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이 책 제목을 비유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과학적 사실이다. 정말로 물고기는,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어류'라고 생각하는 범주는 과학적으로 유의미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한 듯 믿고 있던 것이 무너진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과학의 울타리를 넘어, ‘혼돈’을 대하는 삶의 태도에 관해 진진하게 다룬다.
반전이 놀랍다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줄거리를, 모 북클럽에서 다른 멤버가 소개하는 바람에 스포일러 당했다. 심지어 전체 내용에 미치는 영향이 큰 반전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퇴사한 후 최초로 집어든 책들 중 한 권이 됐다.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실패와 혼돈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저자(이자 화자) 뿐 아니라 내게도 절박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로 사랑을 잃고 오랫동안 방황하던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의 이야기에 깊이 매혹된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일생 동안 수집한 연구용 물고기 콜렉션을 천재지변으로 한 순간에 잃는 등 삶이 무너진 듯한 순간에도 전혀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저자는 1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조던의 인생을 추적하며 그가 혼돈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비결을 찾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그 삶의 궤적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한다.
세간의 평처럼 수작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과학 에세이이지만, 전개방식이 소설과 비슷하고,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 전반을 따라가는 평전의 요소도 섞여있다. 역시 어떤 콘텐츠의 매력은 명확한 장르 구분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오는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얻고 싶어했던 딱 떨어지는 답을 책에서 건져올리지는 못했다. 실존 인물인 조던의 정체가 주제를 강화하는데 좀 치트키처럼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서다. 책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그 점은 좀 아쉬웠다. 물론 실화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삶에 반드시 찾아오는 혼돈을 마주하는 태도’라는 주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어서 꽤 괜찮은 독서 경험이었다. 미진한 답은 실제 내 삶에서 채워가야지 뭐. 아래는 <물고기는 존재히지 않는다>에서 좋았던 구절과 단상 메모.
1. 저격당한 건 화자인데, 왜 나까지 관통상을..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중략)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중략) 책에서 데이비드는 과학적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 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 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중략)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 6장 박살, 7장 파괴되지 않는 것 중
뭔가를 비판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혼자 잘 수치스러워하는 편이다. 딱 들어맞진 않더라도 나와 유사해 보이는 부분을 부각해서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다가 셀프 관통상을 입고는 너덜너덜해진다. 이 구절이 그랬다.
이 부분이 책의 중심 메시지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이런 태도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 말하려 한다. 하지만 인용한 부분으로 한정하면, 비판 대상이 되고 있는 데이비드의 태도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우울한 채 계속 머물러 있으면 진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많이 경험해봐서 알기에 내가 셀프 관통상을 입었을 것이다.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한편으로 즐기고 있진 않은지, 앞으로도 늘 경계해야겠다.
그래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방을 청소하고, 밖으로 나가 산책하는 사람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앞두고도 카페에 나와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이다. 종종 이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고 느껴져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진창에서 나를 꺼내는 데 꽤 자주 성공하는 사람이다.
삶은 정말로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각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즐겁게 살다 가려고 애쓰는 것이다. 크게 보면 별 의미가 없으니까 오히려 가볍게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2. 자기기만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반면 그토록 칭송받던 정확한 인식이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들은 어떨까? 짐작했겠지만 그들은 병적인 수준의 우울증에 걸렸다. 그들은 살아가는 일을 힘들어했고, 좌절을 겪은 뒤에는 회복이 더 어려웠으며,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중략)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어느 쪽이든 그 방패는 그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는 아내 수전을 잃고 재빨리 또 다른 아내 제시를 얻었다. 물고기 컬렉션을 잃었지만 규모가 더 큰 컬렉션을 재구축했다. 그리고 점점 더 높은 직책으로 승진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 어류학에 대해, 고등교육에 기여한 일에 대해 상들과 메달들이 요란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작은 거짓말들이 동으로, 은으로, 금으로 변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인용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이런 맥락의 서술만 묶다보니 마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긍정적 태도를 중시하는 자기계발서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ㅎㅎ 자기기만의 장기적인 부작용에 관한 내용도 책에 나오는데 생략했다. (요약하자면 단기적으로는 이목을 끄는 매력을 발산할 수 있지만 실제가 뒷받쳐주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평판이 악화된다든지, 자기기만으로 가리고 있던 약점이 나중에 더 크게 삶을 위협한다든지 등) 긍정적인 자기기만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해 ‘적당한' 수준이라면 이롭다는 것 아닌가?
어느 정도의 ‘긍정적 착각'은 확실히 삶에서 겪는 날카로운 문제들을 조금은 둥글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실제로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 같은 곳에선 ‘리프레이밍' 등의 기법을 적용해 환자와 내담자가 자신에 대해 좀 더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긍정적인 자기 인식은 시련을 마주쳐도 자기 통제감을 바탕으로 계속 해나갈 수 있게 하고, 그러다 가끔 정말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난 좀처럼 그걸 해내지 못한다. 무의식에 무슨 장치라도 돼있는지, 조금이라도 자기 기만(혹은 긍정적 암시)를 시도하면 덜컥 하고 거부감의 족쇄에 걸린다. 뭔가 잘 안되고 있는게 분명한 상황에서도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그런게 가능할까 싶다. 책에 좀 더 뾰족한 답이 있지 않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끝까지 넘겼다.
3. ‘뭐든 지나치면 독‘이라는 다소 맥빠지는 결론
그런데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페니키스 섬에서 젊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꽃을 당긴 목적의식만도, 경력과 대의와 아내와 편안한 생활에 대한 보장만도 아니었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 그것은 바다와 별들과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그 계층구조를 놓아버리는 것은 삶의 회오리바람을 풀어놓는 일, 딱정벌레와 매와 박테리아와 상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변, 그의 위에서 빙빙 돌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자기기만이 지나첬던 조던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은폐하기도 하며, ‘우생학’이라는, 훗날 역사의 거대한 비극을 가져오는 학문을 널리 전파하기까지 한다. 명백히 뒤틀리고 빗나간 자기 확신의 사례다. 그런데 조던의 경우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타인을 침해하는 일을, 저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우만 아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 든다.
믿고 있던 상식이나 질서가 틀렸거나,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사람에게 무척 힘든 일이다. 나도 대학, 직장 등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거나 그동안 지녀온 가치체계의 전면적인 개편을 요구하는 듯한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계속 있을 것이다. 매번 그런 고통으로 자신을 던져넣는 것도 가혹하지 않나 싶다.
물론 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좋다. 하지만 두 번째 인용구 부분에서도 말했듯, 바로 진실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보단 적당한 긍정적 착각으로 충격을 완화하고 일단 동력을 잃지 않는 태도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적절한 긍정적 착각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정하는 건 각자에게 과제로 남겠지만 말이다. 조던의 문제는 그런 적절한 경계를 설정할 마음이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4. 혼돈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중략) 과학자들은 “긍정적 환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혼돈'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어감을 떠올리지만, 실은 가치중립적인 단어임을 상기시키는 부분이었다. 혼돈에는 나쁜 것 뿐 아니라 좋은 것도 뒤섞여 있다.
앞서는 긍정적 착각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이는 삶의 진실을 언젠가 직면한다는 전제 하에 완충 기능으로서 의미가 있다. 일상을 지나치게 뒤흔들지 않는 선에서, 삶의 진실을 찾고 붙잡고 가려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겠다. 상당히 어려운 길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조심조심, 천천히, 삶에 찾아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향유하며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