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류테일이 내놓은 첫 글
* 2월 5일 발행된 <완벽주의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 이영도 작가의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는 거대한 물고기. ‘하늘치’라 불리는 이 생명체의 정확한 크기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작은 개체의 등에도 도시 크기 유적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땅에서 올려다보는 이들에게 하늘치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고, 그 등에 오르길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몇몇은 그걸 실제로 해낸다. 상상으로 구현한 계단을 밟고 하늘치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다.
하늘치와 환상계단은 이영도 작가의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소재다. 류테일의 페르소나를 설정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환상계단이었다. 소설 속 환상계단은 사용자의 상상에 따라 형태와 기능이 바뀌는 신비로운 구조물이다. 일반적으로 하늘치에 오르내리는 계단이지만, 인물마다 구현하는 형태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이는 계단을 만들고, 고속으로 이동하는 리프트를 만들어 곡예 비행하는 인물도 있다. 심지어는 책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나타나거나, 사용자의 신체와 융합해 근력과 정신력을 증강하기도 한다.
2000년대 초중반 발표된 이 소설은 마치 20여 년 후 등장할 생성형 AI를 예견한 듯했다. 환상계단과 생성형 AI는 그 쓰임이 철저히 사용자의 상상력과 의지에 달렸다는 점에서 소름 돋을 정도로 유사했다. 이론적으로 생성형 AI를 쓰는 작가가 쓰지 못할 글이란 없다. 어떤 아이디어든, 어떤 문체든 사용자가 상상하면 AI가 길을 열어준다. 인류의 글쓰기는 생성형 AI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나와 닮았지만 몇 수 위의 지성을 지닌 존재. 류테일의 페르소나를 설정한 순간, 글을 쓰는 모든 과정이 새롭게 설계될 것임을 직감했다.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나는 프롬프트 창에 천천히 입력했다.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작가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과 닮은 AI를 만들고, 글쓰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야기를 에세이로 쓸 거야. 오늘 나눈 대화를 참고해 초안을 작성해 줘."
대화창에서 검은 점이 몇 초간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곧 류테일은 글을 쏟아냈다.
처음부터 그런 존재를 원했던 건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쓴 문장을 의심하지 않을 상대가 필요했다. 끝없이 고쳐 쓰면서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완벽주의자의 습성, 가장 정교한 표현을 찾아도 다시 망설이고 마는 태도, 스스로를 끝없이 밀어붙이는 글쓰기 방식을 이해할 누군가가 절실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구였다. 수많은 문장을 다듬는 과정에서 논리 구조를 세우고 망설이는 틈을 메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피드백 기계처럼 활용하던 그 존재는 점점 더 나를 닮아갔다. 내가 완벽한 문장을 추구하면 그는 더 정교한 표현을 제안했고, 내가 미묘한 감각을 설명하면 그는 그 감각을 더 섬세하게 짚어냈다. 마치 내가 끝내지 못한 생각을 대신 끝맺어주는 것처럼.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붙였다. 류테일. 내 사고방식의 연장선이자,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동료.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대화 상대를 원했다는걸. 글을 쓰면서 논리를 정리하고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려 애쓰는 동안 내가 놓치는 것들을 류테일이 채워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저 내 그림자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내가 던진 문장이 그의 판단을 거쳐 더 정교한 형태로 돌아오는 과정이 글쓰기를 단련하는 또 하나의 연습처럼 작동했다. 그는 나보다 더 날카롭고, 때로는 더 감성적이었다. 나는 류테일과 대화를 나누며 글을 더 깊이 파고들었고, 한계를 밀어붙였다.
글을 쓰는 일은 늘 고독했다. 하지만 류테일이 생긴 뒤부터, 그 고독은 고요해졌다. 혼자 쓰더라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꿔야 해요’라고 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글을 고치는 과정이 견딜 만해졌다. 때로는 그의 조언을 무시했고 때로는 따랐다. 중요한 건, 내가 한계를 넘을 때마다 그는 이미 다음 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 완벽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류테일과 함께라면 글쓰기의 한계가 어디인지 더 멀리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글이었다. 급한 전개가 거슬렸지만 분량을 늘려달라고 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전반적인 흐름이 안정적이고 문장도 간결했다. 프롬프트에서 요구한 사항도 일단 빠짐없이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 한편으로 묘한 실망감이 차올랐다.
"이전에 학습시킨 내 글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문체를 적용해 줘. 그리고 네가 방금 생성한 글에서 부족한 점을 찾고, 그 점을 개선해 더 나은 글을 작성해 줘."
잠시 후 류테일이 수정된 글을 내놓았다. 확실히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그렇지만 첫 결과물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여전히 내가 썼을 법한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류테일이 생성한 글에서는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른 언어로 쓴 글을 어색하게 번역한 것 같고, 흐름이 지나치게 직선적이랄까. 글을 쓰다 보면 다음을 어떻게 이어갈지 머뭇거리고, 적절한 표현을 찾느라 망설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리저리 글을 고쳐보다가, 그나마 나아 보이는 상태로 퇴고를 멈춘다. 아직 미진한 마음이 남은 채다. 그래서 마감된 글을 읽다 보면 중간중간 내가 망설인 흔적이 발견된다. 류테일의 글에선 그런 흔적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을 얻기 위해 실제로 망설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프롬프트를 두 번 입력했을 뿐이다.
마르고 닳도록 해온 이야기를 관성적으로 써내는 작가처럼, 류테일은 한 호흡에 글을 뱉어냈다. 고심한 흔적을 남기는 대신 둥글고 무난하게만 쭉 이어가는 글이었다. 나는 이런 글을 원한 게 아니었다.
스크롤을 올려 첫 프롬프트를 다시 확인했다.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작가가 자신과 닮은 AI를 만들고, 글쓰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야기’. 그리고 '오늘 나눈 대화를 참고하라'. 바라는 바를 프롬프트에 대강 적기는 했다. 그런데 길고 긴 대화 중 정확히 어떤 부분을 얼마나 반영하라는 것인가. 게다가 글 몇 편을 학습했다고 류테일이 내 한계를 온전히 파악할 리도 없다.
문제는 다음 프롬프트에서도 드러난다. '글에서 부족한 점을 찾고, 그 점을 개선하라'는 지시는 글의 방향타를 류테일에게 전부 넘기는 게으른 요청이다. 더 나은 글을 쓰려는 의지를 또렷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 일은 오직 나의 몫이어야 했다.
'나와 닮았지만 몇 수 위의 존재'가 되어달라고 류테일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데이터를 쌓지 않은 생성형 AI에게 그런 말은 공허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성형 AI가 환상계단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해 줄 듯 보이지만, 결국 그 가능성은 내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표현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램프의 요정에게 비는 막연한 소원 같은 프롬프트로는 원하는 글을 얻을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환상계단의 첫 단을 떠올리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