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1
아침식사를 마친 영준은 식탁을 행주질하고 있는 아내가 설거지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출근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영준을 아내 혜림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당신 오늘 출근 안 해?”
하고 답답하고 궁금해서 도저히 못 참겠는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요즘은 초등학교서부터 고등학교, 직장, 종친회 등 한주 내내 하루 건너 한 번씩 술자리를 하는 연말이다. 오늘 저녁에도 영준은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아내는 술을 겨우 한 모금 정도는 입에 대지만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너무 잦은 술자리 모임 탓에 아내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준은 평소에는 집안에서 조용하고 말이 별로 없었다.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다. 생전에 집안에서는 두 어른 모두 할 말만 했었으니 나이가 들면서 행동 하나에서 열까지 그 역시 어른들과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다. 그런 그가 모임을 끝내고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면 평소 때와 같이 조용히 씻고 잠자리에 들면 별일이야 있겠는가. 술을 한잔하고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손발을 씻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이젠 만성이 되어 그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디에서 배워 왔는지 애들이 보든 말든 냄새 맡기가 죽도록 역겨운 술 냄새를 가까이서 푹푹 풍기면서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그녀로서는 아주 질색이었다.
아들이 장학금을 탄다 해도 칭찬 한번 하지 않고 그저 소 웃음 짓듯 피식 멋쩍게 웃고 마는 성격인 그가 술을 마신 날이면 조용히 공부하는 아이들 방에 들어가서 예쁘고 대견스럽다고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난리를 쳤다.
옷은 벗어 옷장 안에 걸어 넣는 법이 없었다. 윗도리는 소파에 바지와 양말은 거실바닥에 넓러 벗어 놓는다.
이런 남편의 술버릇을 애초부터 고치겠다며 아내 혜림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치우라고 단 한 번도 정리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영준이 스스로 아침에 일어 나 치울 때까지 벗은 그대로 놓아둔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껏 술이 취해 들어와서 그 버릇이 달라진 것 또한 단 한 번도 없었고 아내 혜림도 정리해 준 적이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잠자다가 갈증에 못 이겨 새벽녘에 일어나 물 한 모금 들이키다 보면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옷가지를 옷장 속에 주섬주섬 걸고 정리한 후 혹 아내가 깨서 잔소리나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아내 옆으로 누워 다시 잠을 청하곤 해 왔었다.
여하튼 아내는 영준자신이 술을 먹는다면 질색을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나 오늘 술자리 약속 있어, 늦을지 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역시, 그러면 그렇지.......”
아내는 영준이가 술 마시는 일이 아니면 그럴 턱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리고 영준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판에 박힌 듯 짜증 섞인 말투로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당신은 술자리에 가면 엉덩이가 너무 질겨! 남들처럼 일찍 일어나 오면 오죽 좋아? 술 마시는 것도 그래, 무슨 모임 때 보면 다른 사람들은 술잔 받아 조금씩 나눠 먹는데 유독 당신만 홀짝홀짝 한 번에 비우니 취하지 않고 견딜 재간이 있어, 무슨 술이 그렇게 좋은지 원, "
사실 그랬다. 그의 청년기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막걸리를 마셨기 때문에 그도 당연히 막걸리로 술을 배웠다. 주전자로 대접이나 사발에 한잔 가득히 따른 막걸리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손가락으로 쭉 찢은 김치 한 잎을 안주 삼는 그런 농부들이나 서민들의 멋을 몸에 익힌 그였다. 그런 그가 작은 소주잔을 어찌 두 번 꺾어 마시겠는가. 그런데 나이 탓인지 요사이 모임 때면 그때 그 시절에 대작을 하던 친구들조차도 소주 한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에 대었다가 몇 번씩 내려놓는다. 그는 쫌 쫌 한 그런 친구를 보면 도저히 참지를 못했다. 얼른 자기의 잔을 비우고 그 앞에다 잔을 권하고
“이 사람아 빨리 한잔 마시고 주게!”
하며 독촉을 했다. 분명히 그도 남편의 건강을 생각한답시고 바가지를 긁는 그의 아내 잔소리에 못 이겨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혹 동석한 자리에서 영준에게 술잔이 돌면 술 마시지 말라고 온갖 신호를 다 보내는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영준은 그녀를 보고도 못 본 듯 얼른 술잔을 비우고 권하는 것은 어쩌면 아내인 혜림에 대한 반항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술이 먼저 취할 수밖에 없었다.
"참, 당신도,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을 마시는 거지 내가 무슨 알코올 중독자야!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게, 당신은 무슨 말을 해도 꼭 그렇게 남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말만 골라서 해. 어쨌든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아이고, 언제는 늦게 온다고 말하고 늦었나?”
영준은 행주를 빨아 헹구면서 말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얄미운 아내의 뒤통수를 한대 갈겨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앉아서 오줌 싸는 계집년들이라고는, 보이는 게 없어서 원."
그는 스스로 여자에 대한 묘한 억측을 갖고 있었다. 작은 일을 볼 때 남자들은 서서보지만 여자들은 앉아서 보는 것 자체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보는 시야에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속으로 몇 번 혀를 끌끌 차면서 얼른 이 자리를 뜨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닫는 문소리에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하기 무섭게 일부러 아내가 들으라는 듯이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아파트의 열어놓은 계단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차고 시원한 겨울바람이 막힌 숨통을 그나마 튀어 주고 있었다. 지하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위해 버튼을 누른 뒤 잠시의 공백을 심심하다는 듯이 눈에 익은 계단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다. 겨울이라 아들이 타지 않고 비상계단 난간에 묶어둔 자전거 타이어가 어제도 오늘도 바람이 빠져 있는 상태 그대로 있었다.
“바람 빠진 타이어?”
그는 지금 자신이 처한 마음 같은 생각이 들어 멋쩍게 웃어 보았다.
“아니야, 내 건강을 위해 하는 소리지! 술 먹고 길거리에 쓰러지든 말든 어느 누가 말 한마디 챙겨주는 이가 아내 말고 어디에 있더냐, 이젠 술 좀 알맞게 마시고 들어 와서 오늘 저녁에는 아내를 달래줘야지! ”
술을 먹고 취해 남의 속이야 탈이 나든 말든 열심히 권하는 우리들 음주문화를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아내의 마음 씀이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내를 그렇게 미워했던 순간이 고마운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특별한 경계선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엘리베이터가 영준의 앞에서 텅 빈 공간의 입을 벌렸을 때 즈음 한결 마음은 가볍고 상쾌해지고 있었다.
2
이제는 늙다리 동창들의 모임이라 모두들 자식과 마누라의 이야기로 화제를 피우고 있었다.
“야, 예전에는 마누라를 휘어잡고 살았는데 말이야, 요사이는 고함을 쳐도 콧방귀도 안 뀌니....... 이거 남자 꼴이 말이 아니야.......”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그 옛날 하늘같이 대해주던 마누라가 이젠 늙다리라고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자식들만 챙기니 앞으로는 밥 한 그릇 제대로 얻어먹겠어? 장가를 한 번 더 가든지 원.”
“흐흐,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은 못하겠어!”
“이거 원 자식새끼는 술을 먹고 들어오면 밥 챙겨 준다, 잠자리 봐준다, 난리 법석을 떨면서 내가 술 취해 오면 잔소리뿐 인걸, 에구,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나는 너무 열받아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야, 이놈의 할망구야! 할망구 앓아누우면 며칠은 자식새끼가 옆에서 병간호를 할지 모르지만 결국 할망구 옆에는 나 밖에 없어, 내 말 알아들어?, 그래, 나중에 두고 보면 알 거야! 할망구 옆에 누가 지킬지 두고 보라고.......�해도 잠깐 뿐이야, 역시 배 아파 낳은 어미는 어쩔 수 없어.”
“하, 하, 하.”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모두 아내의 구속력의 범위를 벋어 난 이 순간을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저께 일이었다. 둘째 녀석이 학교에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새벽에 집에 들어왔다. 잠귀가 밝은 아내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술 취한 아들을 챙기는 꼴이란 정말이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아내는 화장실에서 숨넘어가듯 하얀 표정으로 토하는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고 나자 똥물까지 기워낸 녀석이 엉금엉금 기어서 자기 방에 들어가 나자빠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토한 배설물을 깨끗이 닦은 아내는 어디에 숨겨 두었던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꿀단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꿀물에 얼음을 채운 컵을 쟁반에 받쳐 들고 아들 방으로 쪼르륵 향했다. 축 늘어져 자빠진 아들의 옷을 벗겨 침대 위에 눕힌 후 찬 수건으로 아들의 얼굴을 닦아 주고
“얘야, 꿀물 좀 마셔라! 마시면 속이 좀 풀릴 게다. 응?”
하고 사정하다 시피해도 아들 녀석이 손을 저으며 끙끙거리기만 하자 무릎 위에 다 큰 녀석의 머리를 앉히고 꿀물을 먹였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아내가 법석을 떨어 되니 영준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들이 잠이 들자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난 아내는 영준을 깨워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애가 속이 쓰려 밤새 잠을 못 잔 것 같으니 당신이 나가서 약국에 좀 다녀와요!”
출근길에 버스를 타려고 동네 앞을 수십 년간 다녀 봤지만 한 번도 약국 문을 아침 일찍 연 것을 보지 못한 그였다. 그는 은행과 약국은 9시가 넘어야 문을 여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 시간에 약국 문을 연 곳이 어데 있다고 약국에 가라고 해.”
“차로 나가서 다녀 봐요, 문 연 곳이 있을지 몰라요.”
“허 그것 참.”
그는 약국에 가려고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할 말을 잊고 뻔뻔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침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대로 다녀보니 아침 이른 시간에도 문을 연 약국이 있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흰 가운을 차려입은 사내가 진열대 앞으로 다가와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묻자 영준은 마치 자신이 술을 먹어 속이 쓰린 것처럼 약간 얼굴을 찡그리고 한 손을 배에 되고서
“약주를 많이 해서, 밤새 토해서 속이 쓰리고, 머리도 아프고, 설사도 하고, 약 좀 주실래요.”
영준의 설명을 들은 약사는 느린 걸음으로 슬리퍼를 끌면서 진열장에서 드링크제 한 병과 노란 알약 두 개, 한약인 뜻한 약봉지 한 개를 꺼내면서
“여기서 마시고 갈 거예요?”
하고 묻는다.
“가져갈 겁니다. 얼맙니까?”
하자 봉투에 약과 약병을 넣으면서 오천 원을 내라고 한다. 그는 며칠 전에 회사 근처에서 비슷한 약과 드링크제를 샀을 때보다 무척 비싸다고 생각했다. “젠장, 며칠 전에 삼천 원을 준 것 같은데.......”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오천 원짜리를 던지듯이 진열대에 놓고 약방문을 아무렇게나 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침부터 바가지를 쓴 기분이었으나 역시 남들이 열지 않는 시간에 문을 열고 약을 파는 대가라고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렸다.
그는 아들 녀석 덕에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던 지난 일을 생각하고 술을 마시며 함께 웃었다. 역시 자기 아내만 유독 잔소리에 바가지를 긁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서민들이 사는 지금의 어느 집이든 다 사는 것이 그렇고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야, 우리 마누라는 밍큰가 뭔가 사달라고 난리 쳐서 뭐라고 했는지 아니?”
“사 줬어?”
“야 인마, 밍크 코드가 얼만데 사줘!”
“너 돈 많이 벌었으니 한 벌 사주지 그래!”
“야, 영준아, 너도 결혼한 달이 나와 같잖아, 아마 네가 나보다 결혼 며칠 빨리 했지?”
“결혼기념일? 옳아, 자네와 결혼한 달이 같았지!”
“넌 결혼기념일 잘 챙기냐?”
“그래,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지! 그래, 그래서 아침에 아내가 짜증을 냈구나!”
영준은 속으로 이제라도 안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글쎄 말이야, 마누라 말이 이번 20일이 결혼 30년이라나, 아직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챙겨 주지 못했다고 이번에 밍크 코드 한 벌 해달라고 떼를 쓰지 뭔가, 그래서 내 말이 ‘이 사람아! 당신 한 사람 따뜻하자고 밍크 코드 한 벌 만드는데 밍크 몇 마리를 희생시켜야 하는지 아나?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 하고 한 마디하고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
영준은 아침에 아내와 나눴던 말이 생각이 나서 작정하고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내가 바라는 대로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고 술자리를 떠난 시간도 빨랐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종로2가역 입구에 있는 보석상으로 들어갔다. 밝은 불빛이 하얀 진열대의 케이스에 꽂혀 있는 보석들을 한층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큰맘 먹고 다이아가 박혀있는 예쁜 반지를 아내에게 선물하기로 작정했다.
“10개월 할부로 해 주세요.”
하고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외투 안 양복 포켓 깊숙이 포장한 반지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오늘 친구들과 모임이 없었더라면 결혼기념일을 까맣게 잊고 또 한해를 원망 속으로 보낼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돈은 썼지만 마음은 무척 즐거웠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집안에서 오손 도손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깜짝 선물로 아내에게 반지를 내놓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다. 입구에 오르면서 승합차 단말기에 카드 끝부분을 잡고 살짝 가져다 대었다. 혹 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버스카드가 오손되지 않게 비닐 케이스로 잘 싸서 보관하고 있었다. 언제인가 카드를 단말기에 잘못 접속하는 바람에 카드가 파손되어 생돈 이천 원을 물고 다시 발급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로 돈을 물면 도둑맞은 것 같아 무척 억울하고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단말기 화면은 카드를 바로 인식하고 신통하게도 소유자인 자신도 알 수 없었던 카드 잔액 980원을 검은 바탕에 노란 전자글로 찍어 냈다. 그리고 제법 카랑카랑한 녹음된 여자 목소리가 좌석으로 향하는 등 뒤로 승객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귓전을 두드렸다.
"다음 승차 시 카드충전이 필요합니다."
"망할 것들 타는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봐 사람들이 모두 듣게 녹음으로 떠들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평소 이 소리를 듣게 되면 남의 일이라 무심하게 듣고 넘겼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향한 이 소리가 들리면 왠지 주변 승객들이 텅 빈 호주머니를 알아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나마 얼굴이 달아 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승객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는 창문 바로 가까이 있는 경로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가슴을 당겨 안주머니에 있는 반지의 촉감을 확인하면서 양손까락을 끼고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무엇인가 아내를 즐겁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어깨를 의자에 기대며 시선을 차창 밖으로 향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들이 그의 시야를 영화 필름같이 지나쳤다. 호프집, 식당, 편의점, 제과점, 복덕방, 전화기 판매점인 KT, KTF.
별로 다니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한적한 도로지만 영락없이 가게들은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케이크를 살까? 아니야,”
아들 생일 때 아들 여자 친구가 보낸 케이크가 생일이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냉장고 위 칸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차는 다시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무엇을 사야 할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잠시 살피면서 버스를 내려섰다. 버스가 떠난 바로 건너편 횡단보도를 반쯤 걸치고 시동을 끈 채 백열등을 밝힌 조그마한 봉고트럭 두 대가 눈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대는 이십 대 중반인 듯한 두 내외가 소주잔을 든 사 오명에 둘려 싸여 어묵이며 국수, 그리고 간단한 안주와 함께 바쁘게 팔고 있었고 다른 한대는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박스 안에다 칸칸이 꼬챙이에 통닭을 줄줄이 꽂아 놓고 장작불로 굽어서 팔고 있었다.
골고루 굽혀지라고 통닭을 꽂은 꼬챙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고 맨 아랫단에 꽂혀 있는 발갛게 익은 통닭 몇 마리에서 기름 방울이 지글거리면서 장작불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포장 위에는
“한 마리에 육천 원, 두 마리에 구천 구백 원”
이라고 쓴 흰 바탕에 붉은 글씨의 간판이 가로등 불빛에 더욱 선명하게 그의 눈앞에 들어왔다.
그는 바지 포켓에 이만 원을 꺼내 어묵 삼천 원 어치와 통닭 두 마리를 샀다. 그리고는 가게에 들러 페트병에 든 맥주 한 병을 샀다. 술과 안주를 놓고 아내와 다정하게 저녁을 보낼 일을 상상하니 순간이나마 아내가 복스럽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에 반지를 선물 받고 깜짝 놀랄 아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반가이 맞아줄 아내의 미소를 상상하고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3
남편 영준이가 나가고 설거지를 마친 아내는 다 돌린 세탁기 빨래를 두 번이나 행구어서 탈수기에 넣은 후 청소를 시작했다. 매일 하루 한번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는데도 무슨 먼지가 그렇게 많은지 거실 바닥을 반도 닦지 않았는데 걸레가 새까맣다. 그녀는 걸레를 신경질적으로 화장실 바닥에 던져 버리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고무장갑 속에서 축축해진 면장갑을 벗어 들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힘들어!"
허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장남이 밤늦도록 T.V 를 보다 소파 위에 그대로 던져둔 엉덩이 밑에 깔린 리모컨을 빼내 들고 빨간 버튼을 눌렸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머리 까지고 잘 차려입은 눈에 익은 정치인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망할 자식들, 모두가 죽겠다고 난리들인데 저 혼자 이만 불 시대니 뭐니 떠들어!”
채널 버튼을 계속 눌렀지만 볼만한 프로가 없었다. 텔레비전 스위치를 꺼버린 그녀는 다시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로 향했다.
" 정말이지 청소 밖에 그럴듯한 할 일이 지금은 없는 것일까!"
걸레를 빨고 남은 바닥을 훔쳤다. 밤새도록 졸업 논문을 쓰다가 새벽에 잠든 둘째가 하반신은 다 들어 내놓고 상반신만 이불을 감고 정신없이 잠들고 있었다.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책에 줄을 치며 공부하던 시대에 익숙한 그녀로서 밤새도록 컴퓨터 앞에 있다가 해가 중천에 떠도 일어날 줄 모르고 잠을 자는 아들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컴퓨터를 만지는 자식이 공부한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책이며 복사 용지가 빈틈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잠자는 사이를 대충 걸레로 훔치고 주방으로 갔다. 커피를 한잔 타서는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제 동창회 친구들의 말이 귓전에 멤 돌았다.
강남에 있는 한식 식당인 고향집은 그녀의 동창들이 매달 모이는 단골 장소였다. 주차장을 겸비한 아담한 식당인 고향집은 동창회장 민규의 고등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초등학교 재경 동창회원이 서른 명이 되다 보니 동창회가 있는 날이면 방 가운데 미닫이문을 철거하고 두 칸 방을 합쳐서 테이블을 길게 붙여야 동창 모두가 앉을 수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한다거나 지난 이야기를 하느라 한참 어수선한 자리를 총무인 순철이가 진정시키고선
“자, 자, 자, 여러분 잠시 조용하시고....... 애....... 먼저 우리 동창 회원의 기쁜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대 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인 명숙 회원의 둘째 따님이 이번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모두 축하의 박수를 보냅시다.”
“야, 축하해!”
서로 한 마디씩 축하의 인사를 나누며 박수를 보내는 동창들 앞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하게 인사하는 명숙이의 모습은 밉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외과 의사인 남편을 둔 그녀는 부유한 생활과는 달리 항시 검소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명숙아, 축하해! 자, 술 한 잔 받아....... “
사순이는 마시던 소주잔 귀퉁이를 휴지로 닦으면서 동창들 등 뒤로 어렵사리 다가와서 명숙이에게 술잔을 건넸다. 때를 같이해서 순철이도 사순이를 향해
"너 남편이 지난번에 강남에서 부동산 샀다는 거 아마 수십억은 벌었겠지?"
아무도 모르는 동창생들의 사실을 총무인 순철이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순철이는 학교 성적이 우수한 덕분에 학교장의 추천으로 모 대기업 총무부에서 일을 했다. 총무부란 회사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는 곳이다. 대기업의 회사 살림살이는 회장의 개인적인 가정 살림살이에도 무척 취중을 해야 한다. 그가 담당했던 일이 바로 회장의 회사와 가정과의 조화였다. 그의 직장동료 모두가 명문 대학 출신이라 자신의 학벌이 주변 동료에게 뒤처진 것을 깊이 실감한 그였다. 그는 남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요일도 가리지 않고 회장 및 회장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서슴없이 했었다. 그는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회사에 온 정력을 다해 정진했다. 덕분에 고졸 출신으로 총무부장까지 역임하면서 명문대 출신의 신입사원의 교육까지도 담당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당시에 회장의 일정을 꼼꼼히 적고 주변 정보를 깨알같이 파악하고 있었던 습관을 지금 동창회에서도 발휘하고 있었다. 순철이는 동창회원들의 주소, 직업, 전화번호를 수첩에 빠짐없이 적어서 시간이 나면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서 안부를 묻거나 해서 동태를 수시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창회 총무 직을 맡은 지 3년이 되었는데도 동창회장은 한번 연임 후 교체되었지만 누구 하나 총무를 교체하자는 사람은 없었다.
사순이는 초등학교 때만 해도 찢어지게 가난했었다. 그녀의 부모는 아들을 낳으려고 내리 딸만 일곱을 낳은 끝에 아들을 낳은 집안의 넷째 딸이었다. 아이들 이름도 첫째가 일순이, 둘째가 이순이, 막내딸이 칠순이 그렇게 순서대로 숫자 뒤에 순자만 붙여 이름을 부르기 쉽게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로 그의 어머니는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 왔었다. 가난한 딸부자 집 넷째 딸인 그녀는 천덕꾸러기처럼 살아 어린 시절에는 속옷 한 벌 제대로 입은 것을 본 일이 없었던 그녀였다. 생긴 것도 가관이 아니었다. 키는 몽땅 짜리 한데 뭘 먹고살았는지 밀면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살이 쪄서는 굴러다닐 정도로 똥똥하고 못 생긴 그녀였다. 학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방직 공장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그녀가 무슨 팔자가 늘어졌는지 부동산 하는 신랑을 만나 사순이네가 한국에서 돈이란 돈은 모두 긁어모았다는 소문까지 들리기도 했었다. 그녀의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밍크코트는 재료는 남의 반도 들지 않았을 법한데 이천인가 삼천인가 주고 샀다며 자랑이 늘어졌고, 목이며 손 까락마다 보석을 감고 다니는 꼴이 인조털 코트에 가짜 보석 반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순이는 돈도 많이 벌었으니 이번에는 찬조금도 내야지?”
하고 총무인 순철이가 은근하게 말을 던지자
“아 내지! 못 낼 것 없지!”
하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 돌아간 그녀는 해외여행 가서 사 왔다는 명품인 자기 머리통보다 큰 구찌 가방 속에서 새까만 지갑을 꺼내 누런 수표 한 장을 서슴없이 순철에게 건넨다.
그런데 혜림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동창들의 자랑만 듣고 고기나 먹고 그저 비위나 맞추며 바라보고 웃기만 하다 돌아온 것이 너무 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굴이 못났어, 몸매가 못났어! 왜 사순이 같은 년에게 까지 자존심 상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가 남편 못 만난 탓이라고 생각하니 남편이고 자식이고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커피를 마저 비웠다. 빈 커피 잔 바닥 한구석에 프림과 함께 뭉쳐 있는 커피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꼭 남편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지나친 비유 같아 좀은 미안해서 혼자 멋쩍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하루 한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달리 마땅히 자신의 무료한 공백을 메워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커피를 마시기로 작정했다. 남편이 항상 봉천동 변두리 다방 커피라고 놀려대던 “투 투 쓰리” 배합법인 커피, 프림, 설탕을 각각 두 스푼을 넣고 커피포트에 남아 있는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이지 커피 덩어리가 뭉치지 않게 잘 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만족하다는 듯이 살짝 마신 커피 잔을 입에서 떼며 조심스럽게 소파로 가서 앉았다. 기름기가 감돌던 구수하고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에 와닿는다.
"이 눔의 영감 들어오기만 해 봐라! 밍크코드는 못해줄 망정 돈이라도 제대로 벌어 와야지!"
하고 한참을 벼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는 수화기를 들었다.
"응, 나야! 별일 없지....... 우리 골프 투어 가는데 한 일주일 걸릴 거야! 우리 시골 다니러 가는 일 며칠 미루자!'
하면서 언니 내외가 이번에도 해외 나들이를 간단다. 대충 얼버무려 답하고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바로 또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하고 수화기를 들고 힘없이 말하자
"나야! 오늘 집에 있니? 언니한테서 전화 왔지! 툭하며 해외여행, 우리도 한번 가야지 원, 근데 이번에 사돈댁에서 우리 며느리 집사라고 x억을 보냈어! 참 고맙지! 그렇지, 그래서."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다. 하루 종일 열받는 일뿐이었다.
4
"여보! 나왔어!"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의 꼴이 정말이지 밥맛이다. 저렇게 한심한 남자를 뭐가 좋다고 널름 결혼을 승낙했는지 모른다.
"여보, 화났어?"
은근한 남편의 말에 오히려 짜증이 날 정도로 보기 싫다.
"도대체 당신은 뭐 하고 다녀요!"
하고 백 고함 한번 지르고 몸을 휙 돌렸다.
"얼씨구 이놈의 할망구 봤나!"
하고 다시 한번 은근한 마음으로 접근을 해 봤다.
"아이고, 어디 좋은데 있는지 허구한 날 돈도 못 벌며 어디에 그렇게 돌아다니긴, 애새끼들 모두 지 에빌 닮아서......."
"당신, 왜 그래!"
"아이 듣기 싫어요! 빨리 씻기나 해요!"
하고는 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방문을 닫고 훌쩍 들어가 버렸다. 기가 막혔다. 단 몇 초 전만 해도 아내를 생각하고 행복해했던 그 순간이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망할 년의 할망구!"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영준도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방문을 열고 안방에 들어가며 옷을 옷장에다 걸면서 말을 붙였다.
"도대체 당신은 밖에 갔다 오면 한 번도 옷을 털고 거는 법이 없어!"
"이 여편네가 동문서답하는 거야 뭐야!"
그는 파자마의 윗도리에 팔을 끼우면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감고 있는 아내의 흐트러진 뒷머리를 향해 시비를 붙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 그만 싸우세요!"
하고 아들이 TV 볼륨을 크게 올리고는 한마디 던졌다.
"이런 여편네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편네야!"
"얼씨구, 어디 좋은 년이 있는 모양이지! 주제에!"
"주제에? 너 지금 주제라고 했냐?"
"그래, 주제라고 했다. 어쩔래! “
“에잇, 빌어먹을.”
하고 소리치며 그는 성질이 나서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거칠게 던져 버렸다.
“흥!”
숱한 부부 싸움 경험으로 만성이 되어버린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콧방귀만 뀌었다. 화장대에서 잘 정렬되어 있던 화장품 병들이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젠 부수기까지, 잘하는 짓이다. 애들 앞에서......."
애꿎은 비싼 화장품이 몇 개 박살이 났다. 방금 사 온 불그스름하게 잘 익은 통닭 한 마리는 뱃속 사이로 허연 찹쌀 덩어리를 삐죽이 내밀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뱃속에 쌓인 밥덩이와 당귀인가 뭔가 하는 약초뿌리, 깐 밤알 두 조각까지 몽땅 토해내고선 장롱 앞으로 시골 디딜방아처럼 콕 쳐 박혀 양다리를 넙죽이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퍽 터져버린 비닐봉지 옆에 어묵 덩어리가 흩어져 고여 있는 국물 위로 모락모락 김을 올리고 있었다.
“쳇, 30년이 넘도록 남편이나 자식이나 결혼기념일 한 번 챙기기는커녕 기억이라도 하는 걸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이불을 다시 한번 머리 위까지 걷어 올리면서 아내의 입에선 들릴 듯 말듯이 한마디 중얼거린다. 이제야 영준은 말다툼하다 잊어버린 윗도리 안쪽 포켓에 간직한 반지가 생각이 났다. 약이 오른 눈으로 얄미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콧방귀를 뀌면서 중얼거렸다.
“흥, 결혼기념일이라고?”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갔던 카페 마담 전여사가 떠올랐다. 언제인가 영준의 아내 못지않게 긴 중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내 손에 이 예쁜 반지를 끼워준 사람이 그리워요. 살아 있을 때 잘해줄 것을.”
하며 쓸쓸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을 이 순간에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 반지를 줄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