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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하 Aug 15. 2023

모든게 부질없다는 마음이 들 때


애매하게 땀이 날듯 말듯 후덥지근하게 있는 것보다, 아예 옷을 적실 작정으로 마음놓고 땀을 흘리면 오히려 개운하다. 심지어 약간 해방감마저 느낀다. 달리는 속도만큼 시야에서 천천히 잠수교가 가까워졌다. 거의 두 달만에 참석하는 러닝크루 모임을 앞두고, 집결 장소 근처 역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혼자 뛰는 중이었다. 모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온 몸이 푹 젖었다. 확실히 여름에는 몸이 빠르게 달궈진다.


한남역에서 2.5km를 달려 반포한강공원 광장에 도착했다. 숨을 몰아 쉬며 크루 천막 근처에 있는 벤치에 걸터 앉았다. 아직 운영팀 인원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은 듯했다. 운영팀 누군가가 물을 한 잔 권해서 마셨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됐다. 목청껏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공원을 날아다니는 여름 잠자리들도 보였다.

 

해가 세빛섬 지붕 높이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명백히 저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대였지만 공기가 아직 식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낮은 각도로 쏘아진 빛을 받은 강 주위 풍경이 한층 입체적으로 보였다. 이불에서 풀어헤쳐진 솜 같기도 한 깃털구름 가장자리가 노랗게 빛났다. 저 멀리 잠수교 언덕도로에 퇴근길 차량 행렬과 자전거 동호회로 보이는 무리가 오르내렸다. 나도 조금 있으면 크루 사람들과 저 도로를 뛰어 오를 것이다.



잠수교 상판에서 분수가 포물선을 그리며 하얗게 쏟아졌다. 멍하게 앉아 공원 이곳저곳을 보는 사이 크루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착해 워밍업을 시작했다. 둥글게 서서 스트레칭을 하는 중에도 시선은 자꾸 위를 향했다. 나오길 잘했다 싶은 하늘이다. 하늘은 어둑해지는 중에도 계속 조금씩 색깔이 변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바라봤다. 해가 떨어지고, 저 멀리 강가 빌딩 숲과 하늘이 맞닿는 부분이 붉게 물들 쯤 워밍업이 끝났다. 서른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두 줄로 나뉘어 잠수교를 지나 동작대교 방향으로 달렸다.


확실히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주는 활발한 에너지가 있다. 선두 페이서가 외치는 장애물 주의 알림을 뒷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따라 소리치는 모습, 달리기를 멈추고 걸어서 도로를 건널 때 모두의 달궈진 몸이 내뿜는 열기, 골인 지점에 양 옆으로 도열한 선두 그룹이 한 손을 내밀고 하이 파이브로 후미 그룹을 맞는 광경이 주는 것들. 이런 순간 속에 있으면 그 때만큼은 온 몸이 생생히 깨어있는 기분이다.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듯한 우울감은 달리고 있으면 어느새 날아간다.

 

요즘 나는 무력감에 익사하지 않도록 겨우 발버둥을 치며 사는 것 같다. 가끔은 눈물이 불쑥 치솟을 정도로 세상에 사는 게 막막하고 두렵다. 어떻게 다들 저리 당연하다는 듯 치열하게 사는건지. 반면 내가 짜낼 수 있는 의욕과, 감당할 수 있는 일상의 그릇은 너무나도 작다. 완전히 망가지지 않도록 근근이 방어해내고 있지만, 뭔가 돌파구가 되리라고 희망을 품어볼 만한 구석도 없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을까. 꽉 막힌 마음은 메모장에 비명같은 글 부스러기로 쌓여간다.

 

바로 이런 생각,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느낌에 빠져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하늘을 보고, 산책하고, 달린다. 밖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늪 같은 우울의 손길을 한 번 정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일단은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뾰족한 수 없이 그저 현상을 지루하게 유지시킬 뿐인 방어전에 불과할지라도, 계속 살아남아 할 수 있는 만큼을 하고 있어야 돌파구가 보일 가능성이라도 주어질 것이다.


무력감과 자기 혐오는 꼭 파도와 같아서 빠져나간 듯했다가도, 이내 다시 밀려들어오기를 반복한다. 그 사실이 무척 절망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쩌면 계속 파도를 맞고 있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러려고 회사에서 나왔으면서도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파도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까지,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자. 누군가는 계속해서 여러 파도를 맞아봐야 뚫고 가는 법도 익히게 된다고 말할테고, 분명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도 그럴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다.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마음을 되찾는 것,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한 항해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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