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의 '유연한 시스템' 이야기를 읽고
별 재미가 없는데도 꾸준히 하는 온라인 게임이 있다. ’메이플 스토리‘라는 롤 플레잉 게임이다. 출시된 지 20년이 넘은 게임인데 여전히 유저가 꽤 많다. 아마 또래 중에는 어렸을 때 해본 적 있는 사람이 제법 될 것이다. 나도 10대 시절 열심히 했었고, 그 후 15년 가까이 잊고 살다가 몇 년 전 다시 시작했다.
메이플은 지루한 반복 몬스터 사냥으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 여러 업데이트를 거치며 이 점이 상당히 완화됐음에도, 여전히 메이플은 반복 노가다 사냥으로 악명이 높다. 게다가 갈수록 레벨업에 요구되는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소중한 시간을 점점 더 많이 갈아 넣어야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구조다.
몇 년 전 다시 게임을 해보니 분명히 이 점은 꽤 개선되긴 했다. 여전히 사냥은 해야 했지만, 일정 수의 몬스터를 잡는 '일일 퀘스트'만 클리어하면 대량의 추가 경험치를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이 일일 퀘스트의 수도 레벨이 높아질수록 늘어난다는 점이다. 어느덧 레벨 278 궁수 캐릭터를 키우고 있는 나는 메이플에 접속할 때마다 7곳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NPC들의 잔심부름(?)을 해주고 그 대가로 경험치를 받는다.
일일 퀘스트 클리어에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솔직히 썩 재미있진 않다. 지겨워서 도저히 못 해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정도도 전혀 아니다. 그저 경험치를 얻기 위해 접속 때마다 하는 '반복적인 업무'에 가깝다. 오죽하면 유저들은 메이플을 '숙제 게임'이라고 부르며, 일일 퀘스트는 '메할일'이라고 부른다. 이건 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아 이제 좀 쉬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게임을 켜야 정상적인 것 같은데, 메이플은 게임을 끄면서 ’아 이제 좀 쉬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웃기는 건 ‘메할일’을 빼먹으면 뭔가 찜찜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잠시만 짬을 내 '일퀘'를 해치웠으면 막대한 경험치를 얻는데, 그 잠깐이 귀찮아서 경험치 ‘손해’를 보다니.
이렇게 메할일을 주 2~3회씩 착실히 해치워온 것도 벌써 수년째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짜 일이야 생활에 필요한 소득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꾸준히 해야 하지만, 메할일은 사실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레벨이 높아진다고 대단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다른 중요한 일 같은 경우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한 자주 미루기까지 한다. 이 이상함을 알면서도 나는 메할일을 계속한다. 처음에는 그런 나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정지우 작가의 책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를 읽으며 어렴풋이 짚이는 구석을 발견했다. 정 작가는 이 책에서 '유연한 시스템'이라는 개념에 대해 소개한다. 불면으로 고생했던 정 작가는 어느 날 안대를 쓰고 숙면을 취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곤 안대를 쓰면 쉽게 잠들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 후론 걱정이 있거나 마음이 불안한 상황에도 안대를 쓰면 정말 곧잘 잠들었다고 한다. 안대를 쓰는 행동이 그에게 '잠을 잘 잘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준 것이다.
정 작가는 이와 비슷한 시스템을 수도 없이 만들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집중력이 올라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에센셜 오일 향을 맡으면 몸과 마음을 좋은 상태로 진입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피곤하고 괴로워도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하루를 말끔한 기분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 책을 한 구절 읽어도 좋고, 기도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음악을 들어도 된다. 정 작가는 이런 습관들 하나하나가 자신을 지켜주는 의식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행동들은 반드시 경직된 루틴일 필요도 없고, 상황에 따라 빈도와 강도를 유연하게 조절하면 된다. 그래서 ‘유연한 시스템’인 것이다.
어쩌면 메할일이 내 유연한 시스템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는 눈앞에 쌓인 to do list를 호쾌하게 척척 쳐내고 싶어도, 일의 거대함에 압도당해서 대체 이걸 어떻게 다 해내지, 막막한 때가 있다. 그럴 땐 키보드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할 때마다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메이플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다르다. 앞에서 쉬운 이해를 위해 일일 퀘스트 중 사냥만 언급했는데, 실은 그 외에도 메할일은 많다. 유니온 코인 수령, 몬스터 파크 클리어, 시즌마다 달라지는 각종 이벤트 참여 등을 최대한 효율적인 순서로 배치해 별 힘들이지 않고 탁탁 해치운다.
메할일을 하는 동안 내 손이 멈추는 일은 없다. 제법 레벨이 높아진 내 캐릭터는 웬만한 사냥터는 휩쓸고 다닌다. 대단한 컨트롤을 하지 않아도, 그다지 애를 쓰지 않아도 가는 곳마다 몬스터들을 증발시킬 수 있다. 7곳이나 되는 마을 퀘스트? 12개나 되는 보스 몬스터 레이드? 바짝 집중하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1시간 안에 금방 쳐낸다. 그리고 메할일을 반복하는 딱 그만큼 확실하게 캐릭터의 성장이 축적된다. 이 뿌듯함 때문에 메할일을 계속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느낌이 다른 일에 100%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심호흡하고 다시 일에 뛰어들어 하나씩 쳐내 볼 마음은 먹게 한다. 나는 메이플을 할 때마다 주어진 일을 신속하게 해치우는 감각을 되살린다. 너무 억지 같은가? 상관없다. 내가 그렇게 믿을 수만 있으면 충분히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러고 보면 이미 나는 메할일 말고도 여러 유연한 시스템을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 주에 두 번쯤 달리며 몸을 가볍게 하고, 머리를 맑게 정돈한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체리듬이 망가지는 걸 방어한다. 서너 권의 책을 병행해서 읽으며 새로운 생각이 계속 머리로 흘러들게 한다. 올여름부터는 크래프트 맥주 동호회에서 여는 신상 맥주 시음회와 양조에 격달로 번갈아 가며 참여한다. 매번 그저 맥주 마시고 취하는 데만 돈을 허비해 버리지 말고 같은 취미를 즐기는 분들과 교류하며 나름의 교양과 전문성을 쌓아보자는 생각에서다. 모두 빈도와 강도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기능하며, 삶에 도움이 되는 일들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이 손 틈 사이로 흩날려 사라지는 모래처럼 허망하게 느껴질 때가 가끔 있다. 그런 기분은 어떻게 해도 완전히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의지로 유연하게 가동하는 이런 시스템이 흘러가는 시간 위에 나름의 의미를 채워 넣어준다. 평소 일상에 엄청난 노력을 더하지 않아도 나는 최소한 풀 마라톤에 출전할 수 있고, 1년에 15권 내외의 책을 읽으며, 대여섯 가지의 맥주를 직접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이런 시스템 덕에 나는 큰 기복 없는 리듬 속에서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의 핵심이란 다른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몇 가지 시스템을 만들고, 유연하지만 진득하게 운영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 외에 개인적인 글을 쓰는 시스템은 그동안 왜 이리 느슨하게 가동해 왔냐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뭔가를 열심히 하는 주의는 아니지만, 효용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가동률이었던 게 아닐까. 메할일 하고 달리기 하는 절반만 꾸준히 이런 글을 썼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이번에는 '내게 이런 시스템들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시스템 하나하나가 내 삶에 어떤 결로 작용하는지, 한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으로 어떻게 전이해 나가는지,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계속 쓸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시스템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기록하기만 해도 쓸 이야기는 아마 계속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