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8일(목)
[5일 차] Albosaggia ~ Lecco 95km / 누적 거리 400km
어제 사다 놓은 방울토마토를 아예 뜯지도 않아서 아침에 씻어서 먹었다. 이탈리아 토마토라 그런가 달고 맛있다. 과즙 팡팡~
조식을 8시에 준대서 내려갔더니 아그리투리스모 답게 조촐하다. 투숙객 3명. 뭔가 먹다 남은 걸 모아둔, 거지 같은 아침을 대충 먹고 방에 돌아와서 남은 우유와 토마토를 다 먹었다. 우유는 이 지역 브랜드인 것 같은데 진한 맛은 없다.
조식을 늦게 주는 바람에 10시가 다 돼서야 어제의 자전거 도로로 다시 라이딩을 시작해 본다. 인도와 거의 병행하는 이 도로는 노면이 가끔 울퉁불퉁해서 속도는 잘 안 나지만 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차가 없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편하다.
길을 잘 못 들어서 어떤 공장 앞에서 서성거리니 안에서 아저씨 한 분이 막 뛰어나왔다. 사유지에서 방황한다고 혼날까 봐 쫄아있었는데 아주 가까이 밀착(?)해가지고는 저~쪽으로 가면 길이 있다고 다정하게 알려줬다. 내가 그 길에 진입할 때까지 나를 쳐다보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오래된 기찻길을 더 이상 쓰지 않아서 자전거 도로로 개조한 듯한 길이 있다. 잔디가 야무지게 나서 달리기 짜증 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살살 당연하게 타고 간다. 그래, 길이 있는 게 어디인가 싶다...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비포장이 또 나온다. 아유, 승질나!!
나의 화를 달래주기라도 하듯 멋진 자전거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는 나무 그늘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햇살 아래 들판도 지났다. 그리고 마지막은 또다시 비포장... 고운 모래길에도 고마워하는 내 모습을 보니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 것 같다.
자전거 도로가 없어지는 Colico에 도착해서 호수뷰 테라스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식당이 몇 개 몰려있는 구역인데 파라솔이 해를 막아주는 장소를 선택했다. 이탈리아에 넘어온 이후로는 온도가 많이 올라서 거의 반팔로 다니고 있다. 아무래도 남쪽으로 가는 데다가 고도 역시 해안선에 가깝게 내려왔기 때문이다.
토마토소스 해산물 스파게티와 그린 샐러드, 프레쉬 오렌지쥬스와 제로콕. 채소를 곁들인 메뉴가 없어서 웬만하면 사이드로 채소를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린샐러드를 시켰더니 찢어놓은 상추 쪼가리만 나온 게 5유로다.
입맛이 없어서 잘 안 들어간다. 열심히 먹었지만 결국엔 파스타를 조금 남겼다. 이탈리아로 넘어온 이후로는 더우니까 음료만 자꾸 들어간다. 이놈의 동네는 마트도 다 브레이크 타임이 있어서 그냥 식당에서 비싼 돈을 주고 먹고 싶은 음료를 모두 사 마셨다.
SP(지방도) 도로를 타고 호수 테두리를 따라 업다운을 했더니 땀이 많이 난다. 옷도 별로 없는데 감기까지 걸린 상태라 더운 게 오히려 낫다. 원래도 여름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 생일이 여름이라 그런가? 호호^_^
이탈리아 동부 해안을 타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서쪽으로 가는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어제 티라노(Tirano)에서 동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국경 부분의 꼬불꼬불한 1,200m의 업힐에서 체력과 시야 확보 등의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돌아가더라도 Lecco를 들르게 된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Lecco에 가기 위해서는 500m 정도의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500m면 고맙다. 가파르지만 않다면...
업힐을 오르기 직전, 카페에서 음료수 두 개를 벌컥벌컥 마셨다. 일하는 젊은이들이 친절하게 자꾸 말을 걸어주니 기분이 좋지만 한편으로는 곧 구불구불한 오르막이 시작이라 긴장이 된다.
자물쇠를 채우더라도 자전거를 밖에 두는 것은 불안한데, 근처엔 테라스가 없는 이 카페 하나뿐이라 어쩔 수 없다. 실내에 앉을 때는 무조건 바깥의 자전거가 잘 보이는 자리를 선택한다.
걱정과는 달리 초반 구불길은 완만하고 새로 포장해서 생각보다 갈만했다. Lecco로 넘어가야 숙소가 있으니 열심히 가 본다. 혹시나 지칠까 봐 중간 쉼터에서 조금씩 휴식도 한다.
가다가 엄청난 터널이 나왔다. 옆 마을로 우회해서 터널을 넘어 도로로 돌아왔더니 업다운 급경사에 힘이 빠진다. 그래도 시간이 늦어지고 있어서 어딘지도 모르는 정상을 향해 계속 올라갔다.
가다 보니 차가 너무 많아졌다. 구글 지도에서 안내해 주는 자전거 도로로 빠져본다. 사실 아까 터널을 우회한 마을에서도 봤지만, 이 산골에 저 좋은 자전거 도로가 계속 이어지기나 하겠나 싶어서 무시했는데.. 엄청나게 좋다.
보행자를 피해 천천히 달려본다. 약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는 구간이다.
한동안 자전거 도로가 이어지다가 끝나고, SP 도로로 다시 합류했다. 오, 이제 내리막인가? 이제 수월한 길만 남은 것 같아서 이곳에서 숙소 예약 완료~
쥐뿔.. 오르막은 계속 됐다. 하루의 후반에 이런 길을 계속 차들과 부대껴 가는 게 얼마나 사람 진 빠지는 일인지... 아주아주 완만한 오르막을 생각보다 더더더더더더 길게 올라와서야 드디어 내리막을 만났다.
Lecco 시내로 가기 전 내려오는 길에 있는 호스텔의 개인룸을 예약했다. 주인 아짐마는 아주 업텐션으로 아주 분위기 메이커다. '너 korea 사람 이래서 north인 줄 알았잖아~ 깔깔깔! 너 방 완전 개 넓어. 까암짝 놀랄걸?? 코인 하나 줄게. 이거 옆 식당에서 웰컴 드링크로 바꿔달라고 해!!'
숙소 체크인하자마자 원래 맥주를 먹는데 여기에선 무료로 먹을 수 있으니 좋았다.
방을 들어가니 이층 침대 두 개가 있다.
잉? 들어가 보니 안쪽에 더블베드도 있다. 욕실이 딸린 6인실을 나 혼자 쓰는 거다. 호스텔은 오랜만에 오는 거라 이불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밤에는 옆 침대의 시트와 커다란 수건을 같이 덮고 잤다.
스위스에서 얻어온 감기가 콧물&코막힘에서 기침까지 내려가버렸다. 쳌인을 하자마자 근처 약국으로 갔다. 미리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화면을 보여주니, 레몬맛 시럽약을 줬다. 11.5유로. 돈을 아주 물 쓰듯 쓰고 있다. 하지만 난 햄복하니까 갠추내... 원래 쓰는 만큼 행복한 법... 하루 세 번 한 스푼씩 먹으라고 한다. 하.. 근데 가루도 알약도 아닌 유리병이다. 짐이 늘어났고 걱정도 늘었다.
돌아와서 샤워&빨래를 하고, 호스텔에서 같이 운영하는 듯한 바로 옆 레스토랑에 갔다.
감자칩이 곁들여진 립, 구운 야채, 맥주를 시켰다. 구운 야채는 존이 아주 싫어할만한 가지와 호박스러운 것이 나온다. 전부 다 맛있지만 역시 감자까지 다 먹는 것은 항상 힘들다. 절반도 못 먹은 듯..
알프스에서 누적된 피로가 오늘 Lecco로 넘어오는 업힐에서 절정을 찍었다. 밤만 되면 코가 꽉 막혀서 이틀 동안 잠도 거의 못 잤다. 내일부터는 당분간 조금씩만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