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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Feb 28. 2021

삶은 나의 언어를 묵묵히 읽어 나가는 것이다.

『오직 두 사람』을 읽고.

『오직 두 사람』을 읽고.


  상실감, 그 끝은 어디일까. 시작이 있음에도 끝이 없다는 건 시작과 끝은 한 쌍이 아니거나 정작 중요한 것은 시작과 끝이 아닐 거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 의문은 현실의 부조리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오직 두 사람』, 현주의 마지막 말에서 멈췄다. 책을 다시 펼치며 나의 상실감을 들여다보았다.

  서른둘, 청초했던 아내의 투병은 삶의 지반을 깡그리 무너뜨리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땅은 무너져 내렸고 맨홀 뚜껑들은 제자리를 잃고 나뒹굴었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밟았고 깊은 하수도에 빠져버렸다. 빛을 찾아볼 수 없는 하수도 안을 걸으며 어떻게 끝날지 보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에 더 두려웠다. 아내의 고통에 대한 참담한 슬픔과 좌절은 끝끝내 그녀가 아닌 나에게로 점철되었다. 칠흑 같은 하수도를 함께 걷지 못한 게 못내 미안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현실의 부조리를 감당할 힘이 없었다.

  아내는, 파손된 맨홀을 밟고 하수도에 빠져버린 것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속절없이 당해야 했다. 젊고 건강했던 아내는 하루아침에 시한부로 전락하며 둘째 아이를 잃고 말았다. 나는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인생이 아무리 무방비스럽다지만 억울했다. 아내의 온기도, 둘째 아이와의 만남도 송두리째 빼앗겼다. 일순간 나에게는 앞을 볼 수 없는 암흑과 진공 같은 침묵만이 허락되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연무가 햇살에 걷히는 것과 달리, 깊은 상실감은 하수도에서 벗어났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아내를 묻어주고 며칠이 지나 아이와 산책을 나갔다. 한낮의 여유에 흠뻑 젖어있는 사람들, 그들의 언어는 매우 낯설었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의 언어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세상과 닿지 못하는 나는 상실감으로 더 깊은 하수도 안으로 매몰되었다. 아내의 투병은 끝이 났지만 끝난 건 오직 그녀의 삶뿐이었고, 나는 여전히 하수도 안에 있었으며, 그곳에는 아이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에릭 프롬은 자유란 견디기 힘든 고독과 통렬한 책임을 수반한다, 고 했다. 고독과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자신의 삶이지만 선택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어 누군가의 조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사랑과는 별개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오직 두 사람』의 박교수와 그의 딸, 현주가 그러했다. 현주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선택에 의지했고, 박교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닮은 딸에게 의존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도, 딸은 향한 사랑도 아닌 그저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일 뿐이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생존자처럼 한쪽을 잃어버리면 자신의 언어를 누구도 이해할 수 없기에 집착하며 전전긍긍했다.

  삶은 각자의 시간이기에 너무나도 개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므로 지극히 보편적이다. 현주가 느낀 두려움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기도 했다. 나 역시 혼자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생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언어는 사고 활동의 기본 단위이다. 사물의 간단한 이름부터 철학적 난제까지, 우리는 언어를 이용하여 명명하며 사유한다. 언어는 망망대해의 광대함과 사막의 광막함에서 탐험가를 인도하는 북쪽 하늘의 별이다. 북극성이 없다면 탐험가가 필시 자연의 광활함에 갇히듯,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는 진공에 갇힐 것이다. 무언가를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개념화할 수 없는 우리들은 그 진공을 감정으로만 가득 채울 수밖에 없다. 광활한 감정의 혼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암흑과 침묵만이 허락된 나의 하수도는 혼돈으로 -그것은 좌절, 공포, 불안, 희망, 기대, 외로움, 믿음, 회한, 분통, 미안함, 억울함 그리고 모든 것과 그것들의 찌꺼기로 가득했다. 언어의 힘을 빌려 그날을 기억한다면 단언컨대 하수도는 외로움으로 용적량을 거의 다 채웠다. 그것은 하수도 안팎이 다르지 않았다. 나의 언어가 그들과 다르다고 느낀 그날, 한낮의 햇살을 피해 그늘에 자리를 잡은 그들의 언어는 행복으로 다채롭게 뿜어졌다. 그들이 토해내는 언어, 그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듣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외면해야 했다. 외로움은 나의 언어가 되었다.

  내면의 감정은 언어로 변환되어 공간으로 송출된다. 일종의 시그널이다. 그것은 교신을 위해 라디오처럼 주파수를 맞춘다. 실연의 아픔은 실연당한 사람에게, 해고의 낙심은 해고당한 사람에게, 참척의 고통은 참척을 당한 사람에게 송수신이 된다. 나는 딸에게 외로움의 시그널을 보냈다. 그것은 나의 언어를 수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같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박교수 역시 그러한 이유로 현주에게 시그널을 보내지 않았을까.

  박교수의 시그널을 수신하던 현주는 그의 언어가 자신의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박교수의 시그널은 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고독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혼돈에서 구원했던 언어는 역설적으로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언어는 생득적 재능이 아니라 유아기부터 습득하는 후천적 기능이다. 그것은 태생적 산물이 아니기에 가변적이며 불완전하다. 언어는 삶을 견고하게 만들어주지만 태생적인 얼굴만큼 뚜렷하진 못하다. 즉, 가지고 태어난 얼굴은 자신의 외면을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반면에 언어는 습득한 기능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 언어로 변환된 내면의 감정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불확실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오해를 만든다.

  오해는 대개 불행에 의해 밝혀진다. 현주가 암에 걸려서야 오해를 깨닫는 것은 불행, 그 자체가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으로부터 우리를 묶어주는 것, 다시 외로움으로 내던져지는 것, 모두 불행에서 기인한다. 불행은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장애물과도 같다. 원하지 않기에 그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불행 앞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당한다. 더군다나 폭력은 자신에게만 닥치는 것 같아 무척 외롭다. 그렇기에 폭력을 당하는 순간에는 누구도 주위를 둘러보기 힘들다. 생존을 위해 오직 스스로에게만 집중한다. 아내의 고통, 좌절, 슬픔이 나에게로만 점철되었던 이기적인 과거들, 현주보다는 자신의 외로움에만 집중했던 박교수, 어쩌면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을 거라고 변명한다면 부당할까.

  겨울의 길목에서 강도에게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나와 아내는 어땠을까. 항암주사를 맞으며, 눈물로 기도를 올리며, 기적을 찾아 헤매었던 도로 위에서, 거친 단말마 앞에서 흘렸던 눈물은 우리 둘에게 같은 시간이었을까.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은 인간에게 어떻게 각인될까. 공간은 외적 감각으로 개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시간은 내적 감각으로 개인의 내면에 다르게 형성된다. 즉, 동일하게 주어지는 공간 속에서 시간은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체험된다. 동상이몽, 같은 장소에 있지만 우리는 다른 꿈을 꾸며 다른 생각을 한다. 감정 시그널을 교환했다고 믿은 현주 또한 종국에 이르러서 깨닫는다, 박교수와 다른 생각을 했다는 걸. 아내는 죽음의 시간을, 나는 이별의 시간을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

  아내는 투병 기간 내내 죽음을 외면했다. 죽음을 외면한 느닷없는 죽음은 남겨진 두 사람에게 어떤 말도 남기지 못했다. 9년의 연애와 3년의 결혼, 12년간 그녀를 알아왔지만 아내의 시간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막연함의 위대함과 그 막연함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또 다른 길임을- 느낄 뿐이다. 언어는 내면의 시간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혼돈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러나 감정이 각인된 시간을 공간으로 언어화하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나와 아내가 12년 동안 나눠왔던 언어들이 어쩌면 혼잣말들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에 한없이 고적해진다.

  아내가 소천한 뒤, 나는 아이와 같은 공간에 놓였다. 사별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같은 시간을 보냈을까. 아이와 주파수를 맞춰서 감정 시그널을 교환했다고 믿었던 건 일방적인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박교수가 현주에게 그랬듯이 아니면 현주가 박교수가 그랬듯이.

   세상에 홀로 던져지는 것, 불행은 폭력이며, 세상에 혼자 놓이는 것, 불행은 외로움의 한 형태이다. 박교수는 가족, 모교의 대학 강단, 그의 생명과도 같았던 젊음으로부터 혼자 놓인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박교수는 자신의 상실감을 현주가 알아주기 바란다. 현주는 삶의 무게를 회피하며 자신의 꿈보다 박교수의 결정을 따른다. 그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은 “고독과 책임”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교수는 현주가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기만 바랐고, 현주는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박교수의 마음만 읽는다. 두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고독과 책임을 등지고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넘긴 것이다.

  나는 폭력과도 같았던 아내의 죽음으로 세상에 혼자 놓였다. 외로웠고 그럴수록 더욱더 딸을 가슴에 품으며 또 다른 박교수가 되어갔다. 나의 슬픔과 상실감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럴수록 아이에게 더 살갑고 애틋하게 대했다. 그건 나의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두 사람이 되어가던 어느 날, 몇 달 간격으로 누구보다 대외활동이 왕성했던 친구의 공황장애, 결혼 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이혼, 형수의 투병을 알리지 않았던 선배의 사별을 듣게 되었다. 그들의 불행을 위로 삼아 위안을 얻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슬픔에 절절하게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겪고 있는 외로움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소식은『오직 두 사람』을 덮은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현주의 마지막 말을 생각나게 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그런데 그게 막 그렇게 두렵지는 않아요. 그냥 좀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에요.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된 탓이겠죠. p.41.


  현주가 박교수의 죽음으로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되었듯, 우리들도 강도같이 들이닥친 불행으로 인해 깊은 하수도에 빠지며, 무언가를 상실하고 혼자만의 언어를 가지게 된다. 나는 아내의 상실을, 친구는 공황장애를, 또 다른 친구는 이혼의 아픔을 그리고 선배는 나와는 다른 사별을 각자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간다. 우리 모두의 상실감은 그 시작과 동시에 가슴에 상감되었다.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실감이 하나 둘 늘어간다. 물론 상감된 상실감은 세월에 풍화되어 옅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작과 끝은 예측할 수 없기에 통제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통제를 벗어난 문제에 더 이상 얽매여선 안 된다. 중요한 건 깜깜하고 외로운 하수도 안에서 나만의 언어를 읽어내는 과정-삶이다. 그것이 때로 막연함의 위대함에 이끌려 치유되고 해석되는 것은 사실이나, 오롯이 자신이 직접 들여다보고 읽어내야만 한다. 내면의 시간은 타인들이 절대 읽어낼 수 없는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소천한 지 8년이 되었다. 잠잠히 나의 언어를 들여다본다. 하수도에서의 외로움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을 향한 믿음을 읽는다. 이제는 외로움 때문에 아이에게 내 삶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 책을 덮으며 현주의 마지막 말을, 이제는 나의 언어로 다시 읽는다. "그냥 조금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은 들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나의 언어를 묵묵히 읽어 나가는 것. 삶은 누구에게나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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