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방송(2024.10)
*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 <신문과방송> 2024년 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아카이빙을 위해 브런치에도 업로드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게재된 글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pfjra_&logNo=223606728609
지상파 방송의 스튜디오화가 확장되고 있다. SBS는 지난 해 11월, 예능 콘텐츠 제작 전문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프리즘’을 출범시켰고, MBC는 지난 6월 ‘모스트267’을 설립했다. 이번 스튜디오화는 특히 예능을 비롯한 ‘넌-스크립트’ 장르의 콘텐츠가 주된 대상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드라마 산업이 2000년대 아시아 한류의 과정 속에서 드라마제작사 중심의 구조로 변화한 것에 비해, 예능 콘텐츠와 같은 장르의 콘텐츠는 여전히 방송사의 인하우스 구조에서 기획-제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넌-스크립트’ 콘텐츠의 스튜디오화는 실질적으로 콘텐츠 제작 역량 측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영역의 외부화 전략이란 점에서 의미심장한 변화인 것이다.
OTT 경쟁의 심화에 따른 콘텐츠 전략의 변화의 결과
소위 '스튜디오 모델'이 한국 방송 산업에 도입된 것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을 시작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스튜디오 모델은 SLL과 같은 멀티레이블 체제, 스튜디오지니와 같은 그룹사 전체와의 연계 구조 등 다양한 유형으로 확산되었다. 이번의 지상파 방송사의 스튜디오 설립은 스튜디오 모델이 지금의 방송영상 산업 환경에 적합한 구조라는 인식을 업계가 공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튜디오화의 장점으로는 기존 지상파 방송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스튜디오는 채널 편성의 틀을 벗어난 콘텐츠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획-제작의 형태와 유형에서 자율성이 높다. 방송 채널 뿐 아니라 국내 및 글로벌 OTT로의 유통이 가능하며, 그렇기에 기존 편성의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운 기획이 가능하다. 기획의 타겟도 플랫폼의 성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다. 지상파의 규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으며, 다양한 협업과 외부 자원과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이번에 설립된 스튜디오들이 예능과 교양 등 ‘넌-스크립트’ 콘텐츠 분야의 경쟁력을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배경은 ‘넌-스크립트’ 콘텐츠 분야에 대한 산업 내에서의 중요성의 증가일 것이다. 글로벌 OTT를 통해 예능 콘텐츠의 해외 직접 유통 사례가 늘어나고 OTT 사업자들 간의 국내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면서, 예능 등의 넌-스크립트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수요의 확장은 기존 방송사 내부에 머물던 예능 PD 등 제작진의 외부 이탈을 가속화하는 요인이었다. 방송사 외부로 예능 콘텐츠 제작의 핵심 요소의 이동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고, 방송사 내부의 자원과 연결시킬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스튜디오 설립은 크리에이터의 외부 유출을 방어하는 동시에 외부로 이동한 다양한 자원들과의 협력을 통해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유통창구 확장의 시대, 콘텐츠 전략의 재구성
스튜디오 모델을 적용한다는 것은 지상파 방송사의 콘텐츠 유통 전략에서 변화가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튜디오는 관계사의 채널로의 콘텐츠 공급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어떤 채널, 어떤 플랫폼이든 전략적으로 이익이 되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유통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스튜디오 프리즘의 <더 매직스타>가 웨이브 플랫폼이 아닌 쿠팡 플레이로 유통되었다는 점은 스튜디오화가 가져올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유통 경로 다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초기에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를 통한 유통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시기를 지나면서, 다양한 로컬 OTT들과 방송사들과의 협업의 기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FAST 서비스도 새로운 유통 창구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다변화된 경로를 고려한 사업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선 보다 유연한 실행이 가능한 조직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2024년 10월에 지상파 3사와 웨이브와의 콘텐츠 공급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앞서 지상파 방송사의 스튜디오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OTT가 주도하는 시장 변화가 대략 5년에 걸쳐 진행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이제 기존에 맺은 다수의 계약 들이 재조정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앞으로 합종 연횡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따라, 영상 콘텐츠 산업의 지형도 달라질 수 있다. 지상파 방송사의 스튜디오화는 지금부터의 새로운 ‘판’에서 콘텐츠 경쟁력을 내세운 새로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인 것이다.
콘텐츠 유통의 전략은 앞으로도 다양하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동일한 콘텐츠의 유통 다각화 뿐 아니라, 포맷 변경 등 재제작 전략, 콘텐츠 프랜차이즈 전략 등을 고민해야 되는 시기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채널 시대의 관성을 넘어서서 기획 초기 단계부터 콘텐츠의 성장 경로를 다양하게 고민할 수 있는 역량을 스튜디오를 통해 축적해나가야 할 것이다.
어떤 스튜디오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고민해야 할 때
스튜디오화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갈등의 요소 역시 품고 있다. 당장 인력의 이동과 역할의 조정을 고민해야 한다. 방송사 내부 구성원 입장에선 핵심 자산인 콘텐츠IP가 채널 외부에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채널과 스튜디오가 서로 다른 인센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의 지점이다. 시청률 기반의 광고 판매 성과가 주된 성과 지표인 채널의 관행과, 다양한 유통 경로를 활용하며 확장하는 사업의 성과 평가 사이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할까? 자칫 상호 협력을 통한 시너지 효과 보다는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존 스튜디오들도 채널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 사실상 별도의 조직으로서 때로는 경쟁적 관계를 맺는 방식도 있는가 하면, 하나의 사업부와 같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방식도 있다. 지금은 스튜디오화 자체 보다, ‘어떤 스튜디오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2015년 특수관계자 제작 프로그램 편성 비율 제한 규정 폐지를 시작으로, 스튜디오화가 본격화되었다. 2016년 스튜디오드래곤과 몬스터 유니온이 설립되었고, 2020년 스튜디오S가, 2021년에는 KT스튜디오지니가, 2022년에는 SLL 스튜디오가, 2023년에는 CJ ENM 스튜디오스와 스튜디오 프리즘이, 2024년에는 모스트267이 출범했다. 이제는 오히려 스튜디오 모델을 적용하지 않은 방송사를 찾기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한국 영상콘텐츠 산업의 글로벌 연계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다. 이미 한국의 영상 콘텐츠 산업은 내수 시장의 규모만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확장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국내 시장의 한계를 넘어서, 누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스튜디오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상파 방송사는 국내 시장에선 채널을 가진 플랫폼의 위치이지만 글로벌 시장에선 콘텐츠 경쟁력을 요구받는 사업자의 위치에 놓인다. 영국의 BBC 조차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플랫폼이 아닌 콘텐츠 중심의 역량을 강조한다. 글로벌로 확장된 영상 콘텐츠 시장에서는 유통 채널과 IP활용의 다각화를 고려한 체계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스튜디오는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한 전문조직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상파 방송사들이 기존의 규제를 넘어서기 위한 전략으로 스튜디오화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책적인 고민도 필요할 것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스튜디오화는 기존의 관성적인 방송 산업에 대한 시각을 다시 돌아봐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