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도 가만히 바라보게나∥스토너

1장 넷. 영어편

by 스쿠피

‘나는 뭘 기대하는 걸까?’


스토너를 좋아한다. 대단한 서사 없이도 한 평범한 사람 인생을 촉촉한 슬픔으로 다루었다. 작가는 스토너가 행복한 사람 부류에 속한다고 말했다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토너를 몇 번씩 읽고 나면 동의하게 된다.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었다는 것, 게다가 그는 진정한 사랑까지 해 보았으며,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혼자 되뇌었던 순간도 절대 적지 않았으니까.


중년에 스토너를 만난 것도 인연이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며 각자 서툰 점을 이해하며 노력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스토너나 이디스나 스스로에 대해 너무 몰랐다.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계기가 스킨십부터였고, 이디스의 가정환경과 당시 사회적 환경에 비하면 스토너가 그리 ‘나쁜 남자’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아주 매끄럽게 ‘불행’을 보여 주었다.

#1

“Within a month he knew that his marriage was a failure; within an year he stopped hoping that it would improve.”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버렸다. ”



스토너가 거짓 사랑으로 이디스에게 청혼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디스에게 결혼은 ‘여성의 의무’처럼 짐 지워진 제도였나보다. 주체적으로 선택할 발언권도 없어 보였고, 스토너의 관심과 애정에 호응하거나 적응할 만큼 자기 인식력이 뛰어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젊은 청년 스토너의 이디스를 향한 애틋한 마음, 신혼으로서 결혼 생활을 잘해보려는 속 깊은 심리 묘사가 아름다웠다. 순수했다. 모든 것이 변한다지만, 스토너의 마음만은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내 마음과는 달리 이야기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끝내 아쉽고, 실망스럽다 못해 서로의 영혼이 성장하지 못하고 갉아먹는 형국으로 치닫는다. 그 깨달음이 소설 초입부터 이렇게 줄줄 새기 시작할 줄이야.


이걸 어떻게 묵묵히 다 참고 사나 싶을 정도로 스토너는 성실했다. 그게 너무 마음 아팠다. 스토너로선 이디스에게 어떻게 해 줘야 할지도 난제였겠으나, 무엇보다 결혼은 일상 아니던가. 딸 그레이스의 기저귀를 갈아치우고, 우유를 먹이며, 서재에서 책 육아까지 하는 모습이나, 이디스의 무리한 새집 마련으로 가계 재정이 휘청거려도 이래저래 빚을 청산해 가며(돌아가신 아버지 농지까지 팔아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은 경건함 그 자체였다. 문득, 내 결혼생활에 열정과 경건함, 성실함은 아직 유효한지 의문이 들었다. 스토너가 완벽한 실화는 아니더라도 중년 부부라면 심사숙고해 볼만한 부분이 여기저기 드리워진 건 확실하다.

#2

“He felt himself at last beginning to be a teacher, which was simply a man to whom his book is true, to whom is given a dignity of art that has little to do with his foolishness or weakness or inadequacy as a man.”


“이제야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일에 의미가 생겼다. 나도 나를 몰랐던 시절, 그때는 몰랐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가 트였다’는 소리를 들을 때. 스토너의 강의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저 사람, 진심인데’ 싶었는지 학생들도 먼저 예를 갖추고 제대로 배우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디스와 떨어져 있는 동안, 딸 그레이스와 서재에서 보내며 연구에도 전념했던 성실한 루틴의 쾌거다. 연구에 대한 진심, 예술의 존엄성은 인간으로서의 결점과는 무관하다는 말. 탐나는 표현이고, 느끼고 싶은 감정이다.


뻔한 소재와 형식으로 늘 우려먹으려는 강의가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 안에 진심이 살아 숨 쉬는 강의가 있다. 스토너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열정 궤도를 회상한다. 맨 처음 지식의 세계에, 젊은 날에는 이디스에게, 그리고 캐서린에게. 그러다 문득 알게 된다. 자신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고, 진짜 열정을 쏟아부었을 때는 그것이 열정인 줄도 몰랐다고. 그것은 마치 체육대회 계주 선수들이 바통터치를 하듯,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새로운 무언가가 바통을 이어 쥐고 다시 달리게 되는 이끌림 같은 걸까. 그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우리 모습일까. 나는 어디에 열정을 주며 살아왔나. 지금 그 열정의 주소는 어디인가. 스토너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한 중년 어디쯤 벌써 와 있는 것 같은데.


#3

“he knew, a small part of him that he could not deny was there, and would be there.”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 자아의 일부가 책 속에 정말 녹아들어 있으며, 그 활자와 문장들의 행간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과 정신의 열정 한 움큼은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사실, 중년의 깊은 슬픔을 이렇게 잘 묘사한 소설도 드물다. 존 윌리엄스 자아의 일부가 『스토너』에 녹아든 거라면, 나는 ‘스토너’라는 주인공을 통해 그의 자아를 보았다. 우울했던 하루가 차분하게 정돈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시종일관 자신의 삶을 관조하듯 서술하는 스토리를 따라가자니, 남의 인생이 내 인생 같고, 내 인생도 남의 인생 같다. 스토너만큼 자신의 삶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죽음이라면, 행복한 인생 맞다. 그러나 이 소설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평범한 인생이 재조명될 수 있었을까. 행복이라는 게 얼마나 철저한 판타지인가를 이렇게 사실적이면서도 잔잔하게 말해주는 소설이 또 있었나. 마지막 장까지 숨죽이며 읽었다. 스토너가 어떻게 될지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해서 도저히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어도 여전히

눈물 나는 지점, 먹먹한 지점, 답답한 지점에서 ‘스토너다웠던’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죽고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뭘 기대하고 있지?’ 라고.

“What did you expect?”

-『스토너』마지막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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