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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하 Oct 10. 2023

미래의 내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첫 하프마라톤 도전기 <중>


첫 훈련 소집일, 맨 앞줄에 앉은 나는 오리엔테이션 슬라이드에 띄워진 어느 문장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최고의 코치가 되어준다’


훈련 기간 동안 참가자들이 꼭 새겨뒀으면 한다고 코치님이 말했다. 다른 사람과 내 페이스를 비교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나는 나의 달리기를 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마음이 이상해졌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도 비슷한 문장을 되뇐 적이 있었다. 몇 개월 전 세 번째 회사에서 나올 때였다.


‘나에게 최고의 상사가 되어주자’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터 흐릿해져버린 말이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고집이 센 나, 맷집이 약한 나,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는 나, 일의 거대함에 쉽게 압도되는 나, 볼품 없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나, 다른 사람이 내 답답함에 진저리를 낼까봐 걱정하면서도 노력하지는 않는 나. 이런 내 온갖 모자람과 자기 모순을 끝없이 참아넘기고 이끌어주는 유일한 상사가 되어주자고 결심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나답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심지어 그동안 그 말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이번 하프마라톤 도전에서라도 내게 최고의 코치가 되어주자.


최고의 코치가 되기 전에 일단 의미 부여가 필요했다.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도전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하프마라톤 완주였다. 21.0975km. 달리기를 시작한 지 4년이 넘은 시점에서 굳이 완주하려면 할 수는 있되, 건강과 일상의 활력을 위한다고 보기에는 불필요하게 긴 거리. 5주씩이나 훈련을 해서 예상되는 완주를 하고 허무해지지 않으려면 스스로 납득할만한 도전적인 목표가 필요했다. 지나치게 무리는 아니면서도 당장 깰 수 없는 기록을 떠올렸다. 2시간 10분..? 그래, 그 정도가 적당하겠다.


훈련 기간이 시작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 단체 훈련이 있었고, 주중엔 짜여진 프로그램을 참고해 개인 훈련을 했다. 토요일에 배운 달리기 근육 강화 동작 연습과, 두세 번의 달리기를 아르바이트를 하고 글을 쓰는 일상 사이사이에 끼워넣었다. 천천히 컨디션이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지난해 러닝 모임에서 171km를 내달리고 허망해졌던 일을 늘 떠올렸다. 다른 일을 제쳐두고 달리기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조금 바빠지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즐거웠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목표에 닿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나를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었다.


2주차 단체 훈련에서는 야트막한 산을 달렸고, 3주차에는 잠실보조경기장 트랙에서 5km 기록을 쟀다. 주중 트레이닝도 계속 이어갔다. 어느새 훈련 기간이 반환점을 돌았다. 벌써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주에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남산을 달리고, 그 다음주엔 석촌호수에서 100분 지속주를 하고, 또 한 주가 지나면 대회다. 아마 높은 확률로 완주하겠지. 그럼 이번 도피도 끝난다.


대회가 끝나고 찾아올 허무함이 나를 벌써 삼켜오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나는 이 하프 마라톤을 꾸역꾸역 완주하고 난 뒤 맞닥뜨릴 무의미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두려웠다. 지원서를 쓸 때부터 완주할 것을 알고 있었고, 5주가 지나서 예상했던 성공을 한다. 그런데 그 성공은 평소 쓸데없다고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2시간 10분 안에 들어오겠다는 도전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았냐고? 훈련 기간 후반에 접어들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지금까지 그려온 연습 경로에 따르면 대회 당일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목표 기록 달성은 어려웠다. 내가 속한 훈련 그룹은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2시간 10분 안에 완주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어떻게든 허무를 피해보려고 설치해놓은 얄팍한 장치는 그만큼 쉽게 부서졌다.

인스타그램에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는 피드를 올리고, 적당히 지인들의 하트를 받고, 또 점점 박제된 과거가 되어갈 것이었다. 그리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원래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래, 이번 도망은 즐거웠니?’


미래의 내가 이죽거리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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