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무대
철학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철은 밝을 철(哲)이다. 뚫을 철(徹)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 도덕 선생님은 ”철학은 모든 학문을 뚫는 학문이기 때문에 뚫을 철을 쓰는 철학이다“라고 부르며 뚫을 철로 가르쳐주셨다. 철학에 쓰이든 단어가 밝은 철이란 걸 알게 된 건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철학은 모든 것을 뚫어내는 철갑탄 같은 학문이었던 것 같다. 뚫어내는 학문. 그럼 이 철학은 무엇을 뚫었다는 것일까.
개발자로 살다 보면 개발자 세계의 끝이라 할만한 곳까지 도달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여러 팀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보통 회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다. 물론 이들보다 더 대단한 분들도 있다. 순위를 매길 순 없지만 나이가 주는 혜택을 배제하더라도 개발자 세계에서 실력은 여러 소속 집단으로 증명되고 그에 걸맞은 대접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끝까지 도달한 사람들은 실리콘 벨리를 비롯해 스타트업 대표들이나 CTO들과도 연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로만 살다 보면 만나기 힘든 일들이 끝에 도달해서 뚫고 나가버리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사업도 비슷하다. 사업을 하면서 여러 일들이 많았지만 내가 뚫어낸 것은 영세한 외주 개발사 정도의 한계였다. 그룹 계열사의 세계와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세계는 또 다른 것이었다. 블록체인도 마찬가지였다. 블록체인은 레벨에 따라 완전히 보는 세계가 다르다. 누구는 L1에 속해있고, 누구는 L2에서만 산다. 어떤 이들은 L4d에서만 살다 보니 재단 쪽은 잼병인 경우가 있다. 결과적으로 각각의 레이어를 다 뚫어보면서 살아본 이들은 블록체인 생태계의 이해관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블록체인을 철(徹) 한 것이다.
시장을 뚫어버리는 통찰이 생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다른 시장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된다. 내부자들이 보는 세상과 그것을 통해 3자, 4자 비즈니스 구조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협상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난 2년 넘게 회계사 분들과 여러 협상을 했다. 몇몇 제안은 큰 기업의 인수나 한국 법인 유치에 대한 부분들. 그 과정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포지션들. 각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협상이 이뤄질 수 없었다.
문제는 아무리 철한 협상가들이 협상의 구도를 잡아둔들 한 분야에서만 살아본 멍청이들과는 거래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A사의 지역 총괄이 그랬다. 살면서 그렇게 멍청한 M&A 전문가는 본 적이 없다. 여러 재단들 행사에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면서도 안 잘리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힌 인맥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싶었다.
결국 철학에 도달한 사람들은 철학에 도달한 사람들과 일을 하거나 또는 적어도 주어진 롤을 이행할 수 있는 롤 플레이어들이 필요했다. 단 하나의 세상에서만 살아가다 보니 여러 형태의 가능성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걸 자랑스러워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