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함도>는 정말 역사를 왜곡했을까?
'안철수 현상'이라고 기억하는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이름이다. 도올 김용옥이 ‘안철수 현상’은 천심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물론 도올은 ‘안철수'가 아닌 ‘안철수 현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지만, 당시 난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안철수야말로 구 정치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여겼다. 나뿐만 아니고 대한민국의 50% 이상이 그를 지지했다. 난 ‘안철수’가 대안임을 너무나도 확신한 나머지 사람들과 논쟁까지 벌이곤 했다. 논쟁이 거셀수록 나중에는 안철수가 아니라 그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즉 주장을 위한 주장에 혈안이 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점점 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지지율은 10%대로 곤두박질쳤고, 당시 나의 판단은 너무 섣부른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난 무엇을 근거로 그를 지지한 걸까? 그때와 지금 달라진 건 무엇일까? 내가 좋아했던 안철수는 누구이며, 지금의 안철수는 누구인가? 나의 판단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렸는가? 물론 이 현상을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을 들먹이면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여론에 휩쓸린 것이다. ‘안철수의 예능 출현(무르팍 도사)’, ‘저서 발간(안철수의 생각)’, 그리고 ‘여론 몰이’ 등에 정신없이 떠밀렸음을 고백한다.
2017년 여름, 대한민국에 또 한 번의 쓰나미가 몰려왔다(사실 대한민국에 이런 류의 쓰나미는 자주 온다). 그 해 여름 극장가 최고의 영화로 등극하나 싶더니,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영화, 바로 <군함도>이다. <군함도>는 개봉한 지 한 달도 안 돼 온 국민의 샌드백이 된다.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국뽕’이라고 공격하고,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좌파 선동 영화’라며 공격했다. <군함도>는 전방위적으로 공격받으며, 식민사관, 역사왜곡, 스크린 독과점 등 무수히 많은 논란 속에서 제대로 팔 한 번 뻗어보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사실 평점 테러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됐다. 이른 새벽부터 마치 조직적인 냄새를 풍기며).
타도 여론이 너무 거세다 보니 <군함도>는 제대로 된 변명의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다.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는 의도와 달리 논란을 더 키웠다. “무조건 일본이 나쁘다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당시 나쁜 일본인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좋은 조선인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등의 발언은 “명예 일본인 같다”거나 “뉴라이트 아니냐”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군함도를 탈출하는 것은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오래전 청산되었어야 할 문제가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면서 현재와 미래까지도 잡아먹고 있다.”는 감독의 발언은 친일파의 관점과 유사하다며 몰매를 맞았다.
류승완 감독은 공식 입장을 통해 군함도가 날조된 영화라는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수많은 증언과 자료집을 참고해 만든 작품임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인 강제 징용의 참상과 일제의 만행 그리고 일제에 기생했던 친일파들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다루고자 했다”는 작품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네티즌은 “군함도는 일본의 극악무도함만 담았어야 한다. 지옥섬이라 불린 그곳에서 조선인들이 얼마나 배고픔에 굶주리고 힘들었는가만 담았으면 된다”라고 반응했다.
사건의 본질을 떠나서 여론은 ‘신’을 만들 수도 있고, ‘마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목도했다. <군함도> 논란을 여론 몰이의 결과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판단이 정말 충분하고 합리적인 논의 구조를 거친 결과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실 난 비판의 정확한 실체를 찾기도 힘들었다. 우리의 기대와 다른 애티튜드를 가진 <군함도>가 거대 자본과 결탁함으로써, 실로 까기 좋은 소재가 되었고, 우리는 그 ‘까기’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그러나 댓글 어디서도 비난은 있어도 비통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개봉 첫날 스크린이 2,027개라는 글이 인터넷 곳곳에 퍼지면서 비난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택시 운전사>는 첫날 1,446개의 스크린으로 시작했지만, 6일 만에 1,906개의 스크린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택시 운전사>는 적어도 독과점 비난으로 스크린 수를 줄이거나 관객 동원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왜 같은 역사를 다룬 영화인데, 하나는 역사로 돈 벌려고 한다고 비난을 받고, 하나는 그 비난에서 비켜설 수 있었을까? 해도 너무한다는 2천 개를 넘겼기 때문일까? 이는 잠정적으로 2,000개는 안되지만 1,900개는 괜찮다는 모호한 기준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시장에서 컨트롤할 수 없는 문제다. 이미 멀티플렉스관이 대한민국을 지배해 버린 이상 돈 버는 게 목적인 기업의 양심에 호소하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는 말이다. 결국 국가가 나서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건 국민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던 네티즌들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군함도>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게다가 영화에 대한 네티즌의 열정적 비판에 비해 ‘군함도’라는 실질적 사건의 해결을 위한 노력 역시 너무나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이런 점은 <군함도>에 대한 비평이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는 ‘쾌’를 주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다시 한번 들게 한다.
<군함도>는 일제가 무너지기 직전인 1945년 하시마섬의 지하 탄광에서 강제 노역한 조선인들의 탈출을 그린 영화다. 영화에는 한량, 조폭, 종군위안부, 포주, 변절자, 독립투사, 광복군 등 다양한 조선인이 등장한다. 영화 내용에 있어서 가장 문제로 지적되는 점은, 군함도에서 참혹했던 실상을 묘사하기 위해 조선인 친일파들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를 속이고 착취하는 친일파 관리, 일제에 위안부를 공급하는 조선인 포주, 일제의 앞잡이가 된 노무반장 등이다. 이 때문에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나빠 보인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즉, 네티즌이 문제 삼는 것은 조선인은 모두 불쌍한 피해자라는 기존 구도에서 벗어난 예상 밖 조선인들의 모습 때문이다.
<군함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분명 <군함도>에 대한 어떤 기대 심리를 가졌던 것 같다. MBC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보여줬던 ‘군함도’를 대하는 애티튜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무한도전>은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군함도’를 다루면서, 그 참혹함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촬영했다. 출연진들의 진심 어린 눈물은 여느 영화보다 울림이 컸다. ‘군함도'는 많은 조선인들이 학대와 고문, 그리고 심각한 차별을 받으면서 비참하게 일을 하다 죽은 곳인데, 그곳에서 조선인들이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고, 심지어는 한국인들끼리 싸우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 ‘역사 왜곡’이라 했다. 여기에 아픈 역사를 수단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는 괘씸죄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상업 영화는 돈을 벌기 위함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목적은 돈 버는 것에만 있지 않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좀 더 안정적인 부동산에 투자하면 된다. 청약통장을 들고 분양사무소에 줄을 서는 바로 우리처럼.)
<군함도>는 정말 역사를 왜곡한 영화인가? ‘역사 왜곡’의 사전적 정의는 '역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거나 거짓으로 지어 쓰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이라는 문구에 주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군함도>에는 ‘친일 사관’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영화 속 ‘친일 사관’은 감독의 의도일까? 아니면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생긴 오류일까?
영화가 역사와 다르다고 해서 역사를 왜곡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역사를 그대로 반영해 제작된 영화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모든 영화는 감독의 관점이 반영되고 감독의 시각에 따라 변주된다. 분명 <군함도>에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혹은 기대와 어긋난 역사적 변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걸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분명 경계가 모호한 부분은 있지만, 그것은 영화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이다. 영화는 목적이지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자칫 프로파간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다룬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의 해석과 표현, 또 변주에 한계를 두어야 할까? 혹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할까? 그것은 사안에 따라 다른가? 아주 오래된 역사는 괜찮지만, 근래의 역사는 안되는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해줄 수 있는가?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그런 점을 사전에 충분히 검토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논의하기 위해 과거 예술과 관련되어 논란이 되었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 그림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다. 이 그림이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그림이 특별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850년에 출품되었을 당시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유는 그림 속 주인공이 ‘농부’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왜 논란이 되지? 맞다, 오늘날 상식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림 속 주인공은 언제나 ‘신’이나 ‘위인’, 아니면 ‘귀족’ 등 고귀한(?) 인물이어야만 했다. ‘농부’가 주인공인 그림은 당시의 상식에서는 불결한 것이었다.
상식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지지만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위 작품은 화가 베로네세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다. 그러나 이 그림 역시 밀레의 그림과 비슷한 이유로 1573년 베네치아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 어릿광대, 술주정뱅이, 독일인, 난쟁이 같은 비속한 인물들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베로네세에 따르면, 여관 주인인 ‘시몬’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집사’는 이 식사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고 싶은 호기심을 가질 것 같아 그려 넣었다고 한다. 화가의 상상으로 조그만 사고가 일어나 코피를 흘리는 하인을 그려 넣었고, 집주인이 부자인 점을 고려해 창부병을 계단 근처에 그려 넣었다. 손목에 앵무새를 얹고 있는 어릿광대는 그저 곁다리로 그려 넣었고, 12 사도들은 양고기를 썰거나, 접시를 들고 있거나,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베로네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렸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림의 제목은 ‘최후의 만찬’에서 ‘레비의 집에서의 연회’로 바뀌었다. 작품은 시대 상황에 맞지 않았고 재판을 통해 수정되었다.
당시 통용되었던 상식으로 베로네세의 그림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사실 그림 자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은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모욕을 주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공공의 의견에 따라 작품은 수정되어야 하는가? 언제나 다수의 상식은 옳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후에 모든 작가들도 베네치아 재판의 의견을 고려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때때로 상업영화들은 다양한 종교집단의 분노를 사기도 한다.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 <안녕, 마리아>에서 마리아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농구 선수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러 장면에서 누드로 나온다. 요셉은 택시 운전사이고, 가브리엘은 불량배로 나온다. 그들은 가끔씩 불쑥불쑥 신적인 수태의 문제를 놓고 언쟁을 벌이는데, 그 말투가 상스럽기 짝이 없다.
수많은 가톨릭 단체들이 영화 상영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는데, 그들은 이 영화가 자신들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종교적 믿음을 모독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된 불만은 그 영화로 인해 사회의 도덕이 직접 위협을 당한다거나 심지어 그 영화를 본 가톨릭의 어린 신자들이 죄악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보다는, 종교 그 자체에 대한 신성모독이 자행된다는 점이었다.
한 사회의 도덕적 감수성은 작가의 창조성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어야 하는가? 예술의 창조적 가치는 언제나 사회적 가치에 굴복해야 하는가? 영화에서 감독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할까? 우리 사회가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그것이 자칫 영화를 만드는 자유로운 사고를 위축시키지는 않을까? <군함도>는 정말 다른 긍정적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저 나쁜 의도를 가진 영화일 뿐인가?
감독은 영화 <군함도>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사람들의 말처럼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액션 블록버스터’를 끼워 넣은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군함도’의 역사적 실상만을 보여주려고 한 것도 확실히 아니다. ‘군함도’의 실상을 더 까발리고 싶었던 관객들에게는 실망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관객이 감독에게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감독의 몫이다. 물론 작품이 공공에 공개되기 때문에 누구라도 비평할 수 있다. 그래서 <군함도>가 재미없는 영화라고 한다면 충분히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쁜 영화’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영화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여론 몰이와 관객의 기대가 합쳐지면서 생긴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군함도>는 감독의 창조성이 많이 개입된 작품이다. 실제 역사보다 많은 변주가 일어난다. 감독은 ‘군함도’라는 배경을 가져와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거기에 탈출극을 끌고 와, 류승완식 블록버스터 액션을 통해 우리 사회에 희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친일세력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고, 민중은 촛불 세력과 태극기 세력으로 갈려 맞서는 형국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류승완은 이런 현실을 깨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회를 인식하고 있던 류승완은 그저 우리 사회의 모순에서 ‘탈출’이라는 ‘희망’을 얹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일본은 끊임없이 조선인들끼리 싸우도록 조장한다. 모순의 본질적 ‘세력’은 싹 빠져 버리고, 피해자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방식이다. 그 통치 방식은 일제강점기를 넘어, 오늘날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쌍용차 사건’, ‘세월호 사건’ 등은 ‘을’끼리의 싸움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가장 야비하고 비열한 통치 방식이다. 감독의 다른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수가 하청업자 사장과 트럭 운전수에게 글러브를 주고 싸움을 붙이는 장면은, 류승완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감독은 <베테랑>에서 인식했던 사회를 그대로 ‘군함도’로 가져왔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역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일본과 친일파는 숨어버렸다.
이제 영화가 끝난 지 2년이 흘렀고, 변명의 기회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긍정적인 논란은 영화 이후에 더 많이 담겨 있었다. ‘군함도’에 대한 역사 인식의 확장은 물론,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물론 영화는 그냥 영화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것 하나에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을’끼리의 싸움을 멈추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비난했던 바로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는 영화처럼 일본의 지배 하에 조선인끼리 싸우는 형국을 연출하고 말았다.
그리스 아테네 시절,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여론이었다. 분명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군함도>는 ‘군함도’의 피해자들의 아픔을 이용해 ‘몹쓸' 상업 영화를 만들었다고 비난받는다. 인터넷 재판에서 감독의 영화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물론 소크라테스와 <군함도>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군함도>가 옳고, 대중이 틀렸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여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군함도>를 항변하는 듯한 스탠스로 글을 썼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군함도>를 둘러싼 논란에 어떤 것이 옳은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다는 데 다소 무서움을 느낀다. 이런 사건이 마녀 사냥식으로 이뤄지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우리의 판단은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꼬리를 내리며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수록 좋은 영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데 다소 동의하는 측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애매한 입장으로 마무리하면서 비난을 피해 본다. 비판은 언제든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