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
고전의 재창조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다.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재개봉하고, 책을 다시 번역해서 출간하거나, 더 나아가 고전이라 일컫는 작품을 리메이크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재창조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난다. <빨강머리 앤>은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NETFLIX에서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상영 중이고, 이를 기반으로 한 도서도 꽤 있다. 그러면 왜 빨강머리 앤일까. 수많은 고전 중, 수많은 고전의 수많은 캐릭터 중 왜 빨강머리 앤이 가장 요즈음 주목을 많이 받을까.
뻔하디 뻔한 말이지만 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 앤은 우리가 험난한 정글을 헤쳐나가는 와중 희미해진 우리 안의 무언가를 비춘다. 가령 우리는 모두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 같은, 뻔하지만 꽤나 오랜 기간 잊어 이미 색이 바랬지만 예전에는 그 무엇보다 빛났던 사실을 일깨운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쉴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 시대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사는 게 그 무엇보다 어려운 시대에, 사람은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주체라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지켜지기 어려운 인간의 본질을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앤은 스스로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인생에 있어 본인이 내리는 선택이 일련의 기준에 따라 진취적인, 혹은 보수적인 틀로 규정되는 것에 개의치 않고, 본인의 선택을 신념을 가지고 실현해 나간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교 입학 장학금을 수여하는 것도 앤 이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하는 것도 앤 이다. 인생의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선택을 하든 간에 앤은 자신의 주체로서 행동한다. 앤의 인생 여정을 따라 함께 걷다 보면 묘하게 문득 나의 인생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는 이 나이 때 어떻게 행동했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앤과 걸으며 자연스럽과 그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독서를 넘어 일종의 체험이다.
앤은 아름다운 여성, 천진난만한 마음을 가진 소녀, 누구보다 멋진 대학 생활을 하는 대학생,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엄마, 남편을 존중하는 아내이자, 진취적이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박애주의자, 행동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이다. 즉, 앤은 우리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에게 받는 위로는 뻔해도 지겹지가 않다. 인물의 궤적 그 자체가 커다란 위로이자, 우리의 잊고 있던 스스로의 고귀함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기에. 그렇기에 뻔해도 <빨강머리 앤>이다.
"만약 '앤'이라고 부르실 거면 E를 붙인 앤(Anne)이라고 불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