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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Sep 09. 2024

애니메이션 <룩 백> 단평: 창작자가 말하는 창작(자)

후지모토 타츠키의 인상적인 원작에, 새로운 움직임을 부여하며 깊게.

* 이 글에는 작품의 중요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 중에 만화가 싫은 사람이 얼마냐 있겠냐만, <체인소 맨> <파이어 펀치> 등을 그린 후지모토 타츠키는 정말 만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군데군데에서 묻어나는 작가입니다. 작가의 말로는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물감을 살 돈이 없어 돈을 벌기 위해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하지만, 또 그렇게만 보기에는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여정은 마냥 단순치는 않습니다. 한국의 ‘디시인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카연갤) 마냥 누구나 만화를 올릴 수 있는 온라인 만화 플랫폼 ‘니트샤‘(新都社)에 작품을 제법 올리기도 했었고, 장편을 연재하는 도중에 꾸준히 단편 작업을, 그런데 그냥 단편이 아니라 단행본 한 권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긴 작품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만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그저 돈만 벌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느낌은 아닙니다.


그의 단편 만화 <룩 백>은 후지모토 타츠키의 이러한 마음과 행보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체인소 맨>이 2020년 12월에 1부 연재를 마치고 잠시 연재를 중단 중이다, 갑자기 2021년 7월 웹코믹 플랫폼 <소년 점프+>에 단편을 올린 거죠. 그것도 144페이지나 되는, 중편이라 부르는게 더 어울릴 정도의 작품을요. 사실상 얇은 단행본 단권의 작품을 무료로 공개하는 터이라 화제가 되었고 (지금은 단행본이 정식 출간되며 무료로 볼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19 시기 외부 활동이 어려워진 상황이 겹치면서 더욱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24년에 되어 이 작품이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습니다. 연출은 이전 <플립 플래퍼즈>의 연출을 맡으며 유려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아낌없이 드러낸 오시야마 키요타카가, 애니메이션 실제작사 역시 오시먀가가 세운 스튜디오 두리안이 맡았습니다. 단편 만화로서는 길지만,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웠던 원작 만화처럼 작품의 상영 시간은 1시간에서 살짝 모자란 정도입니다.


이미 원작 작가의 장편 만화 <체인소 맨>이 여러 평이 엇갈리는 와중에서도 꽤나 준수하게 연출이 되었던 것처럼, <룩 백>은 <체인소 맨>과 제작사는 달라도 여러 기대를 받았습니다. 연출가도 이미 두각을 드러낸 신예 감독이고, 무엇보다 후지모토 타츠키가 영화을 무척 좋아하기에, <룩 백>을 비롯한 후지모토의 작품들에선 마치 어떤 순간에는 영화 스토리보드가 연상될 정도로 영화의 미쟝센이나 컷을 디자인히는 감각이 강했으니까요. 일본 만화가 영화에 큰 영향을 받으며 구축된 만큼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경향성은 있지만, 그 성향이 더욱 강한 후지모토의 작품은 이러한 요소가 호불호를 낳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이 영상으로 재탄생한다면, 궁금할 수 밖에는 없게 되겠죠.


그렇게 애니메이션이 된 작품은 원작하고 크게 차이 없는 스토리를 걸어갑니다. 주인공 ‘후지노‘(카와이 유미)는 만화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매주 나오는 학교 소식지에 매주 빠짐없이 4컷 만화를 그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스포츠에도 재능이 있고, 친한 친구들도 제법 있어 보입니다. 나이가 어린데 만화를 참 잘 그린다고 주변 어른들이나 같은 반 친구들도 계속 칭찬만 해주니, 정말 세상 무서울 게 없게만 느껴져요.


하지만 이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뀝니다. 선생님이 오랜 시간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는 다른 반의 ‘쿄모토’(요시다 미즈키)에게 학교 소식지 4컷 만화 지면을 주기 시작하면서 부터, 후지노가 바라보던 세계는 너무 좁다는 사실을 알게 된거죠. 쿄모토의 그림은 후지노는 물론 누가 보기에도 초등학생이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고 감각적이었으니까요. 후지노는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오로지 만화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합니다. 쿄모토는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하루 종일 만화만 그릴 수 있으니, 자기 역시 좋아하던 스포츠도,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멈추고, 밤을 새면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거죠.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서 그림을 그려도 후지노는 자신이 쿄모토의 실력을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끼고 맙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후지노는 만화 그리기를 멈추고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졸업식 날 후지노는 결국 졸업하는 순간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쿄모토의 집에 찾아가 졸업장을 주고 와라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처음으로 쿄모토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계속 서로의 작품을 학교 소식지에만 보았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둘은 다시 우연한 계기로 서로를 만나게 되죠. 한동안 식어 있던 후지노의 만화에 대한 열정도 이를 계기로 다시 불 붙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운명은 다시 이 둘에게 생각치도 못한 일들을 낳고 맙니다.


만화 <룩 백>은 이래저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작품이 작가의 만화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강하게 투사되어 있다는 것이겠죠. 주인공의 이름이 작가의 이름하고 참 비슷하며, 작가의 고향 아키타처럼 두 주인공이 살고 있는 동네도 겨울에 눈이 산더미처럼 내리는, 도시보다는 시골에 기까운 느낌의 동네이고, 실제 후지모토가 그랬던 것처럼 후지노 역시 17세에 본격적인 프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결정적으로 후지노가 본격적으로 그린 만화의 표지는 후지모토의 대표작 <체인소 맨>의 표지 디자인과 무척이나 닮아 있으니까요. 심지어는 후지노가 만화를 그리는 것이 보는 것보다 불편하고 쉽지 않은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것도, 원작자 후지모토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후지모토의 모습이 강하게 투영된 작품은, 후지모토가 어떻게 만화라는 세계와 이를 창작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에 이어, 만화를 그리는- 또는 만화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창작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과 그들 사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죠. 주인공 후지노와 쿄모토는 여러모로 정반대 같습니다. 활발한 성격의 후지노와 달리 쿄모토는 사람들을 만나는게 무서워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이 많은 후지노와 달리, 쿄모토는 후지노가 없으면 늘 혼자 있어요. 하지만 정작 남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후지노와 달리, 쿄모토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말이 서툴어도 매우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은, 경로는 달라도 자신의 삶을 만화에 깊게 맡기고, 그러한 공통점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고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모든 것이 제각기 다르지만, 사실은 또 서로가 닮아 있으며 같은 취향과 지향을 지닌 사람들이 친하게 지낼 수 있는가를 그리는 청춘의 이야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각기 다른 경향성을 지닌 창작자들이 (심지어 만화처럼 혼자 작업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 편집자나 같은 화실 사람 외에 쉽게 다른 사람을 보기 어러운 영역이라도) 어떻게 창작자라는 정체성으로 뭉칠 수 있는지를 넌지시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소는, 2019년에 발생한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방화 사건으로 안타깝게 사망한 애니메이터들에 대한 애도입니다. ‘쿄모토’의 이름에서 ‘교토‘가 느껴지는 것처럼, 후반부 벌어지는 사건의 전개 과정과 그 안에서 나온 대사 등등은 매우 짙게 이 작품이 어떤 사건을 은유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 한국 등 해외에서도 많은 충격을 남긴 사건에 여러 애도가 있었습니다. 후지모토는 이를 깊게 드러내는 순간, 판타지의 요소가 하나도 없었던 작품을 살짝 비틀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비틈은 안타까운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결코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바꾸고 싶은 심리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가’가 ‘만화’로서 시도하는 기억과 애도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 방법은 르포 만화처럼 사건의 상세한 요소를 기록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룩 백>의 방식처럼 어느 평행우주에서는 존재할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곳에서 평온하게 있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교토 애니메이션의 애니메이터들과 평소에 친분이 깊은 관계는 아니었겠지만, 동료 창작자의 시선에서 그들이 살았을 삶을 생각하고, 갑작스러운 떠나감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쉽게 잊지 않겠음을 작품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흐름을 약간의 수정을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드러내고 연출로 드러냅니다. 후지모토의 만화에 영상의 요소가 많기에, 애니메이션 또한 만화의 각 컷과 컷의 이어짐을 재현한 듯한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요소를 그저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만화에서 고정된 컷으로 묘사했던 카메라와 시선의 움직임에 더욱 유려한 프레임을 만들고, 마치 고정된 만화가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보는 독자들에게 생생함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애니메이팅의 리듬을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원경에서 전개되는 씬의 연속은, 후지모토 타츠키가 만화에서 주었던 피사체와의 거리감에 작가가 주고자 했던 의미에 방점을 두는 시퀀스로 작업하며 원작을 요소를 더욱 동적인 감각으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원작 만화가 그랬던 만큼, 애니메이션 역시도 짧은 분량에도 밀도 높게 연출과 서사를, 적재적소에 미쟝센을 배치하며 긴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물론 만화를 그리는 과정에 대한 어려움을 ‘창작자의 고생과 헌신으로 한 편의 작품이 나온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그랬던 것처럼 애니메이션 <룩 백>도 서로 관계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창작자’로서 함께 마음을 교류하고 때로는 경의를, 때로는 애도를 할 수 있는지, 그 감정의 여로를 인상적으로 짚고 있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 연출자의 입장에선, 원작의 바탕이 된 사건이 사건인 만큼 더욱 후반부에서 힘을 강하게 준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지점은, 계속  ’창작의 자유‘만을 소리 높일 뿐 ’집게손‘ 운운처럼 제대로 창작자의 권리나, 관계성을 짚지 못하는 순간이 계속 되어온 한국의 상황과도 만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덤 1. 자막의 번역은 크게 문제 없는 편이지만 ’부등교‘(不登校)를 ‘무단결석’으로 번역하는 건 조금 걸립니다. 원작 한국 발매판에서는 ‘등교거부’라고 번역한 것처럼, 작중 쿄모토의 상황은 그렇게 보는게 좀 더 맞지 않을까요.


덤 2. 작품 제작위원회에 현재 아마존 산하에 있는 MGM스튜디오가 참여했습니다. 이미 일본 영화계나 애니메이션에 미국 자본(워너 브러더스 재팬, 유니버설 픽쳐스 재팬 등)이나 중국 자본(비리비리, 텐센트 등)이 참여한지 오래긴 했고, 아마존도 애니메이션의 프라임 비디오 독점/선행 서비스 등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참여한지 꽤 된 상황이긴 했지만, MGM의 로고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게 될 줄은 몰라서 신기했네요. 어떤 의미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더욱 다양한 성격과 국적의 자본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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