 허가에 대해 문의했더니
“건축 허가를 모두 반려했는데요?”
하자 영희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니, 그러면 왜 통고도 하지 않고서는......”
“예, 통고를 했는데요. 설계사무실에서 연락이 안 갔습니까? 설계사무실과 허가 신청자에게 서면 통고를 했는데...... 물량이 400여 건이나 되어서...... 어쨌든 통보는 모두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번에 반려한 건축 허가신청자들만 우선순위로 건축허가서를 받을 겁니다, 설계사무실을 통해 연락이 갈 거예요, 다른 대지는 아예 엄두도 못 낼 거고요."
“이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허가가 반려되었다는데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영희는 나머지 대금은 매도인을 잘 달래서 자신 앞으로 먼저 건축 허가 명의를 변경하고 중소기업 자금을 대출해서 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저리의 대출금으로 중도금, 잔금을 치를 계획이었다. 그리고 공장을 지어서 바로 팔면 몇 배의 이익이 생긴다는 계획이었는데 건축 허가가 늦어지니 그 계획도 말짱 도로 묵이 되고 말았다.
“땅은 사야겠고....... 잔금을 어떻게 치른다?"
그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계약금을 듬뿍 넣어주자, 어차피 건너갈 돈 아닌가!”
매도인을 믿도록 구슬리는 일도 있지만 한때 그녀는 재판을 해서 승소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재판에서 승소해 보고서야 10%를 넘어선 계약금은 중도금과 같은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었다. 땅은 갖고 싶고 잔금은 약속 날짜까지 구하기가 힘드니 돈을 구 할 때까지 미루다가 설령 소송이라도 붙으면 일심에는 지드라도 이심까지는 돈을 구 할 수가 있으니 설령 잔금을 공탁하고 재판에 붙으면 분명 승소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중도금을 마련하려고 사방에 돈을 부탁하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도금을 아무리 긁어모아도 반밖에 되지 않았다. 돈을 마련하려니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녀는 궁여지책으로 부동산 중계소 진 사장이라도 찾아가서 사정할까 생각했지만 물건을 진 사장의 소개로 산 것은 아니라 마을 이장을 거쳐 이 땅을 소개받았고, 마을 이장은 진 형철에게 물건을 소개해 주고 소개료 일부를 얻어먹기로 한 것이니 진 사장이 돈이 있다 해도 자기 사정을 들어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쨌든 닥치고 볼 일이야,”
중도금 치르는 날 부족한 돈이지만 중도금 일부를 들고 왔다. 이 돈이라도 받으면 일방적으로 해약은 못하리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매도자 현에게 부탁 조로 말했다.
“사장님, 오늘 중도금을 반만 받고 건축 허가를 제 이름 앞으로 바꿔 신청해 주면 중소기업 대출을 받아 아예 잔금까지 처리해 드릴 테니 편리를 좀 봐주죠.”
계약금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등기를 이전해 주는 것도 아니고 대출금도 자신이 받을 것이니 별 상관이 없을 뜻 싶었다.
“그렇게 하지요 뭐,”
하고 쉽게 대답을 해 버렸다. 그런데 건축 허가가 재개된다는 말은 다음날도 다음 달도 관할청에서 연락이 없었다. 중도금 일부만 내놓고 잔금 날이 다 되었지만 매수인으로부터 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은 없었다. 현은 중개사 진 사장을 족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진 사장, 어떻게 된 셈이요, 도대체 연락이 없으니 말이요.”
“글쎄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내가 연락을 해 볼 테니.......”
“연락해 보고 연락 좀 주세요, 답답해 죽겠어요.”
현은 전화를 하고 난 후에 초조하게 기다렸다. 저녁 해 질 무렵이었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부동산 진 사장이었다.
“김 사장님, 오래 기다리셨죠? 어쩝니까! 매수인인 박 사장이 급한 일이 생겨서 중국을 들어갔다는군요. 어쩌지요?”
“아니, 돈은 어쩌고요?”
“글쎄요. 워낙 급한 일이라면서 한 일주일 걸린다는데.......”
“허허 참,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얼마 되지 않는 돈은 주고 가야지.......”
“어쩝니까, 중도금 일부를 치른 사람이 어디 도망가겠습니까? 며칠 참아 보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받아들이겠습니다."
“할 수 없지요, 일주일이라고요? 그럼 진 사장만 믿습니다.”
하고 수화기를 끊었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땅값도 치르지도 않고 중국을 들어갔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으나 진 형철의 말대로 중도금 일부까지 그 많은 돈을 주고서 도망이야 가겠나 싶어 별로 의심하지는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부동산 진 사장에게 연락을 했다. 진 사장 말이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아 회사로 연락하니 직원은 모른다는 말뿐이라고 했다. 그런 상태로 일주일이 두 번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제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한 달이, 두 달이, 그해가 넘어갔다. 참다못한 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듬해 3월에 소송을 하게 된 것이었다.
2
기다리고 기다리든 고등법원 판결 날이 오늘 10시고 보니 불안한 생각 때문인지 현은 도대체 입안이 깔깔해서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아침밥은 두는 둥 마는 둔하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일심 판결문을 낭독하던 판사의 음성이 아직도 그의 뇌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 피고는 어느 정황을 보나 중도금 및 잔금을 지급할 의사가 없고....... 따라서 피고의 반소 또한 기각한다.”
한편 일심 두 번째 심리가 열리자 영희는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진 형철을 매수하기에 이르렀다. 변호사는 박영희에게 계약서 별첨 란에다 별 필요도 없는 「건축 허가 자는 매수인으로 변경해 준다.」는 글을 넣어 달라고 주문했다. 아마 판사에게 매도인을 실없는 사람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함께 동석했던 진 형철은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내가 박 사장님 갖고 있는 계약서에 그 문구를 넣고 매도인 인감과 똑같게 도장을 날인한 것처럼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면서 자신 있게 큰 소리를 쳤다. 중개인 사무실에 돌아온 진 형철은 박 영희에게
“계약금을 주고받은 영수증을 줘 보십시오.”
하자 영희는 얼른 핸드백 속에 고이 접은 영수증을 꺼내서 진 형철에게 줬다. 그는 건너 받은 영수증을 펴 들자
“다행히 아주 선명하게 찍혔네.”
하더니 피우던 담뱃갑을 꺼내서 덧씌운 투명종이를 벗겨서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펴서 놓았다. 그런 다음 영수증의 날인 도장 위에 입김을 불어서 눅눅해진 영수증 위에 투명종이를 올려놓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문질렀다. 조심스럽게 문지르던 그는 다시 문지르던 투명 종이를 계약서 별첨에다 추가로 쓴 문구 위에다가 올리고 부드럽게 문지르자 인감도장이 날인되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며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됐습니까?”
하고 거드름을 피우자 영희는 핸드백에서 파란색 수표 석장을 꺼내 주면서
“진 사장 보통이 아니시네!”
하면서 썩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변호사로부터 준비서면을 받아 든 현은 찍어 주지도 않은 자신의 인감도장이 찍혀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니, 도장을 찍었다면 내가 갖고 있는 계약서에는 왜 안 찍고 매도인 계약서에만 찍었나요?”
하면서 펄떡 뛰자 진 형철은
“그때 사장님께서 ‘내가 찍어 준 것이니 까짓 거 내 것은 안 찍어도 되지요?’ 하고 말했잖아요.”
하고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어 말하니 더더욱 억장이 무너졌다. 변호사는
“그럼 이 사본이라도 빨리 감정사에게 맡겨 보지요.”
하길래 얼른 변호사가 소개해 준 사설 감정사에 의뢰하자 그는 다행히 몇 가지 지적사항을 들어 본래 인감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분명 매도인의 도장을 그대로 떠서 만든 작품인 것을 알고 있는 영희는 판사에게 반론을 제기했고 판사는 감정사를 지정해서 감정을 의뢰했다. 이제 원고 측과 피고 측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컷 감정을 부추기던 변호사는
“본 재판 취지와 상관없는 도장 날인 관계로 더 이상 싸우지 맙시다.”
고 하자 현은
“찍어 주지도 않은 도장을 위조해서 저 들이 수작을 벌리는데 열 통이 받혀 어찌 삽니까? 국과수에 의뢰해서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 합니다.”
하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는 동안 법정 감정사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는 계약서에 찍힌 도장과 현의 인감이 동일 인감이라는 것이었다. 현은 인감도장 문제로 감정이 극에 달했다.
세 번째 심리가 열리자 이번에는 전용 허가서와 건축 허가 접수증을 제출하면서 「중도금을 치를 때 건축 허가를 내준다」고 했기 때문에 중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그 증인으로 진 형철을 내 세웠다.
당시 박 영희가 중도금을 수차례 미루자 진 형철과 현은 박영희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난 사실이 있었다. 그때 역시 박 영희는 중도금 치를 때 건축 허가를 내준다고 해놓고 건축 허가를 안 내주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지 못한다고 억지를 쓰자 중개인 진 형철은
“그러지 말고 계산해 주세요, 계약할 때 김 사장이 건축 허가 말만 하면 이 계약은 없던 걸로 하자고 일어섰잖습니까, 그러면서 건축 허가 신청서와 접수증을 드리고 계약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하고 말했고 이에 박영희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허가가 반려된 접수증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나에게 줬어요? 이게 사귀지 뭐예요?”
“반려된 것은 나도 몰랐어요, 설계 사무실에 계약 후에 들려서 알았어요, 그래도 접수증은 다음 허가 때 그 순서대로 허가를 한다잖아요.”
진 형철은 맞장구를 치면서
“김 사장은 반려 통고를 몰랐다고 하잖아요.”
“아니, 건축 담당자가 통고했다는데 모르다니, 참내.......”
하고는 요지부동이었다. 영희는 사실 잔금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끄려는 속셈이었다. 그 후 그녀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다가 나중에는 사업을 빙자하여 훌쩍 외국으로 떠나 버렸다. 중개료를 받아야 하는진 형철은 억지를 쓰는 박영희 때문에 화가 나자 현을 보고
“정말 소송해야 될 것 같은데요, 만약 김 사장께서 소송한다면 내가 법정에 가서 증인으로 가서 사실대로 말할게요.”
라고까지 한 사람이었다. 대금 지급이 지연되자 현은 소송을 대비하기 위해 휴대용 녹음기를 포켓에 넣고 만날 때마다 대화를 녹음해 두었다. 증인 심문 날 심리가 시작되기 전에 현은 진 형철을 보고
“아니 진 사장이 어떻게 저 여자 증인으로 나와요, 그 당시에 내가 뭐랬어요, 건축 허가를 내 달라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래놓고 이제 와서 저 여자 증인으로 나와요? 기가 막혀서, 여보세요, 진 사장! 내가 이런 일이 일어 날줄 미리 예상해서 당신과 이야기 한 걸 녹음해 둔 것은 몰랐지요? 그래 잘해 보시오.”
하면서 이를 갈자 이 말을 들은 진 형철은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고는
“아이고, 김 사장님, 무슨 말씀을요, 내가 증인대에 가면 사실대로 말하려고 왔어요, 걱정 마세요.”
하면서 고개를 숙이며 증인석으로 향했다. 박 변호사의 증인 심문은 속이 시원했다.
“증인은 내가 질의한 심문 사실이 녹취되어 있음을 상기하십시오, 인정하겠습니까?”
“예, 녹취되었다면 내가 한 말인데 틀리겠습니까? 사실로 인정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0월 00일 00시경 고소인과 함께 피 고소인이 있는 00 소재 사무실로 찾아간 적이 있지요?”
“예!”
“그곳에서 증인은 피고가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남은 중도금 일부와 잔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요?”
“예!”
“그 말을 듣고 증인은 계약 당시 원고가 건축 허가를 조건으로 계약을 요구하면 이 계약은 없던 걸로 하자는 말을 했다고 했지요?”
“.......”
박 변호사는 증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원고가 일어서 가려고 하자 증인은 원고를 잡았고 피고에게 건축 허가는 머지않아 나오니 상관치 말고 계약을 하자고 종용해서 계약을 성서 시켰지요?”
이 말을 들은 진 형철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
“증인! 대답해 보세요.”
“.......”
“재판관님, 증인의 대답을 묵묵부답으로 기록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당연히 속이 시원하게 이긴 일심 판결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의 증거물이 없다고 심리를 종결했던 판사에게 박영희 측 변호사가 판결 일주 이전에 진형 철의 공증된 자필 서류 한 장을 끼어 넣은 것을 현이 본 것도 판결이 난 수일 후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편지지 맨 위 줄에 자필 자인서라 쓰고 다음 줄에 「중도금 일부를 지불하는 0월 00일 매도인은 매수인에게 이틀 뒤 본 매도 물건에 대한 건축 허가를 득하여 건네주고 중도금 잔액과 잔금을 함께 교환한다는 말을 분명히 했음을 확인합니다.」고 쓴 후에 그의 이름과 날인이 각인되어 있는 사본을 보았다.
그러나 일심 판사는 판결을 원고 승소로 내렸다. 일심 때 맨 뒤에 붙은 공증증서는 2심에 별로 중요한 자료는 아니겠지 하고 현은 무심코 지나쳤다. 아니 박 변호사가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으니 현은 모든 사건이 기분 좋게 끝난 걸로 생각했다.
3
아침 출근시간인데도 시흥 대로가 별로 밀리지 않았다. 시원하게 차가 잘 빠지는 것을 보니 오늘 재판도 일심같이 승소하려나 보다 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피고 측 변호사가 자료 제출로 심리를 미루는 바람에 2심이 시작되고 심리 다운 심리는 단 한 번도 없이 일 년이 지났다. 현이 생각건대 무슨 근거 자료인지는 몰라도 피고 측 변호사가
“시청에 신청한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판사에게 재판을 계속 미뤘다. 현은 다 아는 자료들 일 턴데 뭘 신청했고 왜 안 나온 다는 말인지 도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번 박 변호사는 자료 제출, 연기 등으로 변론 한번 없이 재판을 끌어올 때 한 마디쯤 판사에게 이의를 제기해 줬으면 싶었다. 그런데도 박 변호사는 판사에게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변호사 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피고 측 변호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가려는 것을 현은 답답해서 불러 세워
“변호사님, 이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원 답답해서.......”
하고 묻자
“헛 참, 그쪽 마음을 난들 알아요, 나도 모르겠는데요.......”
하고는 목례만 잠깐하고 헤어진 지도 벌써 열 번째이다. 거기다가 판사의 인사이동 기간이라며 또 한 달 판결을 연기하더니 일 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판결 날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역시 지금껏 아무 자료도 제출한 것이 없었으니 현으로서는
“그러면 그렇지, 지 놈들이 별 수 있겠어?”
하고 판결 날을 기다렸는데, 그런데 매달 심리 통보 날짜에 가슴 조이던 순간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
일심 판결을 받고 현은 승소한 박 변호사를 그대로 유임해서 변론을 맡겼다. 일심을 승소하니 믿음직하고 든든한 변호사로 다시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사돈뻘 되는 잘 아는 변호사에게 맡기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이왕 내친걸음이고 일심에도 승소를 했으니 별 의심 없이 이심을 맡기려고 아내와 함께 박 변호사에게 갔었다. 사실 사돈되는 변호사도 박 변호사와 같은 S대를 나왔고 고등검찰관 출신으로 재직 당시에는 서울지검과 의정부 지검을 번갈아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말년에는 인천 고검에서 강력 부장검사를 지낸 후 퇴직했고 지금은 굴지의 법무법인 000에서 이사로 있으면서 로비스트였다. 이번 사건이 형사사건 이면 사돈에게 사건을 의뢰했겠지만 민사사건이고 보니 혹 사돈 간에 말하기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까 봐 아내와 상의 끝에 박 변호사를 택했던 것이다.
“이심은 수임료가 일심의 배입니다.”
아내는 배짱이 두둑했다. 현은 뭐든지 망설이고 의심하며 잣대로 재는 타입이었지만 아내는 어떤 일이 생기면 할 말을 거리낌 없이 할 뿐 아니라 돈도 겁내지 않고 시원스럽게 뿌리는 타입이었다. 아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수표 한 장을 꺼내서 사무장에게 건넸다.
“성공 보수가.......”
아내는 사무장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아, 일심에 승소했는데 이심은 당연히 승소 아닙니까? 성공보수는 무슨....... 알았습니다. 내 오백을 더 드리지요.”
사무장은 멀쑥한 채로 아내가 주는 돈을 받아 들고 변호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빈틈없이 꼬장꼬장하게 생긴 박 변호사도 아내의 기세에 한풀 꺾였는지 한쪽 입만 약간 들리듯이 웃음을 지었고 눈치 빠른 사무장은 돈을 받았다. 그러나 현과 현의 아내는 박 변호사의 마음까지는 눈치채지를 못했다.
가히 피고 측 박영희는 일심에 불복하여 일심 변호인은 항소장만 제출하고 2심 법원에 배정된 판사의 “S대” 동기동창인 H 모 변호사와 일심 변호사를 함께 수임했다. 반면 현은 패소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우려는 있지만 일심 판결 후 세상이 뒤집혀도 진실은 분명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을 가졌다.
박 영희는 일심에 패소하자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차라리 일심에 진 것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다잡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만약 일심에 승소했다면 자신의 마음이 느긋해져 상대에게 약점을 보이게 되어 이심에서 패소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또 한 번 재판에 지고 나면 그 많은 계약금도 찾을 수 없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심 장애인인 변호사는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뒷바라지해 준 죽은 남편의 고향 친구였다.
“돈은 좀 들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하면 안 되는 것이 있겠어요, 요새 판사에게 부탁하려면 오천 이상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쪽 변호사도 우리 쪽으로 끄려면 돈을 줘야 하고요, 우선 중개인 진 형철이라고 했지요? 그 사람부터 회유를 해야지요, 돈이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세상인데 안 되는 게 있겠어요?!”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치는 옛 고향 친구의 아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변호사는 말했다.
영희는 돈이 얼마가 드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땅값도 배나 뛰어 지금 대로라도 6억은 벌고 들어간 땅이었다. 이곳 농지는 한 해에 배씩 오르니 재판이 끝날 때쯤이면 얼마가 될지 모르는 땅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심이었다. 현이 일심을 이기고 기고만장해 있을 때 영희는 이심에 승소하면 대법원 판결은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이 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심에서 승소해서 지금까지 들어간 돈을 받아 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다고 판사나 원고 측 변호사가 함부로 영희가 주는 돈을 넙죽 받겠는가. 영희로부터 건네받은 돈을 판사에게 뿌린 것은 피고 측 변호사의 손에 의해서였다. 다만 진 형철은 영희가 돈을 직접 돈을 준 것이었다.
이심을 심리 한 번 하지 않고 일 년을 끌어온 것은 영희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판사가 판결 날을 정하고는 사표를 제출하고 사임했다.
“옳지!”
현은 그렇잖아도 피고 변호사가 이유 없이 재판을 차일피일 끌어오던 터인데 판사가 사임했으니 저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재판은 이길 수 없으리라 하고 쾌재를 불렀다. 피고 측 변호사의 대학 동기 동창생인 판사가 사표를 내고 나갔으니 현은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박 영희는 변호사에게 억대의 로비 자금을 건넨 뒤라 무엇인가 자신에 유리하게 일이 돌아가는 감을 느꼈다.
일심 1년, 2심 1년을 지나다 보니 현이 살 때 삼십만 원하던 땅값이 거래에 활기는 없었지만 일곱 배인 이백만 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건축 허가는 한 달 전에 풀렸고 박영희는 대지 비용을 모두 공탁하고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다.
“망할 년, 지 땅인가? 건물을 짓게.......”
그는 시청 건축과에 들려 사실 이야기를 하고 건축물 중단 지시를 해 놓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다. 비는 사르륵, 사르륵 조용한 소리를 내면서 내리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물 튀기는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려왔다. 현은 도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고 해도 비워진 공백을 금방 그 생각으로 채워져 버렸다.
“그래, 마음을 비우고 다음을 대비하자.”
잠시 편안해지지만 잠이 들기 전에 또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과 생각들....... 아무리 다짐해도 마음은 현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위유!”
미움과 울화는 끝일 줄 모르고 현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머리의 중압감에 베개는 푹 꺼져 귀를 덮었다. 머리에 열이 나서 현은 베개를 다시 고쳐 세웠다. 역시 잠시뿐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 앞으로 갔다. 좁은 골목길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가로등 불빛만이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꽉 들여 찬 패소 판결. 현은 도대체 그놈의 판사들은 단순한 매매 사건을 심리 한 번 없이 일 년이나 끌고 오다가 이제 와서 계약서에 명시된 사실을 무시하고 그년과 복덕방 놈이 짜고 만든 사유서를 인정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아니, 네 옳고 나 그르다는 심리라도 제대로 한 번 했으면 그래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인데 말이다.
귀를 기울이고 판결을 기다리던 현은 사건 번호를 부를 때는 알아들었는데 판결 내용은 판사가 우물거리면서 빠르게 읽어 내려가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일심에 승소했으니 아마 이겼으리라고 생각했다.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법원에 알아보고 연락 줄게요.”
하더니 저녁 늦게 서야
“안 됐습니다. 패소했습니다.”
고 하지 않는가. 눈앞이 캄캄했다.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 패소한 이유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현은 밤새 분한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인 것이 한두 시간은 잠을 잔 것 같았다. 아내가 깨우지 않았더라면 정신없이 잠이 들 뻔했다. 급히 준비를 하고 서초동에 있는 박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박 변호사는 현이 찾아올 줄 미리 알고 있었는지 변호사실에서 손수건을 얼굴에 얹고 잠을 자는 척했다. 아직 한 번도 현에게 이런 액션을 취한 적이 없던 박 변호사였다. 올 때 차 안에서 아내가 한바탕 하려는 것을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말렸던 현이었다. 사무장이 박 변호사에게 가서 깨우는 시늉을 했다. 사무장이 들어오라고 하자 현과 그의 아내는 변호사 실로 들어갔다. 70고개를 넘은 박 변호사가 딱딱한 얼굴로 웃음을 지으며 앉으라고 자리를 권한다.
“도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하고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현이 묻자
“글쎄 말입니다. 나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아니 심리 한 번도 제대로 하지 않고 패소라니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날 벼락입니까?”
"난들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심리를 어찌 알겠습니까?”
피고 측 변호사로부터 수임료보다 두 배나 훨씬 많은 짭짤한 돈을 받은 박 변호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말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현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변호사가 늙고 간교한 여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더 이상 따져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아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현은 정신이 멍했다. 어디로 향할까 망설이다가 눈앞에 보이는 00 로펌을 찾았다. 면담은 바로 이루어졌고 수임료는 이천에 성공 보수 8천을 요구했다. 그리고 승소할 확률은 10%라고 했다. 10%의 확률이라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사돈이 있는 로펌사로 왔다. 마음이 급하니 사돈이라도 찾을 수밖에 별 방법이 없었다. 역시 승산은 10%로 성공보수 말은 꺼내지 않고 수임료는 최소의 금액이라고 하면서 천을 요구했다. 너무 적은 액수를 부르는 사돈이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또다시 나왔다. 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사람이 있었다. 법원에서 찬 산지, 검사지 잘 모르지만 운전수를 하는 친구였다.
“내가 진작 왜 친구 대희를 생각해 내지 못했지?.......”
언젠가 토목회사 재직 시 직원이 시골을 내려가서 크게 싸워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전치 4주가 넘는 폭행 사건이었다. 그때 그 친구에게 부탁했더니 자기 영감에게 이야기해 본다고 하고서는 다음 날 당장같이 내려가서 직원을 데리고 온 일이 있었던 그 친구였다.
“여보, 전화기 이리 줘!”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기를 자주 놓고 오는 바람에 항상 아내에게 전화기를 맡기는 습관이 있었다. 일 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이 전화기가 벌써 3번째 다시 산 전화기였다.
“어이, 친구야, 내 사건 알지?”
“그래, 어떻게 됐니?”
“이심에서 패소했다, 너 대법원 판사와 교분이 많은 변호사 알지?”
“ 안다만, 왜?”
“빨리 나오 그라, 같이 가자, 어서.......”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한국에서도 세 째 가라면 서러울 TPY 로펌 사를 찾아간 것이다. 변호사는 고생이란 고자도 모르고 자란 사람 같아 보였다. 흰 피부에 얇은 입술은 조용하면서도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으며 영리하게 생긴 굵은 눈동자는 자신의 의사를 상대가 신임하도록 만들었다. 현의 상황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사건 담당 대법관과 형님, 아우 하는 사이라며 현을 안심시켰다. 수임료도 삼천에 성공보수 칠천을 요구했다. 거기다 부가세 10%까지. 현은 수임료 이천에 성공보수 팔천을 흥정했지만 그는 뱉은 말에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현은 점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우선 수임료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달라하고 한 푼도 깎으려 들지 않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친구는
“인터넷을 쳐 보면 알겠지만, 저 양반 고법 판사 출신 변호사야, 어제도 대법관 00과 골프를 치고 왔다고 하잖니, 한 번 믿고 마음 편하게 결과를 지켜보거라.”
하고 헤어지고 두세 차례 서류를 해다 주느라 변호사를 만났다. 며칠 전에도 골프장에서 대법관을 만났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변호사의 말에 현은 10%의 승소 기대를 90%에 걸었다.
수임 계약서를 쓰고 나온 그날 현과 헤어진 대희는 바로 돌아서서 로펌 사에 다시 들려 10%인 소개료 삼백을 받아 챙겼다.
5
현의 머릿속은 이 생각 저 생각 분하고 복잡했지만 마음은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놈의 법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 놓은 거야! “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조카와 돈 문제를 놓고 따지자니 더욱 망막했다. 이미 조카는 캄보디아의 사업을 핑계로 자기 몫은 다 찾아갔다. 조카의 캄보디아 석산개발사업도 중국인들의 인해전술 때문에 위기에 처해있다고 했다.
일심 변호사비와 성공보수 천오백에 이심 천오백, 삼심 삼천삼백에 3년간 경비가 줄잡아 이천, 박 영희도 가만히 있을까? 줄잡아 일억에 반인 오천을 조카에게 청구해야 하는데 석산개발에 처박은 돈 때문에 오히려 돈이 있으면 더 줘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이를 청구하기에 막막했다. 승소할 줄 알고 장부 하나 변변히 기록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바보스럽게도 느껴졌다.
삼척동자도 계약서만 보면 다 아는 매매 사건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똑똑하다는 판사들이 모를 턱이 있었겠는가. 거기다가 일심 판사가 현명하게 내린 판결을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자필 공증 인증서를 인정하여 심리 한 번 없이 피고의 손을 들어준 이심 판사는 숙맥이란 말인가. 또 대법관이라는 사람들은 뭘 들여다보고 판결을 내리기에 진실을 기각시킨단 말인가.
며칠 뒤 현은 박영희가 공탁한 토지 대금을 찾으러 xx 지원 공탁기로 갔다. 그러나 박영희가 재판에 들어간 비용을 전제로 공탁금을 가압류해 놓았기 때문에 공탁금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다. 또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끓어올랐다. 무엇인가 치고 싶었지만 법이 겁이 나서 칠 수가 없었다. 흥분해서 법원 문을 막 나서려는데
“사돈, 어디 갔다 오십니까?”
변호사로 있는 사돈의 사촌 동생을 만났다. 현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반가웠다.
“아이고 사돈, 오랜만입니다. 여기는 웬일로 오셨습니까?.......”
사촌 형인 변호사가 법무법인에 근무하기 전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할 때 사무장으로 있었다는 것을 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식당으로 끌고 갔다. 앉자마자 현은 지금까지 있었던 억울한 사연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맡기세요.”
크고 듬직한 몸에 크고 검은 눈, 말 한마디도 거리낌 없이 부드럽게 하는 그가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현은 얼른 지갑에서 삼백을 꺼내 사돈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적지만 경비라도.......”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하면서 헤어졌다. 한 달이 지났지만 소식이 감감했다. 몇 번을 전화해도 도무지 받지도 않았다. 답답해서 변호사를 하는 사돈에게 전화를 걸어 사촌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눈치를 챈 모양이다.
“골치를 꽤 썩입니다, 사업한다고 돌아다니더니 얼마 전에 부도를 내고....... 요즘 소식이 없어요, 왜? 무슨 일이 있나요?”
결국 사돈에게도 당했다. 수화기를 제대로 내려놓지 못한 모양이다.
“뚜뚜.......”
길게 소리가 울렸지만 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허망하고 분해서 혼자 중얼거렸다.
“망할 년, 어차피 내놓을 돈, 제때 주면 어디가 덧나나? 내 돈만 도둑놈들에게 퍼다 주게 만들고 지는 땅값 올라 돈 벌었다고 뒤로 쏙 빠져? 천하에 둘도 없는 도둑년, 몇 푼 얻어먹자고 없는 말을 만들어 양심을 팔아먹은 진형 철도 도둑놈, 공정하게 판결하라고 나라가 판결을 맡긴 판사도 도둑놈, 변론 맡은 박 변호사도 도둑놈, 대법관과 형님 아우 사이라고 속이고 삼천이란 돈을 털도 뽑지 않고 통째로 쳐 먹은 로펌사 변호사도 도둑놈, 도둑놈을 소개한 친구도 도둑놈, 틀린 판사 판결을 옳다고 기각시킨 대법관도 도둑놈, 사돈도 도둑놈, 조카도 도둑놈......”
주위를 돌아보니 한 놈도 도둑놈이 아닌 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잃고 깨달은 것이지만 자기 자신만 믿고 도둑놈들에게 퍼다 준 돈이 생각할수록 아깝고 고기심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