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하프마라톤 도전기 <상>
“마라톤이 폼 나죠? 인간승리 하는 것 같아서. 근데 그거 다 현실도피에요. 그냥 사는 게 갑갑하니까 그런 걸로 대리만족하는 거라고요.”
영화 <말아톤> 초반부에 나오는 대사다. 자폐증이 있는 초원이가 풀 마라톤을 세 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도록 지도해달라는 초원이 엄마 부탁에, 코치는 퉁명스럽게 거절하면서 저 말을 한다. 그리 강조되지 않고 지나가듯 처리된 대사였는데, 당시 10대였던 내게도 이상하게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본 뒤로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첫 회사를 그만둔 뒤 달리기를 시작했다.
4년 넘게 달리기를 하면서도 하프나 풀 마라톤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마라톤 선수가 아닌 이상, 나 같은 일반인이 10km가 넘는 거리를 뛸 이유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러닝 크루에 나가보면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무척 대단해보였지만,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왜 저렇게까지 달리는 거지? 한 주에 두어 번 5km 내외만 뛰어도 건강에는 충분히 좋고, 일상에도 활력이 생긴다. 조금 더 욕심이 생긴다면 가끔 10km 대회 정도에 출전해 기록을 조금씩 앞당겨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말아톤>의 저 대사가 따끔따끔 떠오르기도 했다.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사람은 달리기를 하면 실제로 위안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4년여 전 처음 러닝을 시작한 이래로 나도 줄곧 그래왔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삶이 막막하다고 느낄 때마다 더 빈번하게 달렸고, 어느 정도 힘을 얻었다. 하지만 여기엔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달리기가 인생을 마술처럼 바꿔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리기로 위안을 얻는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정작 뚫어야 할 문제를 뚫는데는 소홀하면서 달리기에만 자꾸 몰두하기도 한다.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일이었다. 작년에는 러닝 어플리케이션에 방을 만들고, 한 달간 달린 거리를 기록하는 모임에 참여했었다. 두 번째 퇴사 후 준비한 공공기관 취업에서 고배를 마신 후 기약 없이 다음 공고를 기다릴 때였다. 어플 화면에는 방 참여자들이 달린 거리순으로 등수가 표시됐는데, 취업 실패로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임 기간 동안 거의 매일 달렸고, 누적 거리 171km를 기록하고는 결국 1등을 하는데 성공했다. 모임이 끝나고, 시끌시끌 서로를 응원하는 분위기로 가득하던 단체 카톡방도 잦아들었다. 붙잡고 있던 1등의 의미는 빠르고 허망하게 퇴색했다. 나는 취미 모임에서 죽어라 뛰어서 1등을 했구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라톤에 도전하는 일도 내겐 비슷하게 느껴졌다. 대회 몇 주 전부터 연습을 좀 하고, 페이스를 낮춰 뛰면 아마 나도 하프 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42.195km인 풀 마라톤? 무척 어렵긴 하겠지만 좀 더 열심히 준비하면 언젠가 넘을 수 있는 벽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쩌면 마라톤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내 진짜 문제엔 다시 소홀해질지도 모른다. 본질적인 문제를 푸는 건 어려운 데 반해, 밖으로 나가서 달리고 마약 같은 고양감을 느끼는 건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십 수년 전 본 영화 대사의 그림자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얼마전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무의미를 파훼할만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준비하던 브랜디드 콘텐츠 에디터 교육&채용 과정에서 떨어지고, 지긋지긋하게 다시 찾아온 막막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퇴사하고 5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나는 어떤 능력을 메뉴판으로 내걸고 팔지, 그런 능력이 있기나 한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이 과정에 합격하면 주어질 일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주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게 사라졌으므로 다음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대체 무엇을 손에 쥐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뭘 해야할 지 모르는 내게 매력적인 답을 제공했다. 러닝 훈련을 연구하는 곳에서 하프 마라톤 도전자를 선발하고 있었다. 선발된 사람들에게는 체계적인 러닝 훈련 5주 프로그램과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러닝화, 기능성 티셔츠, 양말 등을 제공한다고 했다. 아직 하프 마라톤을 완주한 적은 없고, 훈련으로 기량을 올려야 완주가 가능했으니 도전은 도전이었다. 게다가 달리기는 몇 안되는 좋아하는 일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지원서를 썼다.
솔직하게 썼다. 러너들이 왜 그렇게 하프나 풀코스 마라톤에 나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5km나 10km로도 충분히 유익한 달리기인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거리를 늘리면 의미없는 고행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하지만 지금 나는 뭘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달리기에서나마 ‘도전’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고. 이루고 싶은 어려운 목표를 꼭 붙잡고, 거기에 닿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감각을 느껴보고 싶다고.
며칠이 지나 지원 결과를 알리는 문자가 왔다.
“축하합니다. 하프마라톤 프로젝트에 선발 되셔서 앞으로 5주간의 여정을 함께…”
숨 막힐 것 같은 길 잃은 기분에서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는 5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중>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