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식 사고습관이 남긴 흔적
단단한 논거의 기둥을 세우고, 예상 가능한 침투 경로를 모두 차단하라. 그러면 웬만해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 시절 가입한 디베이트 동아리에서 들은 이 이야기에 나는 단숨에 매혹됐다. 이 방식으로 토론을 준비하는 데 익숙해진 뒤론, 종종 상대의 발언이 느리게 뻗어오는 펀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여유롭게 상대의 주장을 정리하고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반격을 가하면 됐다. 그 경험을 하고 나서는 디베이트가 주는 재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되고, 스스로 강제 격리하듯 은퇴 경기를 치르고서야 겨우 동아리 활동을 졸업했다.
내가 경험한 디베이트는 일종의 역할극 게임이었다. 우리 팀이 찬반 중 어느 쪽을 맡게 될지는 무작위로 결정되었으므로, 두 입장을 모두 철저하게 준비해 놓아야 했다. 그래야만 어떤 입장이 주어져도 메소드 연기처럼 몰입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고사성어 '모순(矛盾)'에 얽힌 이야기를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방패도 뚫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내는 방패'를 판매했던 상인 이야기다. 그 상인의 패착은 자신이 준비한 창과 방패를 '동시에' 팔았다는 데 있다. 만약 손님에게 어떤 병기가 필요한지 먼저 묻고, 답변에 따라 적절한 물건을 내놓았다면 그렇게 비웃음거리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디베이트는 최고의 창과 방패를 만들어 놓고, 상황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열심히 파는 일과 비슷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디베이트 준비 방식일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내게 이 프레임워크는 세상을 살아가는 공략법처럼 느껴졌다. 이 방식을 '디베이트' 대신 다른 상황에 적용한다고 가정 해보자. 이를테면 '면접'이나 '연봉 협상' 같은 상황 말이다. 높은 확률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거나, 최소한 매우 경쟁력 있고 잘 준비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 프레임워크에서 목적 자리에 있는 ‘토론에서의 승리’를 다른 걸로 바꿔 넣어도 거의 언제나 유용하게 작동할 도구임이 분명했다. 실제로 나는 이 방식으로 몇몇 삶의 전장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한 진보 성향 시민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담당 간사님과 점심을 먹다가 디베이트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구체적인 표현이 기억나진 않으나,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정하 씨가 기자 지망생인데 토론을 너무 게임처럼 접근하는 것 같아서 우려스러워요. 그런 토론만 하다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모 보수 언론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논리 기술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그에게 '토론'은 각자 바라는 세상에 관한 신념을 발언하는 자리어야 했다. 그런데 확실히 내가 그에게 이야기한 디베이트는 게임이나 스포츠 경기 같은 측면이 있다. 원래 신념이 어떻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더 많은 청중이 내 주장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디베이트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디베이트는 패널뿐 아니라 관전자도 이것이 '역할극 게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아무도 저 사람이 지금 하는 주장이 그의 본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청중에게 소구하기 위해 준비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을 뿐이다. 관전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양측의 첨예한 싸움을 지켜보며, 어느 쪽을 지지할지 검토한다.
만약 현실에서 토론 기술로 사람들을 이리저리 선동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디베이트 게임과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개인의 윤리 문제일 뿐, 디베이트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오히려 나는 디베이트를 통해 내 신념이 편협함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내는 법을 배웠다. 디베이트에 임하려면 우선 상대편 주장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 효과적인 대응 논리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든지 다음 경기에는 지금과 정반대 입장에 서서 토론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대로 토론을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관점을 메타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디베이트 역할극이 끝난 뒤 원래의 나는 이 입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신념을 형성한다.
이 과정을 거듭하며 내가 신념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미디어나 주변 환경을 통해 형성된 '취향'에 불과했음을 깨닫곤 했다. 디베이트를 준비하며 어떤 이슈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된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언론인을 지망하던 내게 서로 다른 주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은 필수적이었고, 디베이트는 그런 신중함을 길러줬다. 대학 졸업 후 꽤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디베이트식 사고 구조는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디베이트가 정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의 비기였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디베이트에서 익힌 ‘예측 방어’ 습관이 몸에 배면서, 나는 매사에 반론을 자동 생성하기 시작했다. 친구나 동료가 뭔가 견해를 펴면, 내 머릿속엔 즉시 반박 논리가 줄줄이 떠올랐다. 심지어 나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를 그만두기로 하고 다음 진로를 고민하면서 ‘저 일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 길에 놓인 위험 요소들을 떠올렸다. 결국 어떤 견해나 선택도 나를 강하게 매혹하지 못했다.
디베이트적으로 사고하다 보면 언젠가 남들보다 견고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는 '글쎄' 하는 태도로 끝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유보하는, 떨떠름한 관조자가 되어버렸다. 모든 선택지에 반박 논리를 갖춘 나는 오랫동안 거의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더욱 최적화된 길을 찾으려다, 정작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무 길이나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빠져나오기 힘든 교착 상태에 단단히 발이 묶여 버렸다.
웬만해선 패배하지 않게 해준다던 디베이트의 프레임워크는 정말로 나를 여러 실패로부터 지켜주었다. 다만, 승리와 성취의 기쁨 또한 점점 맛볼 수 없게 되었다. 패배를 복기하며 배움을 얻을 기회를 날려버린 탓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안온하고 답답한 현상 유지뿐이다. 지금껏 나는 친구들도 떠나버린 토론장에 혼자 앉아, 끝없이 펼쳐지는 논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패배자의 얼굴로 말이다. 그런 식의 패배는 더 이상 허용되어선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