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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하 Apr 26. 2024

비교를 피할 수 없다면


“민하님 화이팅! 중간에 포기하지 마시구요-”

 

내가 완주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됐나보다. 지인은 격려와 우려가 뒤섞인 인사를 던지고 자신의 출발 그룹이 있는 저 앞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둘레가 5km인 미사경정공원을 여섯 바퀴, 그러니까 총 30km를 뛰어야 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대회인 서울마라톤을 몇 주 앞두고 마라토너들이 장거리 훈련 삼아 참석하는 행사였다. 나도 한 주 뒤에 처음 32k 대회에 도전할 예정이었다.

 

터덜터덜 4바퀴째 뛰고 있을 무렵부터, 결승선에서는 벌써 완주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나를 두 번이나 앞질러 간 사람들이었다. 에너지젤을 3개째 짜먹어 가며 겨우 마지막 바퀴를 돌 땐, 대회는 이미 약간 파장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갈수록 축소 운영하는 급수 테이블, 줄어드는 응원단의 규모와 텐션, 맡긴 짐을 찾아가려고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 내가 느린 마라토너라는걸 실감하게 해주는 사실들. 다행히 나도 3시간 2분 49초 만에 골인 지점으로 들어왔다.

 

실은 참가 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지난 5년간 쌓아온 내 달리기 기량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무려 10개로 나눠진 페이스 그룹 중 하나를 선택하게 돼있었는데, 나는.. 6:00 페이스로 달리는(1km 뛰는 데 6분 소요. 시속 10km.) 맨 마지막 그룹을 택해야 했다. 그마저도 완주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행사 참가하려면 그렇게라도 신청하는 수밖에. 아니, 어떻게 된 대회가 30km를 뛰는데 제일 느린 그룹이 6:00 페이스지.. 런린이는 얼씬도 말라는 건가…

 

6:00 페이스가 어느 정도 속도인지 감이 잘 안 오는 분을 위해 부연 설명한다. 취미로 가볍게 달리는 인싸 직장인들이 모이는 러닝 크루에서 세션을 열면 딱 중간이거나 그보다 살짝 빠른 그룹에 해당하는 속도다. 5:30이나 5:00 페이스면 가장 빠른 그룹이다. 그 정도 속도로 5~7km를 뛴다. 나는 맨 앞 그룹에서 5~7km를 뛰고는 ‘오늘은 속도가 좀 남는 걸 ㅎ’ 이라고 생각하곤 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지난해 처음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며 1km를 3, 4분대로 뛰는 괴물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나는 누군가에게 30km를 뛰다 중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받는 런린이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하프 마라톤을 큰 부담 없이 완주할 수 있는, 꽤 잘 달리는 사람이다. 천천히 조깅만 하다가는 영원히 천천히 밖에 뛸 수 없다며 자신의 한계를 깨는 달리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록에 집착하기보다 천천히 달리며 주로의 풍경과 내 몸과 마음을 바라봐야 한다는 명상학파 러너도 존재한다.

 

‘달리기’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이렇게나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비교는 무의미하고, 각자에게 맞는 방식과 속도로 가면 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아무리 남과 비교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봤자,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비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반드시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얼마 전 ‘리라이팅 작가’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유튜브나 팟캐스트, 영화 같은 다양한 포맷의 콘텐츠를 책의 형태로 다시 쓰는 일이다. 책으로 출판할 만한 콘텐츠는 보유했는데 글쓰기에 자신이 없거나, 글 쓸 시간이 없는 분을 인터뷰해서 대신 책을 쓰기도 한다.

 

첫 일을 받기 위해 미팅 자리에 나갔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한 달간 매주 5일을 매일매일 삐끗하지 않고 A4 3페이지씩 써내야 간신히 마감을 맞출 수 있는 일이었다. 기자 시절에도 이 정도 분량을 이렇게 장기간 줄기차게 쳐내야 했던 적은 없었다. 내 글 쓰는 능력에 비해 턱없이 빠른 속도와 지구력이 요구되는 조건이었지만, 뒤에서 프리랜서 선배 작가가 백업해 준다는 조건으로 초고가 내게 맡겨졌다. 현업에서 뛰는 리라이팅 작가들은 대부분 이 정도를 해내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나는 제법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직업적으로 글을 써왔고, 조악하나마 에세이집을 낸 적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가 보기에는 적당한 퀄리티의 글을 납기일에 맞춰 생산해내는 마감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미숙한 작가다. 글을 쓰는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 중에서, 보는 시각에 따라 나는 글을 잘 쓰기도 하고 못 쓰기도 하는 사람이다. 이 점은 달리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취미로 하는 달리기와 달리, 남과 비교하지 않고 철저히 나만의 속도로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클라이언트와 계약서가 존재하는 ‘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교하지 않는다 해도 클라이언트가 비교한다. 나보다 빠른 속도로 괜찮은 퀄리티의 글을 꾸준히 뽑아내는 리라이팅 작가가 있다면, 클라이언트는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길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글을 쓰려면 기한을 넉넉하게 잡아주고 퀄리티에 관대한, 자애로운 클라이언트를 계속 만나는 행운을 누리거나,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도저히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현실적으로 선택할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은 ‘어떤 비교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가’인 것 같다. 직업 선택에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나는 이 일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업계 표준 마감 속도와 비교해 한참 느리고 글도 엉성한 초보 리라이팅 작가이지만, 점차 이 일을 잘 해내고 싶다. 이 일을 선택하고 시작한 지금 이 마음이 변하지만 않는다면, 버겁게만 느껴지는 비교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러닝 크루 모임과 10km 대회에 갇히지 않고 하프마라톤에 도전하던 순간부터 내 달리기 실력은 조금씩 도약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원고를 꾸준하고 빠르게 쳐내야 하는 바로 지금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맞이한 도약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는 어떤 글이 맡겨지든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고, 그걸 쓰는 과정을 잠시 머릿속으로 그려본 뒤, 곧바로 백지를 채워나가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묵묵히 수련의 시간을 쌓아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그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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