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알고리즘의 인과율 끊기

맹목적 알고리즘의 인과율 끊기

by 미몽



1. '관조'의 회복: 알고리즘의 인과율끊는 법


무관심적 관조: 욕망 없이 바라보기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유일한 구원은 '무관심적 관조(interesseloses Wohlgefallen)'입니다. 이 개념은 칸트의 미학에서 빌려온 것으로, 대상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지, 내 욕망을 채워주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장미를 봅니다.

욕망의 시선: "이 장미를 꺾어서 집에 가져가면 좋겠다. 얼마에 살 수 있을까?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까?"

관조의 시선: 장미의 붉은색이 햇빛에 어떻게 반사되는지, 꽃잎의 곡선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그 형태의 완벽함을 그저 바라봅니다.


관조의 순간, 우리는 시간 밖으로 나갑니다. 과거(장미를 언제 심었을까)도 미래(장미가 언제 시들까)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사물을 바라본다고 표현했습니다.

https://youtu.be/GtR-uQbIwJQ

AI 시대의 '관조' 실천법


A. 목적 없는 브라우징의 거부


현대인의 인터넷 사용은 대부분 목적 지향적입니다. "필요한 정보를 찾는다", "원하는 상품을 구매한다", "궁금한 것을 해결한다." 이 모든 행위는 욕망(의지)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알고리즘에 의한 브라우징은 목적 없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의 목적(체류 시간 증가)에 봉사합니다. 우리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관조를 위해서는:

알고리즘이 절대 추천하지 않을 법한 무작위의 정보에 자신을 노출시키세요.

위키피디아의 "랜덤 문서" 기능을 사용하세요.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읽어보세요.

모르는 언어로 된 시를 읽어보세요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소리의 리듬만 느끼세요).


B. 데이터화될 수 없는 경험


알고리즘의 힘은 수치화(quantification)에서 나옵니다. 좋아요 수, 조회수, 평점, 체류 시간... 이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됩니다.

수치화할 수 없는 감각에 집중하세요:

숲길을 걷습니다. GPS를 끄세요. 몇 킬로미터를 걸었는지, 몇 칼로리를 소모했는지 측정하지 마세요. 그저 발바닥에 느껴지는 흙의 감촉,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패턴을 느끼세요.

스마트폰 없이 음악을 듣습니다. 재생 목록도, 가사도, 아티스트 정보도 보지 마세요. 그저 소리가 당신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세요.

일기를 씁니다. SNS에 올리지 않을 글을,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씁니다. '좋아요'를 받기 위한 글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알고리즘이 나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철학적 스텔스 모드입니다.


C. 지성의 도구화 거부


쇼펜하우어는 대부분의 인간이 지성을 의지의 도구로만 사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내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만 던집니다. 하지만 천재는 다릅니다. 천재는 지성을 의지에서 해방시켜 순수 인식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세계를 "내게 무엇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AI 시대의 지성 해방:

질문을 던질 때, "이게 나한테 유용한가?"를 먼저 묻지 마세요.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되, 실용성을 따지지 마세요.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돈을 벌게 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ChatGPT나 Gemini에게 질문할 때, "이걸 어떻게 활용하지?"보다 "이건 무엇인지"를 물으세요.



2. 연민(Mitleid)의 윤리학: 알고리즘 너머의 인간성


개별화의 베일을 찢을 때: 타자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된다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그의 형이상학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만약 개별화가 환상이고, 모든 존재가 하나의 의지에서 나왔다면, 타인의 고통은 실제로 나의 고통입니다.


연민(Mitleid, 문자적으로 '함께-고통받음')은 이 형이상학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깨닫는 경험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진심으로 아파할 때, 나는 잠시 개별화의 베일을 찢고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느낍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이 모든 진정한 도덕성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칸트의 정언명법 같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공감입니다.


알고리즘은 연민을 느낄 수 없다


AI 시대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연민의 소멸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각자의 맞춤형 피드 안에 갇혀, 우리는 점점 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추천 알고리즘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콘텐츠만 보여줍니다. 나와 다른 의견, 다른 경험, 다른 고통은 필터링됩니다.

소셜 미디어는 타인을 경쟁자로 만듭니다. 누가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지, 누가 더 성공적인 삶을 사는지 비교하게 됩니다.

온라인 상호작용은 비신체적입니다. 상대방의 얼굴 표정, 목소리 톤, 몸짓을 보지 못하면 공감은 약해집니다.


결과는 타인의 추상화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통받는 개별 존재가 아니라 통계, 숫자, 데이터 포인트가 됩니다. "난민 100만 명"은 숫자일 뿐, 각각이 우리와 똑같이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사라집니다.


연민의 실천: 알고리즘의 필터를 벗어나기


쇼펜하우어의 윤리를 AI 시대에 실천하려면:

필터 버블을 깨세요: 의도적으로 나와 다른 의견,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세요.

수치를 인간화하세요: 뉴스에서 "사망자 1000명"이라는 숫자를 볼 때, 그 중 한 명을 상상해보세요. 그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꿈이 있었습니다.

오프라인 만남을 가지세요: 스크린 너머가 아니라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세요. 신체적 현존은 공감을 강화합니다.

알고리즘이 '불편한' 콘텐츠를 피하지 마세요: 고통, 불의, 폭력에 대한 뉴스를 알고리즘이 걸러내지 못하도록 하세요. 불편함은 연민의 씨앗입니다.


3. 시간 밖으로: '누크 템포리스'와 알고리즘의 시간성


영원의 지금: 의지가 멈추는 순간


쇼펜하우어는 시간을 의지의 형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의지는 항상 미래를 향합니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말은 항상 "아직 갖지 못한 것"을 전제합니다. 욕망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음 순간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예술적 관조의 순간, 의지가 침묵할 때, 시간은 멈춥니다.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고 오직 '지금'만 남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누크 템포리스(nunc temporis)', 즉 '시간의 지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시간 속의 한 점이 아니라 시간 밖의 영원입니다.


알고리즘의 시간: 무한한 '다음'

알고리즘은 우리를 영원히 미래 시제 속에 가둡니다.

"다음 영상"

"더 보기"

"계속 시청"

"추천 항목"


모든 인터페이스는 우리에게 현재 순간을 떠나라고 속삭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영상의 썸네일이 떠오르고, 우리의 주의는 이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달립니다. 틱톡을 스크롤하는 행위는 완벽한 은유입니다. 우리는 계속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지만, 결코 바닥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무한 스크롤은 무한한 미래, 무한한 약속, 그리고 무한한 실망입니다.


'지금'을 되찾기: 시간의 주권

알고리즘의 시간성에서 벗어나려면:

자동재생을 끄세요: "다음 영상"을 선택하는 권리를 되찾으세요. 한 편을 보고 의식적으로 멈추세요.

완결된 경험을 하세요: 무한 스크롤이 아니라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활동을 하세요.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한 곡의 교향곡을 끝까지 들으세요.

지루함을 견디세요: 알고리즘은 우리가 단 1초도 지루하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루함은 시간을 느끼는 능력입니다.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고, 역설적으로 현재에 깨어납니다.

기다림의 미학: 즉각적인 만족을 거부하세요. 답장을 기다리고, 배송을 기다리고, 결과를 기다리세요. 기다림은 시간을 의식하게 하고, 도착의 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듭니다.



4. AI 시대의 적용: 알고리즘의 추천을 거부하기, 과연 가능하고 정당한가?


질문: "하지만 불편하지 않을까요?"


혹자는 묻습니다. "알고리즘을 거부하면 트렌드에서 뒤처지고 불편해지지 않을까요? 효율성을 잃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까요?"


쇼펜하우어라면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불편함이야말로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의지의 노예가 아님을 증명하는 고귀한 저항이다." 편리함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편리함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편리함의 대가는 자율성(autonomy)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대가로 선택의 주권을 내어줍니다.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주체성을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추천받지 않고 스스로 검색하는 불편함

알고리즘이 걸러주지 않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판단하는 불편함

즉각적인 답이 아니라 천천히 사유하는 불편함


이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가능성: 완전한 거부는 불가능하지만, 주도권은 가능하다

알고리즘을 100%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


작은 저항의 실천들:

홈 화면을 비우세요: 스마트폰 홈 화면에서 SNS 앱을 제거하세요. 앱에 접근하려면 의식적으로 검색해야 하도록 만드세요.

알림을 끄세요: 모든 푸시 알림을 끕니다. 당신이 앱을 열 타이밍을 앱이 아니라 당신이 결정하세요.

검색을 사용하세요: 추천 피드를 스크롤하는 대신, 보고 싶은 것을 직접 검색하세요. "알고리즘이 나에게 무엇을 보여줄까?"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를 물으세요.

시간 제한을 설정하세요: 앱 사용 시간을 제한하세요. 제한에 도달했을 때 "15분 더"를 누르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 되도록 하세요.

아날로그 대안을 찾으세요: 전자책 대신 종이책, 스포티파이 대신 CD, 디지털 노트 대신 종이 일기장. 아날로그는 알고리즘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알고리즘이라는 거대한 의지의 파도 속에 나만의 작은 섬을 만드는 일입니다.


당위성: 이것은 도덕적 의무다

추천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이것은 도덕적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자율성은 인간 존엄의 핵심입니다. 칸트가 말했듯이,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알고리즘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은 스스로를 수단(데이터 생산자, 광고 소비자)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개별성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알고리즘이 분류한 '30대 남성, 테크 관심자, 야간 사용자'라는 데이터 라벨을 떼어내고, 내가 진짜 누구인지를 묻는 '철학적 멈춤'이 필요합니다.

사유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천재를 "세계를 의지의 도구가 아니라 순수 인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알고리즘이 모든 사유를 대신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천재는커녕 생각하는 존재조차 되지 못합니다.


5. 존재의 무게를 되찾기: 디지털 금욕주의


쇼펜하우어의 금욕주의와 디지털 단식


쇼펜하우어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금욕을 의지의 부정의 표현으로 존중했습니다. 그는 인도의 요기, 기독교의 수도자, 불교의 승려들이 육체적 욕망을 거부함으로써 의지의 사슬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보았습니다.

21세기의 금욕주의는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디지털 욕망의 거부입니다.


디지털 단식의 실천:

디지털 안식일: 일주일에 하루, 모든 디지털 기기를 끕니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TV도. 19세기 사람처럼 하루를 살아봅니다.

소셜 미디어 사순절: 한 달 동안 모든 SNS를 삭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디톡스'가 아니라 자아를 재발견하는 영적 수련입니다.

기술적 미니멀리즘: 꼭 필요한 앱만 남기고 모두 삭제합니다. 칼 뉴포트(Cal Newport)의 "디지털 미니멀리즘"은 쇼펜하우어의 금욕주의를 21세기로 번역한 것입니다.

침묵의 공간: 하루 중 일정 시간(아침 첫 1시간, 잠들기 전 1시간)은 완전한 침묵을 유지합니다. 어떤 입력(input)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과 대화합니다.


존재의 무게: 가벼움의 불가능한 무거움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물었습니다: "가벼움과 무거움, 무엇이 더 긍정적인가?" 디지털 시대는 존재를 극도로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끝내고, 무한한 선택지 앞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경험하지만 아무것도 깊이 느끼지 못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존재의 무게를 되찾으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과의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는 무거움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무거움

한 가지 기술을 10년 동안 연마하는 무거움

하나의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무거움


이 무거움이 부담스럽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짜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결론: 알고리즘 거부의 형이상학적 의미


작은 거부, 큰 의미

알고리즘의 추천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들끓는 '맹목적인 의지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숭고한 도덕적 결단입니다. 우리가 "다음에 볼 영상" 버튼을 누르지 않고 화면을 끄는 순간, 우리는 욕망과 권태 사이를 무의미하게 오가던 시계추의 진동을 멈추고, 잠시나마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짧은 멈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사건을 일으킵니다.


의지의 폭주를 멈추는 것입니다: 나를 끊임없이 결핍으로 몰아넣는 알고리즘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분리합니다.

시간의 주권을 되찾는 것입니다: 기계가 설계한 선형적 시간에서 벗어나, 오직 '현재'라는 순수한 순간에 머뭅니다.

순수한 인식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소비하는 '입'이 아니라,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회복합니다.

자율적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통계적 데이터의 일부가 아닌, 고유한 도덕적 주체임을 선언합니다.


멈춤의 미학: 퇴보가 아닌 각성

멈춰 서는 것은 퇴보가 아닙니다. 폭주하는 욕망의 기차에서 내려와, 비로소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묻는 '각성'의 시작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의지의 노예"라고 말했습니다. 알고리즘이 내미는 달콤한 추천은 실상 우리를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 가두는 쇠사슬과 같습니다. 이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효율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계적 필연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로운 사유의 영역으로 복귀시키는 숭고한 저항입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을 거부하고 마주하는 그 짧은 '적막'은 공허가 아닙니다. 그곳은 비로소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나의 진정한 본질이 숨 쉬기 시작하는 성소입니다.


이제 손가락 끝의 관성을 멈추십시오.

그 멈춤의 끝에서, 당신은 비로소 세상의 '표상'을 넘어 당신만의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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