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의 주변을 보면 그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구겨진 대기 번호표와 사탕 포장 껍질, 빨간 루주가 묻은 종이컵, 스톱펜 등이 널브러져 있다. 그의 발 밑 패드는 쥐가 파먹은 듯 찢어져 있고 온갖 볼펜 자국과 떼 자국이 고대의 유물처럼 부패된 것 같다.
그 자신은 어떠한가? 그의 이름처럼 노숙하는 생쥐 같다. 그의 휠에는 하얀 먼지가 덕지덕지 끼어 있고, 만지면 천만 개의 병균이 옮을 것 같은 얼룩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몸에 새겨진 프린트는 세월에 지워지고 흐려져, 이제는 형체(SA U G)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피부색이 검정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더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이름은, '마우스'이다.
나는 서류를 떼러 서울의 어느 구청에 왔다. 대기표를 뽑고, 구청 로비 구석 책상 앞에 앉았다. 낡은 컴퓨터 옆에 놓인 마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애초로워 보인다. 회사에서 잘린 가장의 뒷모습 같기도 하고, 매번 취업에서 떨어져 이제는 자포자기한 백수 청년 같기도 하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이마로 불을 켜는 지하실 사내 같기도, ‘탁, 탁, 탁’.
마우스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태어나서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아니면 무선 광마우스의 습격으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이곳에 온 건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시장실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는지도. 고급 패드 위에서 비서가 아침마다 그의 몸을 닦아주고, 날마다 쾌적한 공기를 만끽하며, 직원들이 올리는 보고서를 결재하면서 거만하게 딸깍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래, 열심히 했구먼 이건 결재해주지, 딸깍", "이걸 보고서라고 올린 거야? 반려, 딸깍".
냄새가 난다. 커피 냄새도 나고, 화장품 냄새도 난다. 발 냄새와 땀 냄새, 인간의 온갖 냄새가 한 데 섞인 냄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우스를 만졌을까? 코를 파던 손이 다가온다. 으아악. 커피가 쏟아진다. 피할 수도, 불평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세탁비나 목욕비를 청구할 수도 없다. 느린 것은 컴퓨터이지만, 언제나 화풀이는 '마우스'의 몫이다. "이거 왜 이렇게 느려, 아이씨." 쾅쾅, 두드리거나 심하게는 집어던지기도 한다.
뭔가 일이 잘 풀린다 해도 칭찬은 마우스의 몫이 아니다. 마우스를 클릭해 열린 모니터 화면의 합격 통지서를 보고, "나 합격했어"하고 마우스에게 뽀뽀하는 사람은 없다. 굳이 뽀뽀를 한다면 상대는 모니터이다.
그럼에도 기쁨이나 보람이 있을까. 딸깍거리는 데 희열이나 성적 쾌감 같은 것을 느낄까.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는 마우스의 꿈을 모른다. 꿈을 갖기에 마우스는 너무 초라하다. 물론 초라하다고 꿈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고장 나거나 낡으면 언제든지 버려질 운명이다. 대체할 마우스는 차고 넘친다. 지금 당장 버려진다고 해도 아무도 슬퍼할 사람은 없다.
그래도 지금 마우스는 존재하고, '클릭'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연결한다. 분명 어떤 역할을 한다. 미미할지라도, 그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 당장 마우스가 없으면 세상을 엿보고 정보를 얻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봐야 한다.
마우스를 사용하면서 마우스가 하루에 몇 번의 클릭을 하고, 몇 번의 창을 열어주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안경 낀 여드름 투성이의 사내가 퀴퀴한 차고에서 마우스를 처음 발명할 때의 환호에 대해 상상하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어쩐지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것들의 사연은 언제나 흥미롭다.
처음에 발명한 마우스는 크고 투박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스티브 잡스를 만나 상용화되면서 볼마우스로 진화하고, 지금은 무선 광마우스로까지 발달했다. 그렇게 진화하면서 마우스는 인류의 발전에 실로 어마어마한 기여를 했다. 사실 마우스의 발명은 냉장고나 세탁기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굉장한 것이다.
우리는 고작 마우스를 딸깍 거리는 것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 편지 봉투에 우표를 붙이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된다. 그저 검지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몇 번 딸깍거리기만 하면 지구 뒤편의 소식을 알 수 있다. 이제 마우스 없이 인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됐다. 인류는 마우스의 딸깍거리는 숫자만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하찮은 마우스이다. 그러나 마우스가 없으면 열리지 않는 창처럼,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서류를 발급해 주는 공무원이 없다면 나는 서류 제출을 못해 취업을 못했을 것이고, 취업을 못했다면 나의 성과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다른 직원으로 대체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회사는 미미하지만 분명 나의 기여도 포함되어 완성됐다. 구청사를 청소하는 일용직 아주머니의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지리고 간 똥, 오줌 냄새를 그대로 맡아야만 했을 것이다. 띠를 맨 안내 도우미는 우리의 시간을 절약해 준다.
조금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이로움을 준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어느 여공의 월급일 수도 있고, 오늘 먹은 아침 식사는 어느 농부의 자녀 학비일 수도 있다. 광화문에서 흔드는 태극기도 광주 항쟁 때 부모를 잃은 어느 사내의 노동일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비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세상이 보는 하찮은 존재들은 공생하며 세상을 지켜내고 있다.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도 청소를 해주거나 밥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런 발명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하찮은 존재는 없다. 모두가 발명가이고 혁명가이다.
원고지 4매 이내로 어떻게 자신을 설명하는 글을 쓰냐고 투덜거리는 독자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럼, '굴튀김'에 대해서 쓰세요."라고 조언한다. 굴튀김에 대해 쓰면 자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나는 인류의 공생 관계를 설명하려면 그저 마우스를 설명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띵, 동." 나의 번호다. 마우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마우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번호표를 들고 민원대를 향해 걸었다. 안내 도우미와 눈인사를 하고 공무원에게 “안녕하세요? 서류 발급하러 왔습니다.” 하며 인사를 나누었더. 그리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