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당시 이정미 헌법재판관이 헌재소장 대행으로 읽은 판결문의 일부이다.
탄핵은 그렇게 인용되었다.
나에게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건조하게 말라버린 잉크의 흔적이었고, 6월 민주항쟁은 삼촌의 학생운동으로 노심초사했었던 가족의 불안과 아버지 자동차 문틈으로 맡았던 최루탄으로 얼룩진 공포의 기억이었다. 그런 나는 무능한 정부는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만 했지 그것이 나의 힘과 시민의 집단지성으로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시민은 더 이상 말라버린 잉크가 아닌 국가를 움직이는 정신이며, 불안과 공포로 움츠려 있지 않고 세상을 추동하는 생명이었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 국가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다. 국가의 개념은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체득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정이 무엇인지 정의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경험으로 체득하는 개념은 시대적 환경과 개인의 체험에 따라 다르다. 국가관 또한 세대 간, 세대 안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피통치자인 시민과 통치자인 권력자 간의 국가관도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에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관대로 국가가 운영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실제로 피통치자와 통치자의 국가관이 다를 수 있으니 그런 일은 쉽게 발생한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인간은 인지부조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시작한다. 도대체가 국가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2016년, 2017년 그때 나는 그러했고 그때 이 책을 읽었다.
학술적으로 국가관은 크게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목적론적 국가관으로 구분한다. 이 명칭들이 낯설긴 하여도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이 속한 국가관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명칭을 모를 뿐 그 의미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이렇다면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시민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있는 국가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혼자 힘으로 훌륭한 국가를 만들지는 못한다.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들이다. 어떤 시민인가? 자신이 민주공화국 주권자라는 사실에 대해 대통령이 된 것과 똑같은 무게의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이다. 주권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이며 어떤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아는 시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책임지면서 공동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고 행동할 줄 아는 시민이다. 그런 시민이라야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p. 310.
국가에 대한 인지부조화를 겪기 시작한 것이 2016,2017년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부터는 늘 조금씩 겪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모습이 고정되어 있기 않기 때문이다. 변모하는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서 국가의 모습-집권당이나 시민의 가치관- 역시 달라지고 있다. 기존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자 하는 진보는 늘 대립한다. 보수는 틀리고 진보는 맞다, 보수는 옳고 진보는 그르다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변화할 것인가.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민이야말로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정의보다 그 구성원인 시민이 어떠한가 가 더 중요하다. 시민이 국가를 만들어가는 주체이며 의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저자를 텔레비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심야토론이 아닌 예능에서의 그의 행보는 예전과 달랐다. 또한 그는 진보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했었다. "어용"이라는 말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권력에 붙어 행동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늘 콤플렉스가 있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시작하였기에 청렴 내지 무결점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진보가 만든 가치는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고 진보끼리도 서로 부정하게 된다. 반면에 기존의 가치를 옹호하는 보수는 늘 공격의 대상이라서 어느 정도의 흠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심지어 부정부패 또한 비교적 쉽게 덮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진보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권력-방송인으로 활동하는 그에게 권력은 대중일듯하다.-의 힘을 빌려서 그가 잃었던 사람과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건 아닐까. 세상에 완전한 청렴과 무결점이 과연 존재할까. 그런 면에서 그의 발언과 행보는 온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지식인이란 일정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세계관과 인식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식인은 우리 시민들에게 그들이 아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바른 선택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국가의 의미이자 구성원인 시민,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서두에 밝혔지만 나는 무능한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도 교체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었다. 그것은 경험의 부재도 있었지만 정부가 행사하는 합법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법치주의를 내세워 시민들을 가둘 수 있으며 징벌할 수도 있음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법치주의'라는 말이 큰 오해를 받고 있다. 법치주의는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르시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리는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에 어떤 주의(主義:이론이나 학설)가 필요하지 않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원칙이다. 법치주의는 통치받는 자가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한다. p.57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것은 시민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를 제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그렇다고 법 앞에서 무뢰한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볼 거울도 필요하지만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렌즈도 필요하기에 그 렌즈를 장착하고 당당한 시민이 되고자 한다.
5월 9일, 이제 새벽입니다,라고 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리는 것 같다. 권력자에게 새벽을 기대하기보다는 그 새벽을 여는 시민인 내가 되기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