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르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오늘도 난 여전히 이른 아침 눈을 뜬다.
혹시나 늦잠을 자버릴까 알람 시계를 맞추었건만, 또 알람이 울리기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크로아티아에 온 이후로 줄곧 깨끗한 공기를 마셔서 그런걸까? 매일 밤 맥주를 마시고 잠에 들어도 숙취는 커녕 머릿속까지 깨끗하고 맑은 상태로 일찍 눈이 떠지니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침대를 벗어난 그 차림새 그대로 고양이세수도 하지않고 곧장 테라스로 나가 기지개를 켠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룻바닥 너머는 바로 허공이라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다. 오늘 자다르의 날씨는 매우 맑음.
외출준비를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섬주섬 어제 미리 사 두었던 빵과 애플주스로 가볍게 간식수준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자다르에서의 숙소선택은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올드타운에 위치한 곳이냐, 바닷가 근처냐. 난 고민없이 바다근처를 선택했고 그 이유는 지금부터다.
숙소를 나선지 5분도 채 되지않아 도착한 곳은 내가 자다르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
많은 여행객들이 자다르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일명 랜드마크 혹은 핫스팟이라고 말할 수 있는 '태양의 인사'와 '바다 오르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의 앞에는 푸르디 푸른 자다르의 바다가 펼쳐져있다. 숙소가 근처였던 덕분에 오며가며 이 공간을 여러번 밟고, 느끼고, 즐겼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묘하게 퍼지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바다의 노랫소리와 바다내음, 뺨에 닿는 촉촉한 공기, 따사로운 햇살... 물론 이들이 한 몫 크게 거들었겠지만, 난 그냥 이곳에 살고싶었다. 지금의 이 느낌을 매일 아침 느낄수만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고급빌라도 멋진 스포츠카도 명품가방도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냥 자다르는 나에게 살고싶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유럽여행을 하면서(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정말 언젠간 꼭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도시가 딱 2곳이다. 에펠탑과 미식가들의 천국, 파리지앵의 도시인 프랑스의 파리도 아니오, 수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피자와 파스타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도 아니었다. 중세의 낭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가 그 첫번째 도시이고, 두 번째가 바로 크로아티아의 자다르.
자다르의 푸른 바다를 마주하는 곳에는 피아노 건반 모양을 형상화 한 기다란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심코 지나쳤다면 몰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자다르는 나에게 나무 한그루, 돌덩어리 하나까지도 기억되는 도시인지라 그냥 지나칠리가 만무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검은색 건반과 흰색 건반이 순서대로 교차하는 디자인의 피아노 건반 모양의 벤치이다. 정말 센스 만점! 일부러 이곳에 피아노 모양의 벤치를 설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감히 생각되는 이유는 바로 바다 오르간 때문이다.
아까부터 자꾸만 내 귀를 간지럽히는 궁금증 폭발의 음악소리.
바로 바다 오르간(Morske Orgulje)이 연주하는 자연의 소리였다. 바다 오르간은 대리석 계단 아래에 35개의 파이프를 설치하여, 파도가 파이프 안의 공기를 밀어내고 불규칙적인 파도와 바람이 통과하면서 자연적으로 소리가 나는 말그대로 자연 오르간이다. 파도의 높이와 속도, 바람이 세기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져 묘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들으면 들을수록 묘하게 빠져들어가는 바다 오르간의 연주는 그렇기에 하루종일 듣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다가도, 매우 굵은 바리톤의 음색이 느껴지다가도 곱디 고운 소프라노의 노랫소리 같기도 하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바다 오르간.
아마도 자다르를 방문하는 여행객의 대부분은 이것을 보기 위해 방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태양의 인사'와 함께 크로아티아 건축가인 [니콜라 바시츠]가 2005년에 만든 것으로 다음해인 2006년에는 "유러피안 도시 공공장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명실상부 자다르의 명물로 자리잡은 바다 오르간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알프레드 히치콕이 극찬했던 자다르의 석양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자다르가 이렇게도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줄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자다르에서 하루만 머물다가는 일정표를 짜지 않았을텐데. 시간이 여유로운 여행객이 아니라 돌아가는 날까지 스케줄이 짜여있고, 이미 그에 해당하는 숙소며 교통편까지 줄줄이 예약이 다 되어있는 시간에 쫓기는 여행객인 내 자신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마주하려 대리석 계단에 걸터 앉는다.
한국에서 흔히 보았던 방파제에서의 바다 혹은 해수욕장에서 보는 바다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다. 어쩌면 직접 내 귀로 음악을 듣고, 내 두눈으로보지 않고서는 상상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한국에는 이런곳은 없으니 대체할 단어도 표현도 없다. 세계 유일의 바다 오르간이라 세계 유일의 자다르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앉아 멋진 자다르의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가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귀울인다. 저마다 다른 파도의 높이와 속도와 바람이 만드는 이 신비한 자연의 음악에 심취해본다. 아무런 말없이... 그냥 조용히... 한참을 그렇게 오롯이 있다보니, 난 이미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난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모든 걱정도 근심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이것이 바로 자연의 힘일까.
늘 유럽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참으로 다들 부지런도 하다.
홀로 놀러 온 배낭여행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 혹은 연인 등 누군가와 함께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도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바다 오르간의 연주를 들으며 모닝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현지인들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각양각색으로 저다마의 자다르를 즐기는 듯 보인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행 혹은 일상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 나도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까? 하긴, 자다르에선 동양인을 보는 일이 드물어 조금 더 신기하게 날 봐주었을지도 모르지.
바다 오르간 바로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
태양의 인사, 태양에게 인사, 태양으로의 인사 등 다양한 번역이 있지만 어쨋든 바다 오르간과 함께 또 하나의 자다르 명물로 자리잡은 이것은 지름 22m의 원형으로 300개의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는 곳. 낮 동안에 따사로운 햇빛을 흡수한 집열판이 그대로 머금고 있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 시작하여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빛을 내기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빛으로 그 아름다움을 여실히 발산하는 태양의 인사(Pozdrav Suncu). 바로 옆에 위치한 바다 오르간의 소리에 맞추어 비로소 빛의 공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태양으로부터의 엄청난 열을 쏙쏙 흡수해준다는 태양열 집열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뭔가 정교하고 규칙적인 느낌의 파란색 네모가 줄지어 배열되어있다. 이와 똑같이 생긴 집열판이 무려 300개나 되다니, 스케일도 엄청나게 크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밟고 서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밤의 화려한 공연을 위해서 열심히 태양열을 쏙쏙 흡수하는 중이겠지. 아름다운 자다르 바다를 더욱더 아름다운 장소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겨주는데에 있어서, 이 태양의 인사와 바다 오르간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 싶다. 건축가인 니콜라 바시츠라는 사람은 어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태양의 인사인지도 분간이 어려울 만큼 엄청난 풍경이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태양의 인사도 파란 온통 파란물감의 세상이다. 자다르에서 찍어온 나의 사진을 본 지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사진을 뒤집어서 보여줬어도 아마 그대로 믿었을거라고... 이토록 자다르가 매력적이니 내가 어찌 반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겠는가. 어찌 이곳에 살고싶지 않았겠는가.
가볍게 밤산책을 나섰다.
한낮에 북적북적하던 대리석 거리에는 사람이란 없고 로맨틱한 빛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자다르의 밤이다. 그래서인지 바다 오르간이 연주하는 음악소리에 더욱 집중이된다. 오로지 파도만이 쉬지않고 이야기하는 자다르의 밤바다는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묻어둔 감성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 사랑하는 내 사람과 단둘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래서 더욱 로맨틱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런 순간일수록 더욱 감성적이 되는 동물이니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는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다.
어디가 바다인지 태양의 인사인지 분간이 힘들만큼 파란색을 띄던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은 소녀이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태양의 인사.
정말 바다 오르간의 음악소리에 맞추어 마치 춤이라도 추듯이 형형색색의 현란한 조명이 일렁이며 장관을 연출해주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낮에 보았던 같은 장소인지 믿어지지 않을만큼 화려하고 또 화려하다. 낮과 밤이 이렇게나 다를 줄이야. 자다르에서 허락된 나의 시간은 점점 짧아져만 가는데, 자다르라는 도시의 매력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어가고 있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안타까워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겠다. 곧 헤어짐을 앞둔 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다르에,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했을 거야. 여행을 준비할 때, 정보도 많이 없고 그렇다고 배낭 하나 짊어지고 패기있게 떠나는 20대의 청춘도 아닌 내가, 유명하지 않은 소도시 골목골목을 탐방하며 여행을 즐길만큼의 용기는 없던 내가, 이곳 자다르까지 어떻게 오게되었는지 가끔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곳에 올 운명이지 않았을까. 아직은 이 넓은 지구상에서 못가본 곳이 많고, 욕심도 많아 남들이 가본 곳, 유명한곳은 다 가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어찌 자다르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끌림이었던 것 같다. 나도모르게 내 여행 일정표에 "자다르"라는 도시의 이름을 넣어두고서, 또 막상 기대는 전혀 안했기에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이 두 배, 세 배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래서 여행전에 너무 많이 찾아보고, 너무 많이 공부하는 것은 때론 여행지에서의 감동을 반감시키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양의 인사 그리고 바다 오르간.
나에겐 너무나 깊은 감동의 쓰나미였던 이곳에, 언젠간 또다시 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