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비싼 대가
1
태양이 서쪽 산꼭대기를 넘어가기 무섭게 차갑고 세찬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둠과 추위는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약재상 손님들을 청소하듯이 쫓아 버렸고 이제 몇 남지 않은 손님들만 이곳저곳 약재상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12월도 중순이라 밤은 제법 차가운 날씨였다.
순동으로부터 돈을 받기로 약조한 흥수는 간통현장을 잡기 위해 가로등 뒤편 골목길에다 차를 대기시켜 놓고 약재상이 보이는 먼발치의 어두운 골목길에 서서 한 사내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추워서 원, 오늘은 꼭 꼬리를 잡아야지!”
건너편 약재상 안에서 앞머리가 훌떡 벗겨진 중년 사내에게 점원인 듯한 사내 둘이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하고 나와 가로등 뒷골목을 지나쳤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가던 그들이 어둠 속에서 서성이고 있는 흥수를 쳐다보고 수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바람이 한 번 세차게 불어왔다. 약재상 사내를 주시하던 흥수는 몸이 너무 추워서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어깨를 으쓱하고 움츠리더니 몸을 앞뒤로 몇 번 젖히고 발을 수차례 동동 굴리다가 생각을 돌려 먹었다. 바지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잠바 포켓에 다시 모아 넣고 추위를 아직은 참을 수 있다는 듯이 다시 그 사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이곳저곳 가게 문이 하나둘씩 닫혀 가고 있었다. 대머리는 아직 양쪽 사타구니로 난로를 낀 채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머리를 주시하던 흥수는 잠시 소매 깃을 걷어 올리고 손목시계를 봤다. 찬바람은 걷어 올린 소매사이로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이제 시간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가게를 비추던 희미한 백열등이 하나둘씩 꺼져가고 있었다. 상가 주변은 이제 몇몇 가게만이 을씨년스럽게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거리에는 누군가가 버리고 간 신문지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어두운 밤거리를 날고 있었다.
한참이나 누구를 찾듯이 약재상 주변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던 대머리는 그때서야 밖에 진열되어 있는 약재가 담긴 자루를 하나둘씩 안으로 들여놓고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는 밖에 켜져 있는 백열등을 끄고 늘어뜨린 전선을 챙겨 가게 안벽에 박혀있는 못에다 걸었다. 그리고는 옆에 포개어 세워둔 가게 문을 하나씩 닫고는 왼쪽 맨 위에 있는 고리에 자물쇠를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축 처진 가죽 잠바가 비썩 마르고 훤칠한 키의 그를 더욱 애처롭게 하고 앞으로 벗겨진 그의 머리는 주위를 한층 더 춥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이나 한 듯 옷을 툭툭 털고 어둠이 깔린 약재상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더니 차들이 질주하는 약재상 입구에서 발길을 멈췄다.
청량리와 동대문에서 오고 가는 자동차 물결에 그는 눈이 부시는 듯 마주 오는 불빛을 한 손으로 가리면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의 뒤를 따라온 흥수는 승용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그리고 일행과 함께 방금 가게 문을 닫고 온 대머리가 택시를 타고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대머리는 곧 택시를 잡아타고 출발했다.
자동차를 미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어제의 경험으로 흥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제는 다른 차 한 대를 사이에 두고 대머리가 탄 택시를 미행하기 시작했었다.
대머리가 탄 택시가 제기동 사거리를 막 건너자 신호가 바뀌어 버렸고 순간 대머리가 탄 택시도 막 건너려고 속력을 내자 흥수도 신호를 위반하면서 속력을 내려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순간 갑자기 흥수 앞에 달리려던 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그 차의 뒤꽁무니를 박고 말았다.
다행히 급제동을 했기에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어제의 일로 미행이 실패로 끝나버려 일행과 함께 오늘은 충분한 대책을 의논했던 터이다.
그가 탄 택시는 어제처럼 제기동 사거리를 지났다. 신설동, 동대문을 지난 택시가 갑자기 종로 5가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동대문으로 향했다.
"아니, 다시 동대문으로 향하잖아?......."
운전을 하고 있던 흥수가 의아해서 건너편 택시의 대머리를 흘깃 보며 이상하다는 듯 일행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조심해요, 차를 너무 가까이 붙이면 들켜요! "
차가 택시 가까이 다가 가려하자 운전석 의자 앞으로 몸을 바짝 잡아당기며 운전석 뒤의 사내가 주의를 준다.
"우리가 미행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설마......."
"아니야, 오던 곳을 되돌아가는 것을 보면 조심성이 제법 있는 사람이야, 조심해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평소에 미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으니깐 저렇게 행동하겠지요?"
옆에 점잖게 앉아 있던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흥수에게 미행을 부탁한 큰 코에 얇은 입술의 대머리인 권 순동이었다.
"저양반이 여러 번 다녀도 아무 일 없었으니 이젠 안심하고 가는 거겠지요."
하고 흥수는 말을 받는다.
"아마 우리가 뒤따르는 것을 꿈에도 모를 거야......"
출입문이 바로 바라보이는 다방 난로 옆에 앉아 보리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권 순동은 손 여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른 아침을 먹은 탓에 정오가 되지 않았는데도 배가 실쭉해서 대신 연신 보리차를 마시고 있었다.
기다리기가 꽤나 심심했던 모양이다. 그는 어제 쓰고 남은 돈이 얼마인지 궁금했다. 양복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쓰다 남은 돈을 세어본다. 촉감이 두툼하고 빳빳하여 만 원권이라고 생각되는 접힌 네 장의 지폐와 가볍고 풀 죽은 천 원짜리 여섯 장, 남은 오백 원짜리 동전뿐이었다. 그는 돈이 적어 불안했던지 포켓 안에서 엄지와 검지로 동전을 비벼본다.
“차 값과 점심값, 차비, 그리고 오늘 재미를 보려면.......”
순동의 머릿속이 여관비에 머물자 계산이 복잡해지고 어지러운 상상력이 날개를 펼친다.
“삐그덕~”
바로 그때 꽤 오래된 다방 새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 여사였다. 순동은 시간을 확인하는 듯이 눈길을 손목시계로 잠깐 옮기면서 엉덩이를 살짝 들어 빙긋이 웃으며 그녀에게 목례를 했다. 그는 너무 속 보이는 행동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손 여사를 바라본 채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짙은 녹색 스웨터가 그녀의 원피스 앞가슴을 다 가리지도 못한 채였고 한 손에는 목욕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듯한 흐트러진 머리를 그대로 한 채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앞자리에 힘에 겨운 듯 털썩 앉았다.
그녀에게 풍기는 향긋한 샴푸 냄새가 그의 코끝을 무척 감미롭게 해 주어 순동은 잠시 취한 듯 눈을 지긋하게 감으면서 코끝을 내밀었다.
"많이 늦진 않았지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하며 미안하다는 듯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반갑게 웃으면서 농담 섞인 말로
"대신 점심이라도 사면되지요."
하고 말을 받았다.
"사드리지요, 나 때문에 수고하시는데 점심 한 그릇 못 사 드리겠어요. 일어서시죠!"
"아이고, 아무리 급해도 자리 값은 하고 가야죠, 아가씨, 여기 차 주문....."
하면서 그는 찬찬히 그녀의 이곳저곳을 곁눈질하며 훔쳐보았다.
그녀의 키는 그리 크진 않았지만 보기 싫을 정도로 작지도 않았다. 코는 오뚝하게 서고 입술은 약간 두툼했다. 40대의 여인이어서 그런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에는 약간의 주근깨가 보기 좋게 나 있었다. 풍만한 그녀의 몸매가 매일 밤 잠자리를 비우는 그의 남편을 증오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제는 어떻게 됐어요? 뭘 좀 알아냈어요?"
"아뇨, 신호 때문에 그만 놓쳤어요. 재수 없게 차사고까지 나서......."
“운전하는 분이 운전을 잘 못하시는가 봐요?”
"운전은 잘하지요, 이런 일을 처음 해 보잖아요, 그런데 그 양반 차가 노란불이 켜졌는데도 멈추지 않고 건너지 멉니까, 우리도 같이 속력을 내는데 우리 바로 앞에 차가 건너려는듯하더니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지 멉니까, 그래서....... “
“다친 분은 없었어요?"
“다행히 인사사고는 없었어요. 갑자기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경미한 충돌사고라 별 일없이 해결되었지만....... “
권 순동은 어제 사고로 보상해 준 돈 건에 대해 말을 하려다가 얼마 되지 않은 돈 때문에 혹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 말끝을 흐렸다.
"권 선생님은 매사를 매끄럽게 처신하는 분이라......"
하고 말을 잇기도 전에 생긋이 웃으면서 그의 옛 행적을 기억이나 하듯 찬사의 말을 던졌다.
"예, 별일 없이 잘 마무리했습니다."
하고 순동은 다시 경쾌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잠시 어여쁜 미간을 찡긋하던 그녀는 약재상을 하고 있는 남편인 황사장의 소행을 생각하고 다시 억울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던지
"그 작자는 벌써 보름째 집에 안 들어와요. 빨리 꼬리를 잡아 위자료를 듬뿍 받아 내야 할 텐데......"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남편의 바람기를 약재상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면서도 쉬쉬하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자기만 몰랐다는 사실에 분통이 치밀었던 것이다.
"별로 대단찮은 양반 같은데....... 이런 미인을 버리고...... 참내......."
"내가 못나서 그렇죠 뭐!"
손 여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권 순동은 핀잔을 주듯
"손여사가 못나셨다면 어디 서울시내에 잘생긴 여자가 있답니까?"
하고 그는 은근히 그녀를 치켜세웠다.
"아이, 그만 놀리시고 점심이나 잡수러 가시죠. 저도 아침을 먹지 않고 목욕을 해서 배가 고파요, 네!”
권 순동,
그는 시골 조그마한 동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서울에 올라와서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다 주변 사람들의 꾐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는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연립주택 업자인 모씨가 건축에는 ‘건’자도 모르는 그를 사장으로 앞 세워 책임을 몽땅 지우고는 분양대금을 챙겨서 달아난 것이다. 결국 현장에서 미지급한 공사대금을 고스란히 떠안고 고향에 피신해 있다가 빚쟁이들이 찾아와 부모 재산을 몽땅 거덜 내고 지금에는 시집간 그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편직공장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라곤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건강한 몸과 풍채가 있으니 손님 접대나 공장의 완제품 처리 등 뒷일을 거들어 주며 생활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의 외사촌 형이 모 지청 검사로 있는 것을 빙자하여 주변에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여직공들의 대소 간의 부탁을 제법 해결해 주고 푼돈도 받아 챙겼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끼리는 풍채 좋은 그를 변호사로 호칭하고 있었다.
큰 키에 부옇고 넓은 얼굴, 길게 쳐진 두툼한 귀 밥이며 큼직한 코, 앞머리가 벗어져 나이도 제법 들어 보이지만 어깨가 딱 벌어져 어디든 나서면 의젓한 풍채인데, 상대와 대화를 할 때면 일부러 점잔을 빼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하는 그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순동이가 관직에 있는 높은 양반이라고 아니 볼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주 남의 일을 해결해 준답시고 자리를 비우기 일쑤이고 이일을 핑계 삼아 여자들과 휩쓸려 다니다 보니 권 순동의 여동생은 남편 보기에 창피스러웠다. 거기다가 쉬쉬하면서도 간혹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오빠인 순동이가
" 누구와 어떤 사이고 또 누구와는 어떤 사이고......."
하면서 이웃 공장 과부들이나 갓 올라온 처녀들과의 관계를 들으면 혹 남편이 알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브로카도, 사기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범한 직장인도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사람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방 문을 나선 두 사람은 결코 팔 장은 끼지 않았지만 다정한 부부인 양 즐거운 듯 복잡한 시장 통을 몸을 비집으며 걷고 있었다.
"손 여사!"
그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조금 크게 그녀를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우리 저기 순댓국집에 들어가 식사 겸 술 한잔 하는 게 어떨까요? 손 여사가 좋으시다면......."
"그렇게 제가 대접해도 될는지......."
"순댓국은 시골에서 자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요."
그가 그렇게 제안한 것은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아 모처럼 손 여사를 품어 보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면 여관비는 있어야겠다는 조심성 때문이었다. 주머니 사정을 알 턱이 없는 그녀는
"권 선생님은 정말 만나 뵐수록 소탈하신 분이시네요......."
하고 한껏 순동을 치켜세웠다.
"손 여사!"
순동은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은근히 손 여사의 어깨를 끌어안아 보았다. 생각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그녀는 순동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평소 출퇴근 때 같은 건물에서 근무했던 손 여사는 순동이와 자주 마주쳤었다. 예쁜 여자라면 열일을 제쳐 놓고 쫓아가는 순동으로서는 손 여사를 보자마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녀 또한 음탕한 기질은 순동이 못지않은 터였다. 하물며 처녀시절 순동이의 생김새나 주위 사람들의 일처리를 듣고는 사모했던 것인데 순동이가 이미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는 마음속에 두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마음속으로만 사모하다가 어느 날 손 여사가 순동을 찾아와 바람난 남편의 추적을 부탁하자 순동은 쾌재를 불렀다.
온갖 잡스런 일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는 순동이었다. 거기다가 결혼 전부터 손 여사가 여러 남자의 손을 탄 것을 아는 순동이가 결혼까지 해서 남편에게 버림받을 처지에 있는 것을 안 이상 손여사를 그대로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같이 점심을 먹은 순동이 눈치껏 여관으로 향했다. 손 여사는 순동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라오고 있었다.
정오를 넘긴 지 서너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겨울 해는 벌써 토끼 꼬리만큼 서쪽 산 달동네에 걸려 있었다.
코트를 걸치며 여관방 문을 향하여 나가려는 순동에게
"저녁에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적지만 넣어 가세요."
손 여사가 돈이 들어 있는 하얀 봉투를 양복상의 앞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을 순동은 모르는 척하고 받아 넣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 나왔다.
목적을 달성한 그는 우선 그녀가 준 돈의 액수가 무척 궁금했다.
"얼마일까? 삼십? 오십?...... 그래, 다방에서 어제 차 사고로 보상해 준 일을 말하지 않길 잘했어......."
순동은 봉투가 든 주머니를 가볍게 툭 건드려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순동이 손 여사와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동안 차는 동대문에서 좌회전하더니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경동시장 뒷골목으로 들어가 멈췄다. 미행하던 흥수 일행 중 한 명은 시장 입구에 내려서 먼저 골목으로 따라 들어가 요금 계산을 막 끝내고 택시 문을 닫고 있는 그의 옆을 지나 천천히 앞장서 걸어갔다. 흥수와 순동은 차를 입구에 주차하고 그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를 앞질러 가던 사내의 등 뒤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옆에 보이는 골목으로 획 돌아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먹이를 낚으려는 살쾡이 마냥 지나왔던 어두운 골목길을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바라보았다.
"이제야 잡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던 집 앞에 당도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대문 사이로 미닫이창에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왔는지 순동이가 큰 몸뚱이를 민첩하게 움직이며 캄캄한 골목길을 돌아보면서 낮은 소리로
"잠깐 전화하고 올 테니 여기서 감시하고 있어요."
하고는 전화박스가 있는 큰 대로변을 향해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방 안에서 두런두런 한참 무슨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니 미닫이문의 불빛이 사라졌다. 밖에서 감시하고 있던 사내는 이젠 몸에 한기를 느꼈고 한껏 몸이 움츠려 들기 시작했다. 그는 시린 발을 구르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경찰관 3명과 한 여자가 대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낮에 순동이가 만났던 손 여사였다.
두 경찰관은 담장 위에 뛰어올라 배를 걸치고 한참 동안 마당을 살피더니 내려와 양쪽 골목길을 각각 지키고 있었고 손 여사와 권 순동을 앞세운 다른 한 경찰관은
"쾅! 쾅! 쾅!"
"여보세요! 문 좀 여세요!"
하고 고요하고 차가운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거칠게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밖의 동정을 눈치채었는지 후다닥 잠옷차림의 사내가 문을 부수듯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오더니 앞마루를 돌아 캄캄한 뒷담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곧 어깨가 축 늘어진 자세로 다시 돌아 나온 대머리 사내는 단념했다는 듯이 대문 빗장을 열고는 스스로 경찰관의 뜻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뒤쪽에는 그로서는 감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담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안의 불이 켜졌다. 열린 미닫이 문사이로 아무렇게나 뭉쳐 있는 요와 이불이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한 여인이 형광등 불빛을 받고 창백한 얼굴로 그의 옷가지를 앞마루에 내어 놓았다.
청량리경찰서 조사계는 깊은 밤인데도 한낮을 방불케 하며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순동이 일행은 비좁은 통로 옆 딱딱하고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조사관에게 사실을 설명하고 진술하는 고발 당사자인 손 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간통으로 고발하려면 이혼 청구도 함께 해야 합니다."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현장을 잡았던 순동과 다른 사내들은 손 여사의 진술이 빨리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바깥 날씨와는 달리 경찰서 안은 따뜻했다. 새벽 3시를 알리는 벽시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점점 감겨 오고 있었다.
"경찰서에 구속 수감되면 며칠 안에 합의 요청 하겠지요, 그때는 수고비로 삼백만 원 지급해 드릴게요."
“삼백이 아니라 당신이 내 거니 합의금 전부가 내 거지.”
순동은 너무 기뻐 손 여사가 했던 말에 한 수 더 얹어서 이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순동은 그저 흐뭇하게 손여사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2
손 여사는 충북 진천의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6,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불던 경제개발의 붐이 일어나 시골 처녀들이 저마다 도회지로 나왔다.
역시 손 여사도 처녀시절 시골구석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묶여 있지 않았다. 배운 것이라고는 농사일 밖에 모르는 그녀는 먼저 올라온 고향 친구 덕에 편물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반반하게 생긴 그녀의 얼굴을 본 사내들이 그녀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농촌에서 부모에게 꼼짝 못 하고 묶여 살던 한창 사춘기 처녀였다. 그녀는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재 멋대로였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들을 여러 명을 울리더니만 어디서 만났는지 건달 한 놈과 살림을 차린다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한 1 년 동안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더니 결국 공장서 몇 푼 벌어 놓은 돈마저도 다 까먹고 동거하던 그 건달과 헤어지고 다시 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경동시장에서 약재상을 하는 황 사장.
그도 경상도 시골에서 끼니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시골 읍내의 한약방에서 밥이나 얻어먹으며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옛 말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했던가, 한약방에서 어깨너머로 보았고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거들었던 그의 일이 몇 해를 거듭하고 청년기에 접어들자 약방에 드나드는 사람이면 얼굴만 보아도 대충 무슨 병 때문에 오는지를 알게 되었고 한약 제조도 자신이 내린 처방과 하나 다름이 없었다.
부모님이 정해준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한약방 일을 거들면서 그럭저럭 별 탈 없이 해왔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슬하에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낳았다. 아이들이 커가자 씀씀이는 점점 늘어나고 그가 받은 돈으로는 집안을 꾸려나가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던 끝에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건설 현장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운 나라에서 1년을 피와 땀을 흘려 돈을 모아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열심히 보냈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왔을 때는 그 귀한 피와 땀이 어린 돈이 아내의 춤바람으로 단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춤바람도 자식 때문에 용서를 했다. 그리고 그는 3년 동안이나 중동에 가서 이를 악물었고 다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을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고 모아 경동시장에서 지금의 한약 도매상을 인수하여 장사에 손을 댄 것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배운 낯익은 한약 상이니 진맥도 하고, 약도 팔고 해서 자식들도 큰 녀석은 대학에 입학도 시켰고 두 딸은 고등학교를 보냈다. 그런데 돈도 모아 이제 먹고살만해지자 아내는 그만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아내가 죽은 후에 손 여사를 만났다.
손여사와 만난 사연은 이랬다.
전농동 노타리를 건너 우측 산비탈 골목길을 한참 타고 올라가다 보면 군부대가 나오고 그 좌측 옆으로 4미터 소방도로를 백여 보 지나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그 공터를 끼고 마주 보이는 곳에 백여 평의 붉은 벽돌로 된 콘크리트 3층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의 2,3층은 권 순동의 누이가 운영하는 편직 공장이고 1층은 손 여사가 다니는 편직 공장이었다. 손 여사가 다니는 그 공장의 사장은 약재상을 하는 황사장의 고향 친구였다.
황 사장은 마음이 적적하거나 외로울 때면 공장에 자주 들렸다가 그의 친구와 약주도 하고 필요한 돈도 가끔 융통해 주고 하니 공장 내에서는 황 사장을 돈 많은 홀아비로 소문나 있었다.
친구와 돈거래를 하다 보니 공장에 관심도 갖게 되고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도 궁금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 황 사장은 친구와 함께 모처럼 공장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공장 안 여기저기에 완성되지 않는 스웨터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십 수 명의 여인들이 제봉 틀로 하나하나 스웨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창문 앞에 길게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는 공장장과 몇 명의 여직원들이 완성된 스웨터를 세면서 묶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시선은 공장장 옆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한 여인에게 멈추었다. 스웨터에 붙은 실밥을 손 가위로 다듬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비춰 들어오는 햇살보다 더욱 밝고 환하게 그의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손 여사였다. 여자라곤 부모가 정해 주었던 죽은 아내 밖에 몰랐던 그가 아내와는 비교되지 않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그녀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 사춘기를 보냈고 여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모가 정해 준 사람과 결혼을 했던 그는 처음으로 한 여자에 대해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 때문에 그는 뻔질나게 친구 공장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의 친구가 그런 그의 행동을 모를 리 없었다. 그의 친구는 바람기 많은 손 여사를 홀로 살고 있는 친구의 장난 상대로만 생각하고 그녀에 대해 아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손 여사가 자신보다 십 년이나 아래인 이혼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돈 많고 안정된 그의 청혼은 가진 돈도, 가문도 없는 그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손 여사의 남자관계나 결혼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편직공장 사장은 친구의 재혼에 조심스럽게 반대했으나 이미 손 여사에 한번 빠져 버린 그로써는 무슨 말이든 들릴 리가 없었다.
황 사장은 대학생인 아들을 학교 기숙사로 보내고 아직 고등학생인 두 딸은 데리고 살았는데 처음 손 여사는 아들과 두 딸을 죽은 그의 아내보다도 더욱 정성스럽게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자식들도 병으로 인해 소홀했던 어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그녀로부터 받게 되자 주위 사람들이 우려했던 갈등도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어느덧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였고 두 딸은 지방 대학을 다니게 되자 사실상 집안은 그녀 혼자 지키게 되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황사장이 돈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황 사장은 매달 일정한 생활비 외에는 단 한 푼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본래부터 씀씀이가 크진 않았지만 서울에 와서 절약하는 법보다 항상 주위의 남자들이 자기에게 잘 쓰는 것만 보고 배운 그녀는 절약하고 아끼는 법이 없었다. 백 원이 생기면 백 원을 쓰고 천 원이 생기면 천 원을 모두 써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그러자니 황사장이 주는 생활비로는 자신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재혼 초에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주는 대로 받아썼지만 해가 갈수록 주변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자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쓰게 되었다.
그녀의 내막을 알 수 없는 이웃들이 잘 사는 약재상의 부인에게 아무 의심 없이 돈을 빌려 준 것이다. 결국 그녀는 빌려 쓴 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돈을 빌리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고 이젠 불어 난 빌린 돈이 억대를 넘게 되었다.
한편 황 사장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올 초부터는 한약 재료를 중국에서 수입한다고 보름씩 한 달씩 이웃하고 있는 몇몇 약재상들과 뻔질나게 외국 나들이를 했다. 손여사는 처음에
"돈벌이에 워낙 애착을 갖고 있는 양반이니 그렇겠지!"
하고 의심 없이 지냈다.
그날도 남편이 해외 출장 중이라 대신 가게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책상 서랍을 열어 정리하게 되었다. 서랍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꺼내 하나 둘 차곡차곡 정리하던 중 두툼한 사진 뭉치가 든 봉투를 발견했다.
심심하기도 하여 한 장씩 보다 보니 여럿 약제 상들과 함께 찍기는 했어도 유독 건너편 약제 상 과부와 나란히 다정스럽게 찍은 제법 여러 장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불쾌한 마음을 점원들이 보는 앞에 표시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귀국하면 단단히 따지려고 마음먹고 정리를 마쳤다. 며칠이 지나 그녀는 사진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으나 국내에 돌아온 남편이 이제는 지방으로 판로를 개척한다며 이삼 일씩 가게를 비우기 시작했다.
시장 약제 상인들이 중국을 함께 다닐 때는 별 의심을 갖지 않았는데 지방 출장 때에 보면 남편이 지방을 가는 날이면 몇 집 건너 혼자 산다는 바로 그녀가 다음날 꼭 가게를 비운다는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은 몰랐지만 달이 갈수록 그 사진의 의미가 의심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일가친척이라고는 없는 그녀였다. 이 궁리 저 궁리하다 보니 공장에 다닐 때 서로 아래 위층에서 근무했던 권 순동이가 생각났다.
그래서 손 여사는 남편의 뒷조사를 순동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재혼한 손 여사가 자기 남편인 황사장의 뒷조사를 부탁하니 순동은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손뼉을 치며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많은 위자료까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건 잘하면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음탕한 두 사람의 속셈은 어떻든지 이제 한배를 탔으니 둘의 손발은 척척 맞아 들어갔다.
3
"조심해야지요, 잘못하면 다된 죽에 코 빠뜨려요. “
하고 순동은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속셈인지....... 그대로 감옥살이를 시켜버릴까......."
"마무리가 코앞에 있어요, 조금만 참고 기다려요."
"어제는 애들 고모가 와서 자기 동생이 나와야 합의하지 않겠냐며 합의서를 쓰라고 협박 반 사정 반하지 뭐예요, 내가 눈 하나 깜박 않고 돌아 앉아 있었더니 오늘은 일찍부터 집에 와서 합의금을 얼마면 되겠냐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 얼마나 달라고 했어요? “
그는 궁금한 듯 손 여사에게 물었다.
"아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애들의 눈총도 받기 싫어 문을 닫고 열어 주지도 않았어요."
"그래요! 아직은 좀 일러요,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며칠 더 고생해 봐야지....... "
손 여사가 황사장과 이혼한다는 소문이 손 여사의 이웃에 돌고 있었다. 손 여사 생각으로는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이 돌아가는 눈치를 보면서 주시하고 있을 터인데 이 일이 잘못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무슨 수를 써서 나오면 어떡해요......"
"아이고 걱정 붙잡아 매세요, 간통은 대통령 백이라도 못 나옵니다, 조금도 걱정 말아요. 조금 있으면 손 여사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 테니깐요......."
"정말 그럴까요?"
"귀한 양반이 거기서 도저히 더는 못 견딜걸요."
그들은 하루가 멀다 않고 다방을 전전하며 만나고 있었다.
추위를 무릅쓰고 아이들 고모가 손 여사를 여러 차례 찾아와
"여보게, 어차피 우리는 남남이 될 것을, 자네도 끝을 내야 되지 않나,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면 되겠나, 말해보게, 동생이 백번 잘못했다 해도 자네와 몸을 섞어 산지 오래되었지 않나, 그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이 추운 겨울에 고생하는 사람은 풀려 나와야지....... 제발 합의해 주게나......."
하면서 끈질긴 합의 독촉에 손 여사는 생각했던 대로
"재산 반은 받아 야지요."
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아 얼른 자기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내일이면 무슨 해결이 나겠지! 아무려면 2,3억이야......."
했던 것이 유치장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황사장이 더구나 이 추운 겨울에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열흘이 가까워 오는데도 합의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평소에 낮 시간에 만났던 그들은 오늘따라 저녁 늦은 시간까지 눈을 맞으며 함께 걷고 있었다. 여기까지 꽤 긴 거리를 걸어왔던 둘은 주변에 인적이라고는 꽤 드문 곳까지 접어들었다. 순동은 한 바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인적이라고는 미끄러운 눈길을 엉금엉금 그의 곁을 지나치는 한 둘의 모습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때면 캐럴송으로 거리가 무척 시끄러웠는데 요사이는 차도 사람도 꼭꼭 숨어 버리고 하염없는 눈발만이 배꽃같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큰일을 앞에 둔 그들은 꽤 오랜 시간 서로를 참아 왔었다. 눈을 덮어쓰고 인도 밖까지 얼굴을 내밀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여관 입간판을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이나 하듯 다정하게 발길을 옮겼다.
따뜻한 이불속이 한층 취기를 가져왔다. 그들의 온몸은 취기와 함께 불같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들은 그렇게 영원하고 싶었다. 지금 그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섭고 겁나는 것도 없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인의 육체가 순동을 감싸고 있었다. 순동은 있는 힘을 다해 손 여사를 끌어안았다. 순동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오랜만에 맛보는 사내의 정취에 손 여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찬바람과 함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더러운 화냥년! “
카메라 후 러시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시누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쨍쨍하게 들려왔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손 여사는 자신에게 일어 난 일이 꼭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순동은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사람처럼.......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네!”
4
"도대체 어디에 가서 연락이 없는 거야, 이양반이 혼자 해먹은 거 아니야! 벌써 며칠 째야......."
오늘 이사 오늘 이사하고 기다렸지만 흥수에게는 순동이의 소식은 없었다. 삼사일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받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하던 양반이 며칠 째 전화도 받지 않고 소식이 없으니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차를 빌리고, 태워주고, 추운 겨울밤에 사람을 사서 떨면서 몇 날 며칠을 순동과 함께 했던 바로 흥수였다. 그는 부랴부랴 순동 씨가 근무한다는 공장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실례지만 권 순동 씨라고 계시는지요......"
하고 경리사원인 듯한 젊은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뒤에 앉아 있던 사장인 듯한 사내가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하고 막 대답하려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순동 씨와 약속한 것이 있어서......."
흥수가 말끝을 얼버무리자 그는 감을 잡은 듯
"경찰서에 잡혀 갔습니다, 그 사람이 항상 말하는 대통령 백으로도 못 나올 죄를 짓고 들어갔어요......."
하고 남의 말을 하듯이 불쑥 던지고선 조소 섞인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일어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순동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안하우, 들어서 알겠지만 쌍방이 같은 죄를 짓고 들어갔으니 없었던 일로 합의해서 같이 풀려났구먼요, 다음에 만나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순동의 전화를 받은 흥수는 기가 막혔다.
“황 사장을 잡기만 해요, 사례금은 몽땅 다 드릴 테니.......”
하던 순동의 말이 생각났다.
"허, 허, 허....... 닭 쫓든 개 울 쳐다본다?"
황사장의 재산을 탐냈던 손 여사도, 손 여사의 합의금을 탐냈던 권 순동도, 사례금 삼백을 받으면 무엇 무엇을 해야지 하고 계획을 세웠던 흥수도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은 다 마찬가지였다.
"허, 허, 허....... 모름지기 사내는 세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손, 다른 하나는 입, 그리고 순동이가 일을 저지른 바로 그 것이렸다.”
흥수는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