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 맹목적 의지의 알고리즘과 권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AI

by 미몽

맹목적 의지의 알고리즘권태시계추를 멈추는 법


프롤로그: 손가락 끝에서 사라지는 영혼

새벽 3시. 당신은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습니다. "마지막 영상만 보고 자야지"라고 스무 번도 넘게 다짐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화면을 쓸어 내립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당신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당신보다 더 정확히 압니다. 틱톡은 당신이 웃을 타이밍을, 넷플릭스는 당신이 울 장면을 이미 계산해두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음식을 부르고, AI는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나보다 더 정확히 예측해 눈앞에 펼쳐놓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대인의 정신적 공허함과 무기력은 그 어느 때보다 깊습니다.


19세기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이 기이한 풍요 속의 빈곤을 이미 200년 전 예견했습니다. 그는 삶의 본질이 고통이며, 욕망의 충족은 잠깐의 착각일 뿐이라고 논했습니다. 그렇다면 AI라는 욕망 충족 기계가 지배하는 이 시대,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경고한 지옥의 최종 버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https://youtu.be/5y7QOmVPelY?si=EeXFaRtWSsok9iLG

1. 맹목적 의지로서의 알고리즘: 끝없이 욕망하는 기계


세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닌 '의지'다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는 당시 철학계에 던져진 폭탄이었습니다. 헤겔과 칸트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이 세계를 이성적 원리로 설명하려 할 때,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이 '살고자 하는 맹목적인 의지(Wille zum Leben)'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의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적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고, 자기를 보존하고, 증식하려는 거대한 우주적 충동입니다. 나무가 햇빛을 향해 뻗는 것도, 동물이 번식하는 것도,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것도 모두 이 맹목적 의지의 발현입니다.


알고리즘: 의지의 완벽한 디지털 화신


현대 사회에서 이 '맹목적 의지'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형태가 바로 알고리즘입니다. 페이스북의 뉴스 피드 알고리즘, 유튜브의 추천 시스템, 틱톡의 For You 페이지—이들은 모두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달립니다. 사용자 참여의 극대화를 위해서입니다.


알고리즘은 도덕적 가치나 인간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사용자의 클릭을 유도하고, 체류 시간을 늘리며, 데이터를 흡수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마치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처럼, 알고리즘은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작동합니다.


우리가 유튜브 피드를 끝없이 새로고침하는 행위는, 우리 안의 결핍된 의지가 알고리즘이라는 외부의 맹목적 의지와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끝없는 갈증의 변주곡입니다. 두 개의 맹목적 의지가 서로를 먹이로 삼아 영원히 회전하는 *우로보로스의 춤입니다.


*우로보로스(Ouroboros)의 춤':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뱀, 우로보로스는 끝없는 순환과 자기 파괴적 욕망을 상징합니다.


의지의 이중 포획: 우리는 욕망하도록 욕망당한다


더 끔찍한 것은 이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욕망을 읽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형성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원하도록 만든 것을 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선택할 수 없다." AI 시대에 이 문장은 더욱 섬뜩한 진실이 됩니다. 우리는 클릭할 자유가 있지만, 무엇을 클릭하고 싶어질지는 이미 알고리즘이 결정해놓았습니다.


2. 개별화의 원리와 알고리즘의 '가짜 개별성'


표상의 세계: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표상(Vorstellung)'이라고 불렀습니다. 칸트의 영향을 받은 이 개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물 자체(Ding an sich)'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틀을 통과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시간, 공간, 인과율이라는 틀을 통해 대상을 구분합니다. 이를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라고 합니다. 이 원리 때문에 우리는 "나"와 "너"를 구분하고, "여기"와 "저기"를 나누며, "과거"와 "미래"를 다르게 인식합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이 개별성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하나인 '의지'이며, 우리는 그저 의지가 쪼개져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한 줄기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일곱 색깔로 분리되는 것처럼, 하나의 의지가 개별화의 원리를 통과하며 무수한 개체로 나뉘어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만을 위한": 개인화의 환상


현대의 알고리즘은 우리를 '개별적 존재'로 대우하는 척합니다. "당신만을 위한 추천", "맞춤형 콘텐츠", "개인화된 경험"—이런 문구들은 우리의 자아를 치켜세우며 우리가 특별하다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진정한 개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수천 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분해합니다. 나이, 성별, 지역, 클릭 이력, 체류 시간, 스크롤 속도, 좋아요 패턴... 이 데이터들은 통계적 모델을 통해 처리되고, 우리는 "30대 남성, 테크 관심, 야간 사용자" 같은 군집(cluster)으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개별성'은 파편화된 데이터의 집합일 뿐,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통찰'을 가진 주체적 자아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만든 통계적 범주 안에서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환원됩니다.


마야의 베일: 개인화라는 착각


쇼펜하우어는 인도 철학의 '마야(Maya)' 개념을 빌려와 개별화의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마야는 '환영의 베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마야의 베일이 우리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일을 걷어내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의지에서 나온 동일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AI 시대의 '개인화'는 새로운 형태의 마야의 베일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당신은 특별합니다"라고 속삭이며 베일을 씌우지만, 실상 그 베일 뒤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한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데이터 개체일 뿐입니다.


3. '충족근거율'의 지배와 알고리즘의 인과 관계


왜(Why)라는 감옥


쇼펜하우어의 박사 학위 논문 『충족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1813)는 인간의 지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지성은 모든 것에 대해 '왜?'라는 근거를 찾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족근거율(Satz vom Grunde)입니다. 우리는 "왜 비가 내리는가?",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가?", "왜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 법칙은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존재의 근거(공간과 시간), 생성의 근거(인과율), 인식의 근거(논리), 행위의 근거(동기).


알고리즘: 인과율의 완벽한 구현


알고리즘은 철저히 이 충족근거율, 특히 인과율에 따라 작동합니다. "A를 클릭했으니(원인) B를 좋아할 것이다(결과)." 이 인과관계의 사슬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당신이 고양이 영상을 봤다 → 귀여운 동물 콘텐츠를 추천한다

그 추천을 클릭했다 → 애완동물용품 광고를 보여준다

광고를 스크롤하지 않고 봤다 → 당신을 '잠재 반려동물 소유자'로 분류한다

당신이 검색창에 "강아지 사료"를 입력했다 → 반려견 커뮤니티를 추천한다


이 인과의 사슬은 우리를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듭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예측이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된다는 점입니다. 알고리즘이 우리가 B를 좋아할 것이라고 예측해서 B를 보여주면, 우리는 실제로 B를 보게 되고, 결과적으로 B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지성의 노예화: 우리는 생각하는가, 아니면 알고리즘이 생각시키는가?


쇼펜하우어는 지성이 의지의 도구로 전락할 때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원래 지성은 의지에서 벗어나 세계를 순수하게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성은 의지의 하인 노릇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욕망을 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만 봉사하는 것입니다.

AI 시대에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됩니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인과관계 속에 머무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닌 '기계의 의지'가 만든 논리적 사슬에 묶여 살게 됩니다. 우리의 지성은 이제 우리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알고리즘이 설계한 욕망의 경로를 따라가는 2차 하인이 되어버렸습니다.


4. 욕망-충족-권태의 시계추: AI가 줄 수 없는 '만족'


삶은 고통과 지루함 사이의 진자 운동이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유명한 통찰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의 논리는 명료하고 잔인합니다.


1단계 - 욕망(고통): 무언가를 원할 때 우리는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습니다. 배고프면 고통스럽고, 사랑받고 싶으면 외로움이 고통스럽고, 인정받고 싶으면 무시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2단계 - 충족: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아주 짧은 쾌락이 스쳐 지나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받거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좋아요가 달리는 순간의 기쁨입니다.


3단계 - 권태: 하지만 이 충족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맛있던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립니다. 메시지의 설렘도 금방 사라집니다. 좋아요 100개가 기뻤다면, 다음엔 200개가 필요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지독한 지루함과 공허에 빠집니다.


4단계 - 새로운 욕망: 권태를 견디지 못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욕망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1단계로 돌아갑니다.


알고리즘이 가속화한 시계추: 권태의 고속화


AI 추천 시스템은 이 시계추의 속도를 비정상적으로 가속화합니다. 과거에는 욕망을 충족시키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서점에 가야 했고, 음악을 듣고 싶으면 CD를 사야 했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극장 시간표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욕망이 익어가는 시간이었고, 우리가 "나는 정말 이것을 원하는가?"를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충족이 지연되면서 욕망은 깊어졌고, 그만큼 충족의 기쁨도 더 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갈구하기도 전에 AI는 '충족'을 던져줍니다.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틱톡이 재미있는 영상을 띄웁니다.

뭘 들을까 고민하기도 전에 스포티파이가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줍니다.

뭘 먹을까 생각하기도 전에 배달앱이 "이번 주 인기 메뉴"를 보여줍니다.


기다림과 사유가 생략된 즉각적인 만족은 필연적으로 더 깊고 빠른 권태를 불러옵니다. 충족이 너무 쉽게 오면, 그 가치는 하락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숏폼 영상을 보면서도 "재미없다"고 느끼며 손가락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권태의 늪에 빠진 의지가 관성적으로 다음 자극을 구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쾌락의 역설: 왜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공허한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행복은 부정적이다.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일 뿐,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고통의 부재를 잠깐 착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AI 추천 시스템은 이 착각조차 빼앗아갑니다. 고통(욕망)이 생기기도 전에 충족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 배가 고파야 음식이 맛있고, 목말라야 물이 달지만, 우리는 배고픔을 느낄 틈도 없이 추천 음식을 주문하고, 갈증을 느낄 새도 없이 다음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결과는? 만성적인 무감각과 공허함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5. 고통의 형이상학: '결핍'을 생산하는 기계


존재한다는 것은 곧 고통받는다는 것


쇼펜하우어에게 고통은 단순히 불운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고통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항상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욕망이 채워지면 즉시 다른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의지는 영원히 갈증에 시달리는 탄탈로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탄탈로스는 물 앞에 서 있지만 물을 마시려 하면 물이 사라지고, 과일 앞에 있지만 과일을 따려 하면 가지가 올라가는 형벌을 받습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족은 항상 우리 손끝에서 사라집니다.


알고리즘이 제조하는 결핍


AI 알고리즘은 우리의 결핍을 메워주는 척하면서, 실상은 새로운 결핍을 끊임없이 제조합니다.


쇼핑 알고리즘을 생각해보세요. 아마존이나 쿠팡이 제안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대부분은 우리에게 없던 욕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공기청정기가 없으면 당신의 폐 건강이 위험합니다"

"이 책상 정리함이 없으면 당신의 생산성은 떨어집니다"

"이 운동기구가 없으면 당신의 다이어트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이런 제안을 받기 전까지 공기청정기의 부재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결핍을 의식화시킵니다. "당신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당신은 불완전합니다."


욕망의 런닝머신: 영원히 달리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욕망이 채워지는 찰나의 순간(결제 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배송 완료 알림을 받는 순간)이 지나면, 의지는 다시 공허해집니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이 공허함을 틈타 또 다른 추천을 던집니다.


"이 제품을 구매한 고객은 이런 제품도 구매했습니다."


우리는 욕망의 런닝머신 위에 영원히 서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우리는 제자리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구매해도 우리는 여전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은 우리의 결핍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만, 더 많이 원한다." AI 시대에 이 말은 더욱 정확해집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소유할수록 더 많이 원하도록 만듭니다.


6. 쇼펜하우어의 처방: 의지의 부정과 예술적 관조


첫 번째 길: 의지의 부정


이 끔찍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요?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의지의 부정(Verneinung des Willens)'입니다. 이는 욕망의 흐름을 거스르는 금욕적 태도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도의 고행자, 기독교의 성자, 불교의 승려들을 예로 들며, 이들이 욕망을 끊어냄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의지의 부정은 단순히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더 이상 원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역설적인 의지입니다. 욕망 자체를 거부하는 메타-욕망입니다.


AI 시대의 의지 부정은 '알고리즘의 추천을 거부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자동 재생을 끕니다.

추천 피드를 보지 않습니다.

알림을 끕니다.

스마트폰을 끕니다.


이것은 추천 피드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결을 끊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 예술적 관조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두 번째 길 '예술적 관조(ästhetische Kontemplation)'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부정보다 더 접근 가능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순수하게 감상할 때, 우리는 '이것이 나의 욕망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실용적 계산을 멈추게 됩니다. 아름다운 풍경화를 볼 때, 우리는 "저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저기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봅니다.


이때 인간은 욕망의 주체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식의 주체(reines Subjekt des Erkennens)'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를 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이 됩니다. 시간이 멈추고, 자아가 사라지고, 오직 아름다움만이 남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위계를 만들었습니다. 건축은 가장 낮은 단계(물질과 중력의 투쟁), 조각과 회화는 중간 단계(형태의 이데아), 시와 비극은 높은 단계(인간의 의지), 그리고 음악은 최고의 예술입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개별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적인 리듬, 의지의 숨결 자체를 듣습니다.


AI 시대의 예술적 관조: 가능한가?


하지만 AI 시대에 순수한 예술적 관조가 가능할까요? 스포티파이는 우리가 듣는 음악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인스타그램에서 본 그림은 즉시 '좋아요'와 '공유'라는 실용적 행위로 전환됩니다. 우리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적 관조를 위해서는 알고리즘이 분석할 수 없는 고유한 미적 체험이 필요합니다.


미술관에서 한 그림 앞에 30분 동안 서 있기

스마트폰 없이 콘서트에서 음악에만 집중하기

책을 읽으면서 밑줄 긋기를 멈추고 그냥 읽기

일몰을 사진 찍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


이런 경험들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은 내가 그림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어도, 내가 그 그림 앞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측정 불가능한 내면성만이
우리를 맹목적인 데이터의 흐름에서 구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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