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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코홀릭 Nov 05. 2017

#10. 그곳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로마 황제가 사랑한 도시 -  스플리트


 해안선을 따라서 쭉쭉 뻗은 야자수 나무와 보기만 해도 시원 해지는 푸른 하늘과 지중해 바다.

그리고 그 바다를 바라보며 줄지어 늘어선 레스토랑들. 노천카페에 앉아 제대로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과 그들 속에 섞여 자연스럽게 커피 한 잔 혹은 낮술쯤은 일상인 듯 잔을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을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유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았던 도시에 도착했다.


아드리아해를 마주하는 스플리트의 리바거리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꼽으라면 단연코 두브로브니크일 터.

스플리트는 두브로브니크 다음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휴양도시로, 자그레브를 시작으로 두브로브니크까지 내려가는 여정에 있어 딱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라서 꼭 한 번은 들려봄직한 장소이다. 눈 앞에 펼쳐진 맑은 바닷물과 해안산책로와 붉은 지붕들이 어우러져 낮이나 밤이나 낭만을 자아내는 스플리트는 로마 황제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라고 한다. 스플리트의 얼굴이자 관문이라 볼 수 있는 리바 거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왜 로마 황제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분위기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가득한 리바 거리는 언제 걸어도 좋다.

하지만 개인적인 내 생각으로는 햇살 좋은 날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전인 이른 아침에 산책하듯이 걷는 리바 거리가 정말 너무 좋았다. 조금 더 지중해의 햇살에 집중할 수 있고, 반짝이는 아드리아해의 아침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만약, 나는 죽어도 아침형 인간은 못하겠다는 여행객들에게는 해 질 무렵의 낭만 그 자체인 리바 거리도 추천한다. 만약 그 시각에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리바 거리를 거닌다면 분명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황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니.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며 광합성 중인 사람들


 특히, 온화한 기후와 크로아티아 최대의 일조량을 자랑하는 스플리트에서는 그래서인지 유독 바다를 바라보며 새하얀 벤치에 앉아 광합성 중인 사람들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기후조건 덕분에 스플리트는 라벤더의 천국이라 불린다. 엄밀히 말하면 스플리트에서 일반 페리로는 편도 2시간, 고속페리로는 편도 1시간이 걸리는 위치에 있는 흐바르(Hvar)라는 이름의 섬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크로아티아 최대의 라벤더 재배지이다. 라벤더가 만발하는 여름이 되면 섬 전체에 라벤더 향이 퍼져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든 24시간 내내 라벤더에 취해있을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번엔 봄의 크로아티아 여행이라 흐바르 섬에 가지 못해 너무나 아쉽지만, 라벤더로 가득 뒤덮인 보랏빛 흐바르 섬을 볼 수 있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 아쉬움을 스플리트에 더 투자하는 걸로.


스플리트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종탑 전망대


 스플리트 역시도 정말 작은 도시라 크게 여행 계획이 필요 없다.

도착한 첫날,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한 바퀴 쓱 돌다 보면 다음날부터는 여행책을 숙소에 두고 나와도 구글 지도가 없어도 여행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도시이다. 아니, 어쩌면 여행지라는 말보다는 휴양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스플리트니까.


스플리트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자동차가 내부까지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렌터카 여행객들은 주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짐을 끌고 기꺼이 궁전 내부로 들어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정녕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불평불만을 가지면 안 될 것이다. 작지만 나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규칙을 잘 지키고 따라야지 지금 내가 보는 이 멋진 풍경과 문화유산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유네스코에서 도시 전체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비록 무거운 짐이 양손에 있을지언정 스플리트는 마주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고 저절로 찬사를 입에 올릴 수밖에 없음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를 다녀간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지하 상점가


 스플리트 여행은 그 이름도 어려운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Dopcletian's Palace)에서 시작해서 궁전에서 끝이 나는 것 같다.

궁전 주변을 크게 돌아보아도 좋고, 궁전 안을 구석구석 누비는 것도 좋다. 약 1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규모는 작지만 스플리트의 주요 볼거리가 이곳에 모두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네 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인 실버 게이트는 그린 마켓으로, 서문인 아이언 게이트는 마르몬토바 거리로, 남문인 브론즈 게이트는 리바 거리로, 북문인 골든게이트는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과 연결이 된다. 즉, 스플리트의 어떤 장소로 가든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중심에 있는 셈이다.


300여년 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모습을 한 기념품


 로마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본인이 은퇴 후 살기 위하여 이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스플리트 근교 섬인 브라츠 섬에서 최고급 대리석을 가져오고, 이집트에서 화감암과 스핑크스를 가져오는 등 화려하게 꾸며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장소로 인정받고 있다. 보통 고대의 궁전이라 하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지만 구경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본 후에는 나올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명소'이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만큼은 조금 다르다. 단순히 과거의 공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도 스플리트 시민들은 궁전 안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장사를 하고, 사람을 만나는 등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살아 숨 쉬는 현재인 것이다. 즉, 1700여 년 전에 로마 황제도 지나갔던 거리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의 발길이 닿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말 독특하고 묘한 매력의 장소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스플리트 나로드니 광장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밖에 위치한 아담한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과 카페, 레스토랑들이 조화를 이루는 작고 앙증맞은 느낌까지 드는 나로드니 광장(Narodni Square)에는 중세 시대에 만든 종탑과 시계, 그리고 15세기에 만들어져 오늘날에는 전시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시청사(Town Hall)가 있다. 리바 거리의 활기참에 비하면 나로드니 광장은 조금은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랄까, 차분하달까. 뭔가 광장이라 하면 시끌벅적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 정신이 없기도 한 느낌인 데에 반해 나로드니 광장은 굉장히 품격 있는 느낌이었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시계탑이 내려다보고 있는 나로드니 광장에서 난 잠깐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여행을 참 좋아하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두 가지가 바로 커피 그리고 맥주.

즉, 여행지에서 커피와 맥주를 마신다는 건 나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명품 가방을 품에 안은 느낌과 비슷하다. 사실 그런 명품 가방을 가져본 적이 없어 그 느낌을 잘 모르겠으나, 마구 가슴이 벅차오르고 행복하고 소중하지 않으려나. 물론 난 명품 가방보다는 여행지에서의 커피 한 잔을 선택하는 쪽이지만 말이다.

시원한 맥주와 따뜻한 커피. 딱 봐도 너무나 다른 온도의 이 두 녀석들로 인하여 나의 하루가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나의 여행 일기장에 휘리릭 한 줄 써 내려간다. 지금의 이 느낌과 이 여유로움과 이 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기 위하여.  

게다가 크로아티아 물가가 너무 저렴해서 더 좋았다는 건 비밀로 해야 하나 여행 팁이라 해야 하나. 한국 돈 4,500원으로 맛있는 커피와 맥주, 그리고 이렇게 멋진 풍경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여행지에선 하늘을 자주 바라본다

 

나로드니 광장의 이름 모를 이 카페에서 거의 2시간은 앉아있었던 것 같다.

문득 떠나온 한국이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기사를 잠깐 보기도 하고, 책도 읽고, 여행 일기도 쓰며 정말 모처럼 여유다운 여유를 만끽한다. 보통 나의 여행 스타일은 분단위로 계획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빡빡하게,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하여 하루 2만 보는 기본으로 걸어 다니고,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최대한 많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남는 거라고 생각하며 다니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만큼은 여유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중이다. 각 도시마다 대부분의 관광지들이 모여있어 자연스럽게 시간 분배에 있어 여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자연환경과 현지인들의 삶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바쁜 여행객인 나조차도 자연스럽게 그 여유를 닮아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원래 그 나라의 민족성이 기후나 자연환경을 닮아있는 것이라 하더라. 아드리아해의 고요하면서도 반짝이는 바다와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햇빛을 매일같이 보면서 살아가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기는 걸까. 참으로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여유, 그 자체의 스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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