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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국가의 이기심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by 방방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1932년에 쓴 책이다.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한창이던 시대의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성을 통제하면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졌던 시기이자, 인간의 이기적 활동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회 전체에 이익을 준다는 믿음이 무너졌던 시기에, 세계를 재편성하고 인간의 목표를 다시 세우고자 했던 한 지식인의 통찰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역사가 거듭될수록 이성은 발전해왔는데, 왜 전쟁은 끊이지 않는가? 인간의 사회적 갈등은 무지 때문인가, 아니면 이기심 때문인가? 종교와 도덕은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데 왜 도움이 되지 않는가? 니버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오늘날 사회 문제를 도덕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원인을 밝히고자 했다.


이 책이 현대 고전이 된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바로 ‘사회는 도덕적이지 않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사회는 개인이 바라보는 사회로서 어느 특정한 집단이 아닌, 결사체, 인종, 민족, 계급, 국가, 국제 사회 등 모든 집단을 포함한다. 그러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는 (시대 배경 때문에) 계급 사회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국제 사회, 인종 집단 등을 주로 다룬다.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1~3장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이기적, 종교적 행위에 대해, 4장에서는 국가(민족)의 도덕성에 대해, 5~6장에서는 특권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끝으로 7~10장에서는 사회 정의를 이루어 온 방법과 한계에 대해 서술한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오늘날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더욱 집요해졌다. 개인은 사회에 노동을 제공하고, 사회는 개인에게 의식주를 제공한다. 국가는 개인을 통제하고,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트렌드는 개인의 목표와 삶의 방향에 영향을 끼친다. 미디어와 인터넷은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관여하기 시작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하고 사회의 성격 규정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적으로 도덕관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어 왔다.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던 개념이다. 과거 철학 논의를 살펴봐도 관련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개인의 도덕적인 행동이 사회를 정화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공공연하게 널리 퍼져있다. 미리엘 주교가 장 발장에게 준 은촛대는 인간에게 개인에 의한 사회의 도덕적 실현이라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희망과 환상을 품게 해 줬다.


니버는 도덕 개념을 사회에도 적용시키면서, 사회는 필연적으로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은촛대와 같은 이타심은 개인이 개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사회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회는 이기적인 집단과 이기적인 집단 사이의 갈등을 이타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집단의 수장은 다른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 집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결정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니버에 따르면 도덕이 이타심이라는 내적 동기에서 출발한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이타적일 수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는 있으나 사회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개인의 도덕적 활동의 합이 사회의 도덕성으로 발현되지도 않는다. 집단 내의 애국심은 집단 간의 이기심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니버는 사회의 선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의 실현은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정의는 대체로 균등한 기회, 즉 ‘평등’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 사회 정의는 도덕적 이상에 의해 설정되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현하도록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종교적 환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 정의는 이기적인 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대체로 도덕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정치적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도덕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도덕성은 사회 정의 설정에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적 활동에도 도덕적 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폭력적 저항은 문제의 본질을 멀게 하고 폭력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니버는 사회의 정의를 평등이라고 설정은 하지만, 그 상태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인간 사회는 그것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폭력이나 혁명으로 얻어진 평화는 일시적이거나, 힘의 균형이 깨지면 갈등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완성된 정의 사회에서 새로운 집단의 리더가 특권을 누리거나 부패를 저지르지 않게 할 수 있느냐 등 이상 사회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가 생긴다고 봤다.


그러면서 폭력과 혁명이 아닌 비폭력과 협력에 의한 정의 구현 역시 실현 가능성이 너무 낮다고 한다. 특권 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스스로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는 일도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에는 엄연히 중간 계층이 존재하고 프롤레타리아 내에서도 계급이 나눠져 있다는 사실은 단결조차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니버는 사회 정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종교적 환상은 인간을 계속 고무시켜야 하고, 정치적 활동에 도덕이 관여해, 폭력으로 변질되어서도 안된다고 한다. 비록 이상 사회가 완전히 이뤄질 수는 없지만, 이상 사회를 향한 점진적인 진보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혁명도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그것은 오늘날 사회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니버는 철학적 사유가 아닌 역사적 사실 속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매우 현실적으로 분석해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과 한계를 정확히 짚어내고, 혁명이든 점진이든, 어차피 인간이 선택해야 할 정치적 문제이지만, 언제나 도덕적 견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물론 도덕적 합리주의는 동기와 결과가 도덕적이라면 정치적 투쟁도 선으로 설정하고 있다고도 한다. 결국 정치적 행위는 개별 상황에 맞춰 이뤄져야 한다는 모호한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적 사회>를 읽다 보면 ‘설국열차’의 계급 대립이 세상의 질서와 균형을 가져다준다는 착각을 불러오면서,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에 니버는 "역사가 종말 되는 순간까지 정치는 양심과 권력이 만나는 영역이며, 또한 인간 생활의 윤리적인 요인과 강제적인 요인이 상호 침투하여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타협을 이루는 영역이”라고 말할 뿐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적 사회>는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도구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훌륭했지만, 인간의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의 모호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바람에, 왠지 특권 계급에게 위안을 선사하는 것만 같아 아쉽다.


니버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사회는 최소한의 사회 갈등을 막고, 피통치자에 의해 정책이 결정된다는 민주주의라는 믿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니버의 말대로, 그건 다 개소리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주무르는 건 자본권력이다. 그로 인한 강제력은 군인의 얼굴에서 밥그릇을 뺏는 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은 정치권력마저 주무르며, 정치권력 뒤에 숨어 있다. 정치권력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은 높아졌지만, 실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본권력의 눈치를 보며, 복지 예산을 얼마나 편성할지 뿐이다. 사회적 강제력과 균형을 맞춰 나가는 것이 사회 운영인데, 그 강제력은 언제나 더 큰 권력 아래 놓이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바로 오늘날 역사적 과제이다.


니버는 이러한 상황을 중립적 입장에서 놀랍도록 새로운 관점으로 분석해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노동자 계급이라, 편협한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라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은 모호성이 있다. 세계에 대한 분석은 탁월했지만, 그게 끝이다. 게다가 그 분석의 결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한계를 너무도 정확히 예언하는 바람에, 힘이 빠진다. 희망을, 아니 환상을 잃지 말라고 전하면서, 환상을 사라지게 하는 책이라는 느낌이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특권 계층, 특히 정치인들에게 묘하게 면죄부를 주는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어차피 자본 권력 손바닥 안에서 깨작거리는 일이었는데, 그 틀을 깨는 방법이 거의 불가능하니 점진적 발전을 모색하라는 말은 왠지 현실의 한계를 규정해버리는 것 같아 정치인들에게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의 필요성을 덜 느끼게 함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과 자유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과 별개의 계획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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