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작품은 외부인으로서 건네는 애도를 넘어, 투쟁을 말할 수 있는가.
* 본 글은 2024년 서울변방연극제에서, 9월 1일부터 2일까지 세운상가 지하 1층 세운홀에서 열리는 프로젝트 불똥 × 플랫폼c의 연극 <현지 가이드와 함께 하는 동아시아 맞춤 투어> 단평입니다. 현재 극의 예매는 모두 매진 상황이긴 한데, 당일 좌석 여부에 따라 현장 입장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극에 관심있는 분들은 2일에 열리는 연극에 참여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노동을 비롯한 사회적 현안을 다루는 작품은 계속 꾸준하게 등장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스폰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적은 연극의 영역에서는 더욱 두드러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심지어는 미국 문화 자본주의의 첨병인 디즈니도 1899년 미국 뉴욕에서 신문을 팔던 청소년 노동자의 파업을 소재를 삼았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뉴시즈>를 2012년부터 브로드웨이에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로 노동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약자들의 엄살로 생각하는 냉혈한이 아니라면, 쉽게 다른 존재나 비인간 등으로 대체할 수 있는 사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노동의 고됨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감’을 넘어 ‘행동’을 촉구하는 순간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된다. 눈 앞에서 재현된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용이한 일이지만, 이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거리나 광장에서 목소리를 외치고, 이를 위한 사회운동단체에 힘을 모으고, 같이 투쟁에 참여하자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행동력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한층 더 넘어서, 현재의 체제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를 바꿔 나가야 한다는 권유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 그저 한국 내의 관점으로만 풀지 않고, 한국이 위치한 동아시아 전역의 문제로 바라보며 전방위의 연대와 상시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제안 역시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기는 매한가지다. 한 발 짝 떨어져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쉬운 공감의 말을 던지는 것과, 함께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서서 사회의 눈초리나 경찰의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의 벡터의 방향은 같지 않다.
그래서 어떤 창작물들은 공감 그 이상으로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기도 한다. 한창 변혁의 가능성이 바로 눈 앞에 놓인 것처럼 느껴졌던 20세기 초반, 특히 한국에서는 변혁을 내건 사회운동이 본격적으로 타올랐던 1970-1980년대의 작품들이 특히 그러했다. 대안을 외치는 목소리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사그라지면서 이러한 작품들도 조금씩 모습을 감췄지만 완전하게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외주화와 왜곡된 개념을 대거 등장시키며 노동권을 제대로 주장하기 어려운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는 시대에, 기후 위기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미뤄두고 생각해도 상관 없는 일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아픔을 쉽게 망각하고 패권 경쟁과 ‘신냉전’을 새로운 기본으로 체화하고 있는 환경에서는 특히 그렇다. 먼발치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고, 논쟁하며, 실천하며 행동하는 움직임이 더욱 요구된다.
이러한 고민이 서울변방연극제와 플랫폼c가 만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서울변방연극제는 이름처럼 일반적인 무대의 공간도, 흔하게 인식되는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는 작품을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도해왔던 곳이다. 일반적인 ‘극단’이 아닌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작품을 만드는 장을 몇 차례 주기도 했었다. 한편 플랫폼c는 ‘정파’나 ‘관료적인 행동’ 같은 오랜 시간 굳어진 사회운동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모색하고 있다. 노동이나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인권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기후위기나 체제전환운동 같이 중장기적인 사안에서 점차 지금 당장의 행동이 필요한 사안에 대한 움직임에도 함께 참여 중이다. 한국 내에서만 시선을 가두는 대신, 동아시아 전반의 연대에도 발을 넓히고 있다. 문화소모임 같이 문화예술적인 기획을 사회운동과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틀에서 벗어나 현재에 맞는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은 그렇게 접점을 만들게 되었다.
작품은 ‘현지 가이드’와 ‘동아시아 맞춤 투어’라는 말대로 가이드가 동행하는 일종의 가상 여행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한국 서울에서 출발해 중국 선전을 거쳐, 일본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슬라웨시 섬, 미얀마 양곤, 홍콩,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상하이를 향하는 무척이나 긴 대장정이다. (여기에, 다시 한국 서울의 ‘광장’으로 돌아오는 귀국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길고 긴 여행이 2시간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동안 서울 세운상가 지하의 세운홀에서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가상현실(VR)을 컨셉으로 차용한 극이기도 하다. 흔히 생각하는 무대의 정면뿐만 아니라, 무대의 양옆으로 각각 하나의 스크린을 배치하여 총 3개의 스크린을 활용하는 연출에서는 VR 헤드셋 없는 가상의 공간이 형상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이에 맞춰 작품은 3개의 스크린을 관객이 하나의 순간과 공간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무대를 최대한 정형화하지 않게 흘러간다. 마치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서 여행자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작품은 동아시아의 다양한 공간과 시간을 담아낸 장이 전환될 때마다 가이드 역할을 맡은 이의 지시에 따라 관객의 몸을 움직이도록 한다. (몸을 움직이기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 세운홀에 설치된 계단 좌석에서도 전체적인 틀을 볼 수 있도록 무대를 구성하기도 했다.)극의 내용 역시 한 방향에서만 전개되는 대신, 극이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특히 극의 후반부에서 가상의 사거리를 그리고, 그 사거리 위에서 배우와 무대의 소품이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배우와 관객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관객이 극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든 연극)처럼 느껴지도록 한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연은 대다수의 이머시브 시어터처럼 관객이 장르적인 요소가 강한 가상의 세계관에 몰입하기 바라는 대신, 지금 현재 동아시아 여기저기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 중인 연속되는 현상에 몰입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내용은 방송사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은 물론,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 TV나 신문 같은 전통적인 레거시 미디어를 대체하여 등장하는 유튜브·틱톡 등의 뉴미디어에서도 딱히 각광받는 컨텐츠는 결코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때로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때로는 정부가 추동하는 전쟁의 광기에서, 때로는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를 탄압하는 억압된 정국에서 희생당하고 큰 피해를 입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때로는 현실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처럼 그려지기도, 또는 억압받는 상황 자체를 기호적으로 형상화한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식의 전개로든 후반 이전까지 각 장에 등장한 이들은 자신들이 등장해야 할 장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마치 유령처럼 계속 이 무대를 뱅글뱅글 돌면서 배회한다. 마치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다는 듯이, 이대로 이 공간에서 떠나 피안으로 가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다는 듯이.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몇몇 연극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되었던 연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연출은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다른 흐름과 귀결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코로나-19가 아직 한창이던 2022년,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 시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화재에 대해 상하이 도심에서 ‘백지시위’를 다루는 장에서 정말로 현장에서 즉석으로 피켓을 만들고 붙이는 퍼포먼스가 전개되기 시작하고, 이윽고 무대 밖을 정말로 뛰쳐 나와 정말로 시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험적인 연극을 꾀한다고 하더라도, 미술품 전시 공간의 ‘화이트박스’처럼 ‘블랙박스’가 가지는 물적이며 개념적인 정의의 틀은 쉽게 깰 수 없다. (특히 이 연극은 ‘여행 가이드’라는 존재가 등장하기에, 더욱 이들의 지시에 따르기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은 작중에서 나온 이야기를 결코 작품 내적으로, 공간 내부에서만 울려 퍼지는 것으로는 결코 자신들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없음을 이런 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해당 작품에 참여한,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활동명으로 잘 알려진 한받이 꾸준히 선보았던 퍼포먼스와의 접합이기도 하지만, 작품이 내부로 침잠하는 대신 공간을 깨고 나와 외부로 분출하는 방향성을 취하고 있기에 더욱 유기적인 결합이 가능했을 것이다. 공연이 벌어진 세운상가라는 공간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좋은 광장이 있고 기약 없고, 주체가 점차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시재생’에 번농당하다 결국 공간 자체가 개발의 광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에 더욱 공간의 맥락과도 조응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물론 이 시위는 결국 엄밀하게 말하면 공연을 위해서 기획된 하나의 퍼포먼스이다. 이 연극을 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원래도 비슷한 주제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많을 가능성이 높고, 이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일상적인 행동으로 체화되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애도하는 이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사회운동단체의 입장에서 연극의 차원에서 하나의 분명한 대답으로 내놓은 시도기도 하다. 과거의 성공사례에서 답습하는 것을 피하며, 멀리에서 쉬운 말 한마디만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길 수 있음을 작품은 넌지시 드러낸다. 기동성이 좋은 작품이기에 다른 투쟁현장이자 연대의 장소에서 약식으로 꾸리기에도 좋아보였다.
작품을 보면서, 문득 최근 타계한 김민기의 연극 시도가 떠올랐다. 이제 그는 연극의 차원에서는 <지하철 1호선>이나 <고추장 떡볶이> 같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공장의 불빛> 같은 분명한 투쟁의 메시지가 담긴 음악극을 시도했던 이기도 하다. <공장의 불빛>은 일반적인 연극 무대가 아니라, 실제 투쟁을 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에 맞게 배우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알릴 수 있는 유연한 형태의 작품이었다. 1970-1980년대의 노동자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유심하게 귀기울이며, 이들의 목소리를 극의 대사로 삽입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너무 과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현지 가이드와 함께 하는 동아시아 맞춤 투어>는 <공장의 불빛>을 2024년 현재의 상황에 맞춰 적확하게 재해석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노동과 권리의 문제가 일국에 한정될 수도, 한정해서 풀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의 투쟁이 필요함을 인식 가능한가. 그리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배우가 되었던 연극 <구일만햄릿>, 그리고 이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룬 김성균의 다큐멘터리 <내가 처한 연극>이 고민했던 길이, 다시 약 10년 뒤 이렇게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