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하프마라톤 도전기 <하>
[지난 줄거리]
5년 차 러너인 ’나’는 달리기를 즐기지만, 하프나 풀 마라톤을 완주해 본 적은 없다. 10km 이하의 거리만 달려도 충분히 유익한데 그 이상 뛰는 건 의미 없는 고행이라고 생각해서다.
마라톤 완주에 회의적인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지난해 러닝 모임에서 한 달간 171km를 달려 누적 거리 1등을 차지하고는 허탈함을 느낀 경험 때문이다. ‘나’는 30대 중반에 미취업 상태로 오래 방황하는 현실을 버려두고 자꾸 달리기로 도피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세 번째 퇴사 후 도전했던 잡지사 프리랜서 에디터 채용에 고배를 마신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5주간의 하프마라톤 대비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한다. 2시간 10분 이내에 완주한다는 목표를 위해 연습하며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은 것도 잠시, 하프를 완주해봤자 대회가 끝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게다가 프로그램 후반, 지금까지 한 훈련으로는 2시간 10분 이내 기록 달성이 사실상 어려움을 뒤늦게 깨닫고, 어느새 대회는 한 주 앞으로 다가오는데…
<중> 편에서 이어집니다
크게 친화력 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매주 만나다 보니 같이 훈련하는 사람들 중 몇몇과 말을 트게 됐다. 인스타그램 맞팔을 하고 친구가 되었다. 대부분 이번 대회를 준비하기 전에도 러닝이나 다른 운동을 즐겨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피드와 스토리에는 각종 스포츠 이벤트와 운동하는 일상으로 가득했다. 매주 한 번도 겹치지 않고 다른 러닝크루를 게스트로 순회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크로스핏이 너무 재밌어서 하루에 두 탕을 뛴다든지, 협찬받은 스포츠용품 관련 게시글을 올리느라 분주한 사람도 있었다.
또 하나 발견한 사실은, 이 대회에만 출전하는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거였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이번 대회가 끝난 뒤에도 무슨 스포츠 브랜드 주최 행사나 트레일 러닝 등 각종 처음 들어보는 대회 스케줄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냥 일상이었고, 따라서 이번 하프마라톤을 나처럼 심각하고 비장하게 대하지 않았다.
저 낭창낭창 활기찬 즐거움이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계속 대회 준비를 하느라 다른 일상에 소홀해지지 않을 선에서 대회 몇 개를 더 등록했다. 순식간에 이 하프마라톤이 올해 나갈 여러 대회 중 하나가 됐다. 허탈하도록 간단히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지막 단체 훈련을 하는 날이 됐다. 잠실역에서 내려 집결 장소인 석촌호수로 걸어갔다. 1시간 40분 동안 쉬지 않고 석촌호수를 달리는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실은 몇 주 전에 혼자 와서 연습 삼아 1시간 남짓을 뛰어봤다. 다섯 번의 훈련 중 아마 가장 길고 힘들게 분명하니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0km를 넘게 뛴 경험이 드물어서 그런지 쉽지 않았다. 오늘 훈련은 그때보다도 30분가량을 더 뛰어야 했고, 대회 전 반드시 넘고 가야 할 벽이었다. 평소였다면 약간 긴장할 법도 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했다.
롯데월드타워와 쇼핑몰 사잇길을 조금 걷자,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의 윤슬이 눈에 들어왔다. 늦여름 아침 기운을 내뿜고 있는 가로수가 미풍에 천천히 흔들렸다. 달리면 꽤 더울 것 같긴 했지만, 높게 자란 나무들이 제법 넓은 그늘을 군데군데 형성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고는 수변 무대 스탠드에 앉았다.
코어를 단련하는 몇 가지 동작을 연습하고 대회 중 급수 요령을 배웠다. 인형 뽑기 하듯 종이컵을 집어 물을 마시는 시범을 보이는 메인 코치님을 보면서 웃었고,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만의 급수 팁을 알려주는 코치님들에게 사람들이 ‘오오오’ 하고 반응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토요일 아침, 평화로운 호수 풍경과 사람들 속에 섞여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주 들어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실은 매주 그랬다. 뭔가 시작된다는 기분으로 새 러닝화를 신고 나왔던 올림픽공원에서도, 러닝 드릴 훈련을 하던 일자산 근처 넓은 잔디밭에서도, 육상선수들의 에너지가 전해져오는 듯했던 잠실보조경기장 트랙에서도, 급경사 훈련 뒤 한껏 털린(?) 다리로 구불구불한 코스를 달리며 즐거웠던 남산 북측순환로에서도 그랬다. 다만 이 하프마라톤에서 어떻게든 그럴듯한 의미를 건져 돌아가야 한다는 초조함에 내가 짓눌려 있었을 뿐이다.
석촌호수를 돌기 시작했다. 코치님은 경보와 비슷한 속도로 천천히 우리 그룹을 이끌었다. 목표 기록을 고려하면 어림도 없는 페이스였지만, 대열 맨 뒤에서 한 시간 반을 얌전히 따라갔다. 팔 스윙 연습을 하고, 호숫가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공상도 했다. 산책과도 같은 여유로운 달리기였다. 그래도 호수를 여섯 바퀴째 돌 무렵이 되자 하나둘씩 이탈자가 나왔다. 뒤로 쳐진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 코치님이 몇 안 되는 남은 그룹원들을 먼저 보내면서 대열은 완전히 흩어졌다.
사람들의 등으로 막혀 있던 시야가 활짝 열렸다. 이제 내 마음껏 달려도 됐다. 한 시간 반 동안 걷듯이 뛴 덕에 아직 힘이 남아있었다. 아껴놓은 힘을 이번 바퀴에 다 털어 넣기로 했다. 천천히 속도를 끌어올렸다. 땅은 내가 빨라지는 만큼 발을 앞으로 멀리 튕겨 보냈다. 점점 숨이 거칠어졌지만 발을 내딛는 리듬에서 엇나가지는 않았다. 지면 위를 팡팡 튀어가듯 질주하는 기분을 한껏 들이마시면서 가로수 그늘 터널 속을 달렸다. 호수의 풍경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유롭게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커브를 돌아 골인 지점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스프린트였다. 오래전부터 나는 달리기의 이런 순간을 특히 사랑했었지. 숨을 몰아쉬며 새삼 깨달았다.
지난해 공공기관 취업에 실패한 뒤 악착같이 171km를 뛴 일은 정말 그렇게 잘못이었을까. 물론 모임에서 누적 거리 1등을 한답시고 다른 일들을 뒷전에 밀어둔 건 좀 건강하지 않긴 했다. 그럼 잠시 반성하고 달리기와 다른 일상이 균형을 이루도록 조정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달리기는 계속 내 삶에 즐겁게 흐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어딘지 부끄러워했다. 또 현실에서 도피할 셈이냐고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지금 내게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란 과연 뭘까. 어디에도 굳건히 자리 잡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고, 계속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아마 내가 직면한 현실일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론, 늦었더라도 계속 하나씩 새로운 시도를 하며 내게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달리고 싶을 때 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을 쏟고 싶은 일을 찾게 되는가. 꼭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어딘가 정착할 때까지 달리기를 멈추기라도 해야 하는가.
지난 몇 년간 뚜렷하게 추구하는 것 없는 삶을 살았다. 뭐라도 해야 해서 억지로 붙잡고 있던 일들은 결국 끝이 좋지 못했다. 그런 내게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계속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그 자체로 소중한 불씨였다. 달리기는 방에서 웅크리고만 있던 나를 바깥으로 나오게 해줬다. 달리는 동안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줬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침잠해 있는 내게 그럼에도 계속 살아갈 용기를 줬다. 그런 달리기에게 내가 돌려준 건 ‘현실 도피’라는 비난이다. ‘스스로를 다잡는 채찍질’로 교묘히 포장돼 있어 알아차리기 어려운 비난. 그 비난은 사실 내 조급함의 산물이었다.
달리기는 이미 내게 충분히 많은 것을 주었고, 그럼에도 아직 비어있는 곳을 채우는 일은 달리는 내가 아닌 다른 나의 몫이었다. 나는 비난을 덜어내고 담담해진 마음으로 그 사실을 다시 받아들였다.
대회 당일 비가 온다더니, 주로 위 하늘에는 구름만 낮게 떠다녔다. 빗방울로 뭉쳐지지 못한 미세한 수분을 품은 공기는 몹시 습하고 무거웠다. 심지어 출발 직전엔 구름 사이에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습한 공기를 햇볕이 데우기 시작했다. 운동장에서 몸을 푸는데,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꼭 날씨가 아니더라도 그동안의 훈련 궤적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2시간 10분 이내 완주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유튜브로 작년 대회 영상을 보며 코스를 예습해 왔다. 출발해서 7.5km 지점까지는 내리막이지만, 곧 고도가 급격히 상승했다가 떨어지는 5km가 이어진다. 그 뒤로 결승선까지는 대체로 미세한 오르막이었다. 원래 10km 지점까지 천천히 몸을 달구고, 그 뒤로 천천히 속도를 쌓아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저런 코스라면 그나마 내리막이 있는 초중반에 페이스를 당겨놓아야 하는 걸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고민하다가 코스에 맞춰 레이스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오판이었다. 역시 하프 첫 출전에 초반을 공략하는 전략은 무리였다. 오르막 구간 전까지 페이스를 당겨놓느라 에너지를 거의 써버린 나는 10km 급수대를 지나고부터 걷기 시작했다. 다시 뛰었다가도 얼마 가지 못해 또 걸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린 것 같았다. 그냥 원래 계획대로 정석으로 갈걸, 어설프게 머리 굴리다가 망했군.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계속 느리게 걷고 뛰다 보니 체력을 조금 회복했다. 15km 급수대 앞에서 남은 에너지젤을 뜯어 입으로 밀어 넣었다.
머릿속이 멍한데, 무척 맑기도 한 것 같은 묘한 기분. 에너지젤의 효과일까, 아니면 러너스 하이 초기 단계 같은 걸까. 마치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주변에 있는 다른 러너들이 머릿속에서 흐릿해지고, 주로 위에서 한 발, 한 발 뛰어가는 나에게만 온 정신을 모았다. 힘에 부칠 때쯤 다시 급수대가 나왔고, 목을 축인 후엔 물에 적신 스펀지를 정수리에 대고 쭉 짰다. 열을 식힐 뿐 아니라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0km가 넘는 달리기는 의미 없는 고행이라고 생각했었지. 게다가 기록의 관점에선 이미 망해버린 레이스다. 그런데 왜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나는 의미 없는 짓을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설령 기적적으로 2시간 10분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정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마음을 다해 뭔가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임을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 마음이 미래에 있는 내게로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쉽게 의미를 재단하고 냉소하는 대신, 스스로 선택한 일을 사랑하고 기꺼이 몰입하는 나의 모습을 향해 계속 뛰어갔다.
공주시민운동장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1km의 오르막은 무척 가혹했다. 하마터면 걸어서 스타디움으로 입장할 뻔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고 싶진 않았다. 간신히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온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속도를 높였다. 트랙 반 바퀴를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다. 몇 초 뒤 기록 문자가 날아왔다.
2시간 18분 13초.
역시 목표 기록보다 늦게 들어왔고,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올해에만 아직 네 번의 대회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나는 여전히 젊다. 얼마든지 또 즐겁게 의미 없는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새로운 일을 하며 죄책감 없이 풀 마라톤에 도전하는 나를 상상했다. 앞으로도 달리기가 함께하는 삶을 한껏 즐길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한참 주위를 둘러보다 트랙 안 잔디밭에 모여 셀카를 찍는 훈련팀 사람들을 발견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렇게 더위로 고생하는 대회는 올해 이게 마지막이겠지. 막바지 여름이 지나고 러너들의 축제가 열리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