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걷고 또 걸었다
처음 걸어보는 낯선 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공포를
심장을 뜯어내고 싶은 슬픔을
앞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스로 무릎 꿇게 하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나를 짓눌렀다
그 어둠의 끝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 낯선 '나'였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내 발아래 놓여 있는 그 무엇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오며,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피맺힌 나의 손톱뿌리와 단 한 번도 응답받지 못한 신의
침묵을 그곳에 묻었다.
새벽여명의 푸르름처럼 가느다랗게 떨리는, 아직은 따뜻해지지 않은 한줄기 푸른빛을 보며 터널의 끝을 직감했다.
곧.
몇 걸음.
내가 걸어온 이 터널의 끝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나는 무작정 '이 터널만 지나면'이라고 단정 지었을까.
그리고 한줄기 푸른빛을 보며 '단 몇 걸음'이라고 어떻게 확신했을까.
어둠이 깔린 터널은 내 몸을 숨겨줄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며 들어간 곳이었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내 의지대로 다시 되돌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도 의심도 불안도 없었다.
내가 당장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피해 잠시 숨어있다가 나오려고 발을 들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일까? 발가락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캔버스 운동화를 붉게 물들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내 그림자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 순간, 그 한순간에 휘몰아쳐 들어오는 공포는 온몸 세포 하나하나를 바늘로 찌르는듯한 통증으로 몰려왔다.
온몸으로 퍼지는 날 선 가시들과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구역질이 나를 허무하게 주저앉혔다.
이건 꿈일 거야! 이럴 순 없어! 나는 돌아갈 거야!
그렇게 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슴푸레한 밝은 빛이 내 눈두덩이를 비추는 듯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있었는지 눈을 뜨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일어섰다. 한참 만에야 알아차린 나의 그림자.
확실한 윤곽은 아니었지만 내 그림자가 틀림없었다.
내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끝에 다다른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두근거림, 설렘, 행복, 환희, 사랑,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의 눈물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빛은 점점 밝아져 갔고 나는 조용히 뒤따르는 그림자를 확인하려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감히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던 깊고 어두운 삶의 시간을 조용히 인내하며 살아냈다.
어쩌면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무겁고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알아차려지게 된 것들은 그 어두운 길을 내가 왜 걸었어야 했냐는 것이었다.
내가 계획한 모든 일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내가 조금만 고개 들려고 하면 가차 없이 짓밟히게 만들고, 나의 의지와 생각 따위는 절대 용납되지 않았던 그 과정들이, 철저하게 나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듯한 그 모든 일들이 나를 진정한 나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신성한 시간들이었음을 나는 빛을 향해 걸어 나가며 알아차렸다.
그토록 응답을 간구하는 내게 신은 왜 침묵으로 응답했는지 비로소 알아차렸다.
책장 안에서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을 슬며시 꺼내 들었다.
내 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모두 일어나기로 결정된 나의 선택이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내가 선택한 삶을 내가 외면하며 도망치는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나의 꿈과 지금은 퇴색되고 얼룩져버린 나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스스로 속이며 또 다른 나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신의 침묵은 경고였다.
그렇게 침묵으로 경고하였으나 그 또한 못 본 척 외면했다.
가끔씩 나에게 찾아오는 결핍 같은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드물게 한 번씩 글을 쓴다거나 누군가에게 손 편지를 쓰며 나름의 결핍을 채워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몰입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 큰 위로를 주고 행복을 알게 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저 그런 것들이 사치라고 여겨질 만큼 버거운 삶을 살아내야 했다.
결국 진정한 내 삶이 아닌 세상의 본질에 맞춰서 억지로 끌어다 사는 삶은 그 자체가 지옥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너져 내린 내 삶을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시간들이 어쩌면 내가 선택한 그 삶으로 옮겨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직 다 뜨지 않은 태양의 언저리에서 빛나는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으로도 곧 밝아질 것을 아는 것처럼...
사진 참조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